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레디움, 대전
성인이 되어 집을 나와 ‘예향의 도시’ 광주에 살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안 그래도 첫 독립에 모든 것이 들뜨던 시기에 그 도시는 크고 작은 속삭임으로 저의 발길을 여기저기로 이끌더군요. 그 중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는 ‘광주폴리’라고 하여서 거리마다, 골목마다, 도로마다 숨어 있던 예술적인 조형물들이 짙디짙은 민주화의 숨결과 어우러져 도시 전체를 하나의 서사로 풀어내는 시도였습니다. 그리고 국제 비엔날레 개최와 아시아 문화중심도시로의 상징과 역동성까지.. 이것이 바로 예술가적 시대정신이라 여기며 난데없이 흠뻑 취해 지내기에 부족함이 없었던 나날이었죠.
그러던 어느 날 저는 지금의 직장을 만나 더 푸르고 멋진 꿈을 안고 충청도로 향합니다. ..(채용과정 및 합격의 영광 중략).. 새 둥지를 틀기 위해 고속도로를 타고 세종을 향해 올라오는 길에 단정하고 근엄한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대한민국 과학수도 대전’ 저는 속으로 되게 과학적인 문구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몇 분을 더 달렸을까 ‘국가균형발전을 선도하는 행정중심복합도시 세종’ 무언가 되게 이성적이고 건설적인 표어에 마음이 웅장해질 법도 합니다만.. ‘예향의 도시’에서 기억과 빛, 잔상과 여운 속에 파묻혀 지내던 일상을 뒤로 세우고 고작 2시간을 달려온 이곳에서 마주한 과학적이고 건설적인 온도차에 옷깃을 여미고 싶어질 만치 무언가 어색했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합니다. (이제 와 저는 이것을 낯설음으로 새 정의하려합니다.)
그렇게 수년의 시간이 흐른 4월 13일, 오늘. 햇살은 갑자기 어제와 다른 기세로 모든 것을 그을겠다는 기세로 유감없이 내려쬐고 달궈진 차안의 계기반은 외기온도를 31도까지 가리키며 ‘특별한’ 아침을 만들어줍니다. 세종과 대전, 청주를 두루 다니며 문화기행(세대청 문화탐방)을 써보겠다는 ‘사적욕심’이 게으름을 이기지 못하다가 결국 ‘원고 마감’이라는 거인의 그림자 앞에 굴복하여 주섬주섬 나왔는데 이렇게 더울 일인가 생각하며 텀블러 속 얼음 커피를 몇 모금에 끝냅니다. 분명 거의 다 와 가는데 이 넓은 도로 위의 차가 움직임을 갖추지 않는 이유는 무얼까 골똘하면서도 멍한 생각을 하다가 무심코 옆으로 펼쳐진 차창 밖 풍경을 살피는데 수많은 인파와 분주한 발걸음이 눈에 들어옵니다. 언제부터 이렇게 거리가 북적였지 하며 내비게이터 지도를 보니 대전역과 중앙시장 사이에 멈춰서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왜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진득한 차량 정체와 대조되는 거리의 분주함과 활기가 순간적으로 ‘예향의 도시’로 이름표를 붙여 고이 간직해오던 기억의 서랍을 경쾌하게 열어젖힙니다. 그 경쾌함에 쏟아진 기억의 조각과 편린들이 차창 안팎으로 아무렇게나 흩어져서 이곳이 과연 광주인지, 대전인지 헷갈리는 마음이 들쯤 딱 봐도 범상치 않는 세월의 후광을 등에 업은 붉은 벽돌 건물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렇습니다. 헤레디움은 100년이 넘은 오래된 건물입니다. 1922년 일제강점기, 대전역 근처 쌀시장이 형성된 동구 인동지역에 지어진 동양척식회사의 대전지점 건물입니다. 해방 이후에는 대전 체신청과 전신전화국으로 사용되다가 1980년대에는 민간에 매각되어 상업 시설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건물이 100돌을 맞은 지난 2022년, 예술적 영감을 주는 전시와 클래식 공연을 위한 고품격 복합문화공간- 지금의 헤레디움으로 재탄생 합니다.
개인적 경험으로는 아이러니 합니다. 일제강점기 속 상흔이 남겨있는 이 공간에서 제가 처음으로 마주하는 전시가 일본 출신 작가의 작품이라는 점은 분명 아이러니하게 와닿습니다. 오늘의 작가인 현대미술가 레이코 이케무라에게도 이러한 아이러니는 빗겨가지 않는데요, 이번 전시는 그가 한국에서 여는 첫 전시라는 점이 그렇습니다.
<수평선 위의 빛> 바다나 땅의 끝이 하늘에 맞닿아 경계를 이루는 선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 ‘horizon'은 희랍어로 ‘한계’를 어원으로 하고 있습니다. 수평선의 경계는 아무리 가고 또 가도 육지가 나오기 전까지는 결국 또 다른 수평선만이 펼쳐질 뿐, 결국 다다를 수 없는 진정한 관념적 이상향(유토피아)이 아닐까하는 생각에 잠깁니다. 수평선에 닿으려 바다 한가운데를 쉼 없이 표류하는 지금 나의 GPS 좌표가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수평선 위의 한 점일 수도 있듯이 말입니다. 전시관 2층에 마련된 ‘수평선 시리즈’는 어둠의 공간에 뿌려진 여러 작품들을 핀스포트라이트(Pin-Spot light)로 비추어 캔버스 속 ‘수평선 위의 빛’의 신비롭고 영롱한 색채에 몰입하기에 충분한 환경을 제공합니다. 마치 그림 자체가 선명한 올레드(OLED) 화면은 아닌가 하고 가까이서 확인할 정도로 쨍한 감동이 인상적입니다.
헤레디움은 옹기종기 원도심 속 고마운 전용주차 공간을 갖추고 있으며 카페도 함께 운영하고 있어서 잠시 휴식을 즐기기에도 적합합니다. 이번 기획은 토요일 정오임에도 작품 이해와 감상을 방해받지 않을 정도의 한산한 혼잡도를 보였습니다. 전용 앱을 설치하면 도슨트를 제공받을 수 있는데 이어폰은 별도로 지급하지 않기에 전화 받는 포즈로 전시 관람하는 사람을 발견하실 수도 있어요(이어폰 챙기세요).
※ 전시 기간 종료
<레이코 이케무라: 수평선 위의 빛>
- 전시기간/시간: 2024년 4월 3일 ~ 8월 4일(매주 월, 화 휴관) / 11:00~19:00
- 웹사이트: https://heredium.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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