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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고통과 권태, 둘 중 하나다.

기분을 앞지르는 봄날씨.


오늘따라 날씨가 너무 좋다.

기억이 나지 않는 시절부터 날씨에 영향을 많이 받는 아이였다. 날이 맑으면 흥이 나고 날이 흐리면 울적했다. 이런 나를 보고 친구들이 할머니냐고 놀리곤 했지만 고백하건대 이 점이 썩 마음에 들었다. 어릴 적부터 익혀온 치트코드랄까. 어랏 왜 기분이 안 좋지? 하면 어김없이 날이 흐리다. 이런 발견에 불편했던 마음도 곧잘 편안해지길 반복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치트코드는 산책이다. 우울한 기분이 들면 귀찮더라도 밥을 먹고 나서 10분이라도 걷기 시작한다. 보낼 사람 없는 사진을 찍고 괜히 길을 뜯어보다 보면 마음이 조금은 나아진다.


그러니 오늘 찾아온 갑작스러운 봄날씨와 느긋한 금요일을 맞이한 커피산책은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참 놀라운 일이다. 이렇게 따뜻하고 화창한 날씨를 마음껏 맞이해주지 못할 죽죽한 기분이 계속된다. 날씨가 이렇게 좋고 나는 산책을 하는 데도 여전히 기분이 구리다니! 눈치 없는 봄 녀석이 기분보다 한참 더 앞서나가버렸다. 생리 주기에 따른 호르몬 문제도 아니고, 어제 과로하지 않고 일찍 퇴근해 만족스러운 저녁을 보냈고, 오늘 업무는 스트레스도 없다.


이유를 헤쳐보다 결국 이번 주 내내 맴돌았던 문장에 다다른다. 요즘사 팟캐스트에서 들었던 전경린 작가의 한 마디. "요즘 사람들이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참 좋아해요. '삶은 고통과 권태 둘 뿐이다.'라는 말에 공감하는 거겠죠. 저는 권태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걸 좋아해요."


고통과 권태뿐이라니. 충격적인 진리를 깨달은 사람처럼 그 구절을 몇 번이고 다시 들었다. 알 수 없는 이 기분의 원인은 '권태'였구나. 지난주까지 업무시간이 하루 14시간을 돌파하며 주말까지도 일을 했고, 지난달은 두 달 내내 매 주말마다 출근을 했다. 학부시절, 심지어 고등학생 때까지 참 많은 공모전을 나가며 사서 고통을 찾아다녔다. 이건 바꿔 말하면 권태를 견디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번 주처럼 야근하지 말고 빨리 퇴근하라는 말을 들으면 (그래도 7시 반이긴 했다.) 어찌할지 몰라 당황부터 하게 되고, 오히려 주말에 출근해야 한다는 말에 약간은 안도한다. (? 맙소사. 중증이다.) 아마도 갑자기 찾아온 여유에 우왕좌왕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권태가 정말이지 익숙하지 않다.


이 팟캐스트 내내 권태를 잘 다루는 사람들은 이렇게 산다는 것을 엿들을 수 있었다. 책을 읽고 사유하고 때로는 누군가와 함께 대화하면서 보내는 거구나. 이렇게 일을 하다간 몸과 마음이 다 망가질 거야,라고 생각했던 2023년의 나로 돌아가 이제는 이 권태를 음미하는 방법을 연습해보려고 한다. 요즘엔 목표를 향해 돌진하던 나의 모습보다, 글쓰기, 영화, 책, 요가, 춤 등. 무용하지만 아름다운 것들을 기꺼이 즐기는 내가 좋다. 참으로 신기한 변화다. 1년 뒤 이것들이 자유자재로 뿜어 나오는 나의 매력의 일부가 되기를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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