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초등학교 시절

고사리 손으로 태극기를 흔드는 모습을 보고 대통령은 흐뭇했을까?

by 송종문

그때 내가 국민학교(지금 말로는 초등학교) 1학년이었는지, 2학년이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다니던 학교는 나름 돈이 있는 사립학교여서 스쿨버스가 있었기 때문에 종종 행사에 학생들이 동원되곤 했다.

그날 아침부터 스쿨버스를 태워 어디론가 가더니, 길 가에 주욱 세워놓고 막대기에 종이로 붙인 태극기를 나눠 주었다. 전부 다 주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나는 왜 안 주지' 했던 기억이 있는 걸 보면...

"조금 있다가 선생님이 말하면 태극기를 흔들어! 손을 위로 올려서 막 힘차게 흔들어야 돼!"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어쩌면 선생님들이 설명했는지도 모르겠지만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이들을 포장도로 옆에 길게 펼쳐 세우고 선생님들이 이리저리 오가면서 소리치는데, 뭐라는지 알아들을 분위기가 아니었고 그 내용도 6, 7살짜리가 이해할만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얼마 뒤 선생님이 신호를 했고 우리는 열심히 태극기를 흔들었다. 그 앞으로 시커먼 차들이 한 떼 지나갔다. 그것으로 끝. 우리는 다시 스쿨버스를 타고 돌아왔다.

요즘 애들 같으면 "우리가 도대체 뭘 본 거지?" 하는 의문이라도 가졌겠지만 우리는 그저 아무 생각 없이 가서, 아무 생각 없이 태극기를 흔들다가, 아무 생각 없이 돌아왔다.

그날의 사건이 무엇이었는지 추리할 수 있게 된 것은 그로부터 10년도 더 지나서였다. 그날은 아마 대통령이 해외 순방을 하고 돌아오는 날이었던 모양이다. 기록을 찾아보니 박정희 대통령은 1968년과 69년에 미국, 호주, 뉴질랜드 등을 순방했다. 아마 그중 하나였을 것이다. 우리 학교가 서울 서북부 지역에 있었기 때문에 김포공항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길가 어딘가에서 '환영 인파'로 내세웠던 모양인데, 도로 말고는 주변에 벌판 밖에 없었던 것이 기억난다. 그 벌판에 어린 학생들이 서 있는 모습을 본 대통령은 그게 아랫사람들의 아부라는 걸 몰랐을까? 알면서도 좋았을까?


60년대 말에서 70년대 초 혼분식 운동이 거세지면서 학교에서는 도시락을 검사했다. 보리 같은 잡곡을 많이 섞지 않으면 벌점을 매긴다고 하니 보리밥을 쌀밥 위에 덮어 눈을 속이는 '꼼수'까지 나왔을 정도. 평시에는 선생님이 쓱 훑어보고 한두 마디 하는 정도였지만 장학사가 오면 분위기가 엄격해졌다.

점심시간. 학생들이 허리를 곧추 세우고 기다리는데 장학사가 교장과 담임 선생님을 대동하고 교실에 들어왔다.

"뚜껑 열어."

"달그락, 달그락"

긴장하고 있는 학생들 사이로 큰 수첩 같은 걸 든 장학사가 지나가다가 내 자리 옆에서 지적을 했다.

"이거."

그리고는 손에 든 수첩에 뭔가를 끄적거리고는 휑 나가버렸다.

교장이 당황해서 쫓아나가고, 더 당황한 교사는 눈을 부라렸다.

"장학사 오신다고 혼분식 철저히 하랬잖아!"

"이거 감자 많이 섞은 건데요?..."

그날따라 어머니는 보리가 아닌 감자를 섞은 도시락을 싸줬는데, 평소보다 보리를 더 섞어 거뭇거뭇한 다른 아이들의 도시락 사이에서 하얀 감자를 섞은 내 도시락은 쌀밥처럼 보였던 것일까? 보리가 아닌 감자는 혼식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걸까? 어쨌든 나 때문에 장학사의 지적을 받게 된 교사들의 찌푸린 표정 때문에 나는 마음이 내내 불안했다.

벌점은? 모르겠다. 북한 같았으면 '로동당' 입당에 방해가 될만한 과오였을지 모르겠지만 우리나라에서 그런 벌점으로 피해 봤다는 얘기가 없는 걸 보면 북한보다는 나았나 보다.

미국의 원조 밀가루가 한참 들어오고 쌀이 모자랄 때는 '혼분식'을 강조하더니 원조 밀가루가 끊기고 쌀이 남아돌기 시작하자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미국 사람들은 밀가루를 먹어서 키가 크다"는 둥 이상한 학설을 내세우던 어용전문가들은 사라지고 쌀이 몸에 좋다는 여러 가지 이론들이 나오더니 FTA(자유무역협정)로 강제로 외국 쌀을 수입해야 하는 처지가 되자 "우리 몸엔 우리 쌀이여"로 발전했다. 쌀밥보다 밀가루가 좋다는 말을 안 들었으면 모르겠는데 이리저리 시류에 따라 말을 바꾸는 전문가들을 여러 차례 겪다 보니 신뢰도가 자꾸 떨어진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통일주체국민회의 선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