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아웃 초중기 즈음 한국에 돌아와 고향으로 내려갔다.
주변에 아무도 없이 혼자 지내고 싶었지만, 자주 마주쳐야 하는 가족들 그리고 답답함.
돌파구를 찾기 위해 무언가를 해야만 할 것 같았다. 우선 혼자 살 집부터 찾아보았지만 한국의 집값이 지방이라 해도 만만치가 않았다.
대안으로 찾은 것은 경매를 통해서 자가 마련하기.
시세보다 저렴한 가격에 월세를 지출하지 않고, 혼자서 조용히 지낼 수 있기에 몇 달 동안 경매 물건 검색에 집중했다. 경매 물건을 검색 기준은 5천만 원 ~ 최대 8천만 원 구축 빌라/아파트로 내가 잘 아는 지역의 물건, 재개발 호재 또는 향후 집값 상승 기대 지역의 전망이 좋은 막히지 않은 높이를 원했다.
지방에는 1980년대부터 90년대 지어진 구축/노후 건물들이 경매에 종종 올라온다. 그러나 가격이 저렴하기 때문에 경쟁률도 높았고 몇 달간 지켜보던 물건이 4차까지 내려서 나에게도 기회가 왔다.
엘리베이터 없는 4층이지만, 몇 년째 재개발 이야기가 돌고 있고 계단 창문에서 보면 바다 전망이 보여서 그곳을 바라보면 답답한 삶에도 숨통이 트일 것만 같았다. 건물은 40년이 지났지만 튼튼해 보였으며, 주변은 동사무소와 초등학교 2개가 근처인 입지도 최적의 장소였기에 꼭 낙찰받고 싶었다.
물건 정보
1987.8.22 사용 승인
엘리베이터 없는 5층 중 4층
대지권 21.84평 / 건물면적 26.16평
감정가 66,000,000원
4차 입찰 최저가 33,792,000원
4차 낙찰가 38,590,000 (58%)
2022년 5월 12일 오전 10시 입찰서를 제출하였고, 11시 이후 개찰 결과를 발표했다.
김ㅇㅇ님, ㅇㅇㅇ님 앞으로 나오세요.
총 2명이 입찰하여 나는 1순위로 최저 입찰가보다 약 500만 원 높게 응찰하여 최종 낙찰자가 되었다.
첫 경매에 낙찰이라니, 짜릿하면서도 감정가의 반 정도로 첫 집을 구매했다는 것에 뿌듯함이 컸다.
경매 물건지 주변에 살았기에 최종 매각 잔금을 입금하기 전까지는 매일을 집 주변을 보러 갔다. 집에는 사람이 없는 듯 보였고, 경매를 당하는 당사자의 마음은 얼마나 힘들지 가늠할 수 없기에 차마 집 내부를 보여달라고 말할 수 없어서 외부만 훑어보고 괜찮다는 판단을 했었다. 그리고 그것이 낙찰을 포기하게 되는 이유가 될 줄은 그때만 해도 예상하지 못했다.
낙찰받은 다음 날 블로그와 책에서 본 대로 매각 물건의 현관문에 낙찰 내역과 연락처, 그리고 집주인이 집 내부를 보여주거나 사진으로 보내줄 수 있는지 문의글을 남겼다. 다행히도 하루 내로 연락이 왔고, 바쁘니 사진으로 보내주겠다고 하여 그것도 나는 고맙다고 하며 통화를 종료했다.
총 5장의 사진을 보내왔는데 집은 예상보다 깔끔해서 벽지와 청소만 해도 바로 거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물건 소유주와 이사 일정을 협의하고 얼마 뒤 이사를 나갔고, 매각 대금 결제 며칠 전 드디어 내부 임장을 할 수 있었다.
알려준 비밀번호로 문을 열고 내부로 들어가서 보자마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 하...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왜 있었을까...
나는 매각 대금 결제일 전 낙찰을 포기하기로 했다.
저렴한 물건이 4차까지 온다는 건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내가 받아 본 사진의 집과 정녕 같은 집이 맞는지, 도대체 무슨 사진을 보낸 건지...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집은 누수와 곰팡이가 심해 다 썩었다. 거실과 방 2개의 천장은 허물어져 뚫려 있었고, 벽지는 흘러내리고 내부는 시커멓게 썩어서 도저히 살 수 없는 폐가 수준. 더 심한 상황은 집 천장과 베란다 등 곳곳에 간극이 생겨서 해당 부분으로 오랫동안 누수가 진행되고 있었고, 심지어 베란다는 불법 확장을 잘 못하였는지 내부 벽이 벌어져 그 틈으로 바깥세상이 보였다.
언제 허물어져도 이상할 것이 없어 보이는 상태.
이런 집에서 소유주와 자녀가 살았었다니 안타까운 마음이 더 크게 들었다.
놀란 마음을 누르고 보니 내가 이런 폐가를 3,580만 원에 매수한다는 것에 기뻐했다는 것이 어이없었다.
리모델링 견적을 대략 알아보아도 집 천장부터 벽까지 재보수에 곰팡이 제거에 기본 틀만 다시 해도 최소 2,000만 원 이상, 그리고 내부 벽지와 썩은 나무 물받이 교체, 장판, 타일, 욕실, 주방, 베란다 등... 전체를 뜯어고쳐야 하는 상황에 난감함이 몰려왔다.
그러는 와중에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A : 00호 낙찰받은 사람이죠?
나 : 네 맞습니다. 누구신지요?
A : 00호에서 물이 새서 아래층도 누수가 심한데 어떻게 하실 건가요?
나 : 네? 실례지만 누구시고 제 번호는 어떻게 아셨나요?
앞뒤 내용 없이 다짜고짜 화를 내며 집수리 협의해야 한다는 말만 반복하고 있어서 "누구신지 밝히시지도 않고 통화를 계속하기는 어렵겠습니다."라고 말하니 그제야 아래층에 거주 중인 사람이라며 윗집이 이사 나가면서 번호를 알려주고, 누수와 처리 관련해서는 나와 얘기를 나누라고 했다고 말했다.
이야~... 이것 참... 어... 굉장하다.
상황이 안타까운 것은 이해하지만, 몇 년간 누수가 발생하고 있었던 것을 서로 인지한 상태에서 나는 아직 아직 명도 전이라 그 부분에 대해서는 처리할 수 없으니, 당사자들 간 협의를 하시라 얘기하고 전화를 끊었다.
집 전체 개조와 함께 아래층 누수로 인한 피해 보상까지 여유자금 2,000만 원 내로는 해결할 엄두가 안 나는 상황이었고, 5천만 원 이상의 비용이 소요되는 것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최종 매각 대금을 지급 전, 미련 없이 경매 담당에게 낙찰 포기를 알렸다.
잘 가라~ 내 첫 경매, 내 집이 될뻔한 집.
입찰 보증금 350만 원은 고스란히 첫 경매와 함께 사라져 버렸지만, 그 보증금은 낙찰이 된 건이므로 돌려받지 못하고 채무자의 빚 탕감에 쓰인다니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도 들었다.
경매, 임장에 대한 무지함과 오지랖이 만들어 낸 결과이니 감내해야 했다.
경매 보증금을 잃은 것에 대해서는 미련이 없다.
돈이 많아서가 아니라 보증금 350만 원 아까워하다 리모델링 비용이 더 크게 지출될 것이고, 추후 노후 건물에서 누수는 계속 발생하면 힘드니 경험의 대가라 생각하는 편이 나았기 때문이다.
무기력한 삶에 돌파구가 필요해서 호기롭게 도전했던 첫 경매 실패 후 몇 번의 입찰을 더 했지만, 그 뒤로 패찰이 이어지면서 번아웃의 문이 열려 버린 것 같았다. 그 뒤로 이어지는 이해하기 힘든 일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