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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ealthy 웰씨킴 9시간전

번아웃 에피소드 2. 이사 그리고 사투


잘해보자 다짐하며.


번아웃으로 2년여의 고립의 시간을 보내다 이렇게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새로운 시작을 해보겠다며 사회생활을 했던 서울로 이사를 결정했다.


첫 집 마련을 위해 꿈을 꿨던 경매 포기 후 가진 돈을 아껴보겠다는 생각으로 보증금 2,000만 원에 월세 45만 원으로 나와있는 서울 관악구 신림동, 언덕지대에 있는 집을 계약하기로 했다. 나름 서울 하늘 아래에서는 가격대비 11평 2.5룸으로 공간이 넓었고, 오래 전이자만 부분 리모델링이 되어 구축빌라 기준에서는 깔끔했기에 언덕이라는 것을 제외하고는 서울에서 찾기 어려운 가성비 월세집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집을 잠시 둘러보고 가계약을 하고서 한 달 뒤 이사하게 된 것이다. 새로운 시작으로 번아웃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 함께 사라졌던 긍정의 기운을 최대한 끌어 모았다. 다시 잘 살 수 있을 것이라고.

그러나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이사와 함께 번아웃의 폭풍이 몰아칠 것이라는 것을.



8월 초 무덥고 습한 날씨,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이사 당일


전세입자는 보증금을 받기 위해 오전 8시에 이사를 오라고 해서 새벽 3시에 이삿짐을 챙겨 지방에서 서울로 왔다. 그러나 계약한 집은 이제 막 시작한 듯 이삿짐센터 직원들이 짐을 옮기고 있었고, 임차인은 임대인과 언쟁을 벌이고 있었다. 약속된 시간을 지키지 않은 것에 대한 미안한 기색도 없이 무턱대고 끝날 때까지 기다리라고 말하는 태도에 기분이 나빴지만 이삿날 얼굴을 붉히고 싶지 않아서 뒷골목에서 대기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두 시간 뒤에도 이사는 끝나지 않았고 여전히 전 임차인과 임대인은 언쟁 중이었다. 그 이유는 싱크대와 화장실 곰팡이가 심각하니 전 세입자에게 청소하고 가라는 것이었다. 상태를 보니 한 달 전 집을 확인할 때는 인지하지 못했던 곰팡이들이 화장실 바닥부터 천장, 창문까지 뒤덮고 있었고 변기에는 어떻게 사용했을지 걱정될 만큼 거뭇한 곰팡이들이 설어있었다. 급하게 전 세입자가 청소를 했지만 묵은 곰팡이는 쉽게 지워지지 않아 청소를 중단했고, 8시에 이사를 나가니 맞춰서 오라고 했던 것이 11시까지 기다리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8월의 습한 더위와 기다림에 지쳐 더는 기다리기 어려우니, 청소는 내가 하겠다며 일단 이사를 마무리하자고 중재했다.



이사 후 반갑다고 나를 맞아준 이들


전 세입자는 3시간 만에 짐을 빼서 이사를 나가서 한숨을 돌리려는데, 그들이 사다리차 연결로 열어 두었던 창문 사이로 말벌들이 들어와 온 방안을 돌아다니며 윙윙대고 있었다.

시골도 아닌 서울에서 말벌이라.. 마치 말벌통이라도 건드린 듯 여러 마리가 몰려오는 통에 놀란 나머지 쫓아내려 했지만 그럴수록 말벌들이 친구들을 더 데리고 들어왔다. 말벌은 독성이 있어서 말벌 침에 쏘이면 마비나 사망까지 이를 수 있다는 말을 들었기에 박스로 부채질을 하며 쫓아내려고 부단히 노력했지만 실패했다. 한 마리도 무서운데 여러 마리가 동시다발적으로 윙윙대며 위협하니 혼자서는 처리할 수 없다는 결론에 생애 처음으로 119 구조대에 구조 연락을 했다. 20분 정도 기다렸을까. 구조 대원들이 도착 후 말벌 퇴치 스프레이를 들고서 근원지를 탐색했지만 찾지 못했고, 당장 처리할 수 없으니 "이런 말벌 퇴치 스프레이를 사라"며 친절히 안내해 주고는 자리를 떠나버렸다... 스프레이라도 주고 가시지... 비용은 지급할 수 있는데...


하아... 이사 첫날부터 말벌과의 동침이라니... 생각지도 못했던 일에 당황할 여유도 없이 인터넷으로 말벌 스프레이를 주문하고 창문을 닫고서 실내에 들어온 말벌 퇴치를 시작했다. 납작한 책을 들어 비행하는 말벌들을 지켜보며 순간 스매싱을 날렸다. 한 마리, 툭. 또 한 마리 툭.

"미안하다. 그러나 도저히 나갈 생각이 없는 듯 하니 네가 희생해 줘야겠다." 그렇게 바닥으로 한 마리씩 떨어지는 말벌들을 주워 담으며 한 무더기가 되고, 비행하는 말벌이 사라졌을 즈음 어디선가 위잉~ 소리가 다시 들렸다. 찾았다. 말벌들은 거실 겸 베란다 창문 근처에서 나오고 있었다. 천장 쪽을 올려다보니 그곳은 천장형 헹거를 설치하여 구멍이 나 있었고 그 사이로 말벌 이외의 작은 벌레들도 나오는 통로로 사용하고 있었던 것 같다.  


전에도 말벌이 나왔을까?

내가 이사를 오면서 이런 일이 생긴 것일까?

여러 생각들을 밀어내고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테이프로 천장 헹거 사이 뚫린 구멍을 다 막고서 다시 박스로 부채질을 하며 말벌들을 다 쫓아낸 후 부리나케 창문을 닫았다.

"이삿날이라고 말벌도 반겨주는 것일까?"

나름 긍정 회로를 돌리며 짐 정리로 정신이 쏟다 보니 새벽 4시였다.


너무 피곤한 이삿날, 아직 매트리스도 도착하지 않은 맨바닥에 누워 잠시 잠을 청하려는데, 허벅지에 무언가가 꿈틀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육감과 직감이 곤두서며 필시 "이것은 발이 많은 곤충"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상상과 함께 온몸에 소름이 돋아 전기에 감전된 듯 자동으로 몸서리가 쳐졌고, 마치 공포스릴러 무성영화처럼 적막이 흐르는 새벽 침묵의 비명과 함께 다리는 한 동안 경련을 일으키듯 휘저었다. 잠시 후 침이 쏘는 듯한 고통과 함께 마비가 온 듯한 증상을 느껴졌고, 말벌을 잡던 납작한 책으로 종아리를 내리쳤다. 그 순간 초록빛의 수십 개의 다리를 가진 지네가 툭 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서둘러 휴대폰을 들어 독성이 있는 지네를 검색해 보니 눈앞에 있는 지네와 동일한 초록색 지네가 나왔다. “독성이 있기는 하지만 치사율에 미치는 것은 아니며 한동안 마비나 붇기가 지속될 수 있으니 응급실에 가서 치료를 받으라”는 내용이다. 그러나 이 새벽에 응급실을... 걷기도 힘들고 아픈데 또 119를 부르기에는 염치가 없고, 죽지는 않는다고 하니 통증은 참아 보기로 하고서 새벽 내 버텼다. 그리고 5~6시간 후 통증은 점차 나아졌고 붇기는 한동안 지속됐지만 큰 이상은 없었다.


다행이었다. 몇 시간의 부분 마비 증세와 통증으로 끝날 수 있어서. 그 후 며칠 사이 여러 마리의 지네들이 또 출몰했고, 대안책으로 모기장을 구매해 최대한 잘 때만큼은 마주치지 않도록 차단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지난번 보다 더 뭉툭하게 '툭, 다다다' 하는 소리가 천장에서 바닥까지 이어졌다. 잠이 들려던 차에 또다시 온몸에 소름이 돋았고 "설마"하고 돌아보니, 이번에는 20센티 이상의 대왕 녹색 지네가 수많은 발을 휘저으며 나를 보고 있었다. 그 순간 에일리언을 본 듯이 너무 놀라서 까무러쳤고, "꺄악"하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도대체 왜, 어디서 또 출몰한 것인가. 이 집은 벌레의 소굴이었을까...

놓치면 이 징그러운 지네가 새벽 내 집안을 휘젓고 다닐 것 같다는 공포에 이내 정신을 부여잡고 "으으으으" 하는 얕은 비명을 지르며 지네와 사투를 벌였다. 방생이니 뭐니 할 자비란 없었다. 놈에게 물리면 최소 마비에서 최악의 경우 사망에 이르렀을지도 모를 일이었기에 살기 위해서 스스로를 구할 수밖에 없었다. 큼지막한 지네를 살생할 때의 그 기분과 눌려져서 바스락거리던 소리까지 평생 잊지 못할 끔찍한 기억으로 남을 것 같다.


이사한 곳에서 마주한 말벌 떼와 지네들, 그리고 각종 처음 보는 벌레들.

새로운 경험을 통해 전에 없던 벌레 트라우마까지 각인되어 나를 반기는구나.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다음은 자연재해로 인한 피해까지.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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