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에 오르는 벼슬을 열망했던 어떤 이의 죽음
박정희 정권은 1972년 10월 유신을 밀어붙이면서 통일주체 국민회의라는 걸 만들었다. 명목상으로는 헌법 상 최고기구였지만 실제로는 몇 년에 한 번 체육관에 모여 박정희를 대통령으로 뽑거나 박정희가 지명한 유신정우회 국회의원 명단을 박수로 통과시키는 거수기에 불과했다.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은 '통대'라고 불렀는데 대략 도시는 동마다 1명, 농어촌은 면마다 1명씩 직접선거로 선출했다.(유권자 2만이 넘는 선거구는 2만 명마다 1명씩 당선자를 늘리는 중선거구제 혼용)
1972년 초대 대의원 선거 때에는 국회의원처럼 중요한 자리인 줄 알고 달려든 사람들이 꽤 있었다. 특히 지방의 경우, 통대 의원은 국회의원처럼 족보에 올려준다고 해서 기를 쓰고 하려는 이들이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정1품에서 종 9품의 관직을 모두 족보에 올렸지만 현대에 와서는 5급 이상 공무원만 기재하는 게 일반적이다. 따라서 군인은 영관급(소령) 이상, 국회의원, 사법ㆍ행정고시 합격자 등이 족보에 기재된다.
요즘 세대로서야 볼 일도 없는 족보에 벼슬자리 써넣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싶겠지만 당시에는 아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 꽤 많았다.
아버지의 고향인 00면에는 ㅂ씨가 많이 살았는데, 같은 ㅂ씨이면서도 양반, 상놈을 은근히 따졌다. '양반 ㅂ씨'를 자처하는 사람끼리 모이면 "저것들은 쌍놈 ㅂ씨여"라며 뒷말을 수군거리는 것이다. 물론 당사자를 만나서 신세를 질 때는 "같은 ㅂ씨끼리 도와줘야지"라고 하지만...
그렇게 '쌍놈 ㅂ씨'로 치는 사람 중의 하나가 나름 돈을 벌어 지역유지가 됐는데, '통대'가 되면 족보에도 올려준다는 말에 혹했는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에 출마했다. 그 사람이 이미 족보를 사서 ㅂ씨 족보에 이름을 올려놓고는 양반 자격을 인정받고자 통대의 직명까지 올리려 했는지, 아니면 족보는 없지만 '족보에 오를만한 벼슬이 생겼으니 양반 아니냐'라고 하려 했는지는 모르겠다.
후보자 등록을 하려면 추천장에 유권자 300명 이상의 서명을 받아야 했기 때문에 그는 열심히 뛰어다녔다.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술을 사고 밥을 사며 서명을 받았고, 하루 종일 굽신거리며 선거운동을 다녔다.
동네에서 나름 인심도 얻었고 ㅂ씨의 인구 비중도 높아 무난히 당선될 것으로 기대했지만 선거결과는 낙선이었다. 그것도 큰 표차로...
"참, 나... ㅂ씨들 몰려사는 지역에서 표가 거의 안 나왔다더라구. 술이며 밥이며 얻어먹을 때는 '그려, 그려, 우리 ㅂ씨에서 통대가 나와야지' 해 놓고는 뒤돌아서서는 다른 사람 찍었던 게지"
"양반 ㅂ씨란 것들 간에는 '제깐 놈이 무슨 벼슬을 해! 쌍놈 주제에 돈 좀 벌었다고'하는 분위기였던 모양이여"
숱한 재산을 선거비용으로 퍼부어 가면서, 양반이 될 꿈에 부풀었던 그는 선거 직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날려버린 재산보다도, 누릴 수 없었던 벼슬보다도 더 그를 절망케 한 것은 아마도 앞에서 웃고는 뒤에서 침을 뱉은 이웃들의 배신이 아니었을까.
[관련 역사] 통일주체국민회의의 역할은 크게 3가지였다. 대통령 선거, 유정회 국회의원 명단 인준, 국회에서 의결한 헌법개정안 의결 등이다. 헌법 상에는 "중요 통일 정책 심의" 같은 임무도 있었지만 실제로는 대통령 선거와 유정회 의원 명단 통과의 거수기 역할 밖에는 하지 않았다.
제8, 9대 대통령 박정희와 10대 대통령 최규하, 11대 대통령 전두환을 여기서 선출했는데 장충체육관에 모여 선거를 했기 때문에 '체육관 대통령'으로 불렸다.
대의원 임기는 6년으로 유신헌법에 정해진 대통령 임기 6년에 맞춘 것이었다.
1972년 12월 23일 제8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단일 후보로 나선 박정희가 대의원 2,359명이 투표한 가운데 찬성 2,357표, 무효 2표로 당선됐다. 무효 2표는 박정희의 이름을 한자로 적다가 틀렸기 때문이었다.
78년 선거에서는 무효표 1표로 박정희가 당선됐으나, 이듬해 궁정동에서 숨지는 바람에 79년 말 급하게 보궐 선거로 최규하가 선출될 때는 '놀랍게도' 무효표가 84표나 나왔다. 그러나 그다음 해 전두환을 11대 대통령으로 뽑을 때는 무효표가 도로 1표로 줄었다. 물론 반대표는 없었다. 남한판 최고인민회의, 전국인민대표대회라 할만하다.
초대 대의원 선거 때는 선거구 당 평균 2.5명 정도가 나섰는데 하는 일 없는 명예직이라는 것이 드러나면서 제2대 대의원 선거 때는 2.16명만이 입후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