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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 시범아파트

아파트에도 엘리베이터 Girl이? 그리고 유신헌법...

by 송종문

70년대 초에 여의도 시범 아파트로 이사를 갔다. 부모님이 여의도에서 음식점을 내셨기 때문이다.

71년 10월에 준공된 시범 아파트는 12층으로 당시 최고층 아파트였고 준공식 때 대통령까지 참석했다.

시범아파트2.jpg 여의도 시범아파트 준공식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1971년 10월)-자료: 대한뉴스 화면 캡처

아파트가 아닌 일반 건물까지 넓혀 보아도 당시에는 10층 넘는 건물이 흔치 않았다. 조흥은행이 1966년에 지은 광교 본점이 18층이었는데 대한민국 최고층 빌딩으로 등극했을 정도다. 1969년에 지은 대연각 호텔(21층)과 한진빌딩(KAL빌딩, 23층)이 20층을 겨우 넘겼고 시범아파트를 짓기 딱 1년 전인 70년 10월에 지은 31 빌딩이 처음으로 30층을 넘겼다. 요즘은 아파트 새로 지었다 하면 40층이 넘곤 하지만...

한국에서 최초로 엘리베이터가 설치된 아파트로는 67년 한남동에 지은 힐탑 아파트(11층)가 있었는데 외국인 전용 아파트여서 일반인은 잘 알지 못했다.

여의도 시범아파트는 내국인용 아파트로는 처음으로 엘리베이터가 있었을 뿐 아니라 그 엘리베이터를 조작하는 엘리베이터 걸까지 있었다. 당시로서는 엘리베이터가 비싼 첨단기기로 여겨질 때라 거의 모든 엘리베이터에 제복을 입은 '안내양'이 있었다.(백화점이나 재벌그룹 본사 빌딩 같은 곳에는 그 후로도 오랜 기간 엘리베이터 걸이 있었다.)

시범아파트4.jpg 제복을 입고 모자까지 썼던 여의도 시범아파트 엘리베이터 안내양-자료: 뉴스캡처

1개 동에 48세대뿐이니 안내양이 주민들의 얼굴을 모두 알고 있어서 타기만 하면 알아서 내릴 층을 눌러주어 편하긴 했지만, 몇 달 뒤 유치원생까지도 엘리베이터 조작을 할 수 있게 되자 엘리베이터 걸은 사라졌다. 사소한 문제는 그 이후 몇 년 간 시골에서 올라온 분들이 방문을 하면 누군가 내려가서 엘리베이터로 모셔와야 했다는 점. 그만큼 엘리베이터를 다룰 줄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여의도 시범 아파트의 장점은 견고하다는 것이다. 아마 국내 철근콘크리트 아파트 중에는 가장 단단하지 않나 싶다. 이 아파트를 짓기 직전에 와우아파트가 무너지면서(아래 [관련 역사] 참조) 여러 사람이 죽고 서울시장이 '잘리는' 바람에 부실 아파트에 대한 사회적 지탄과 불안이 극에 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의도 시범아파트가 '철근과 시멘트를 설계보다 더 넣은 유일한 아파트'라는 소문이 돌았고 '한국에 진도 6 이상 지진이 나도 최후까지 안 무너질 아파트'라는 말도 돌았다.

60-70년대에는 철근과 시멘트를 설계보다 몇십 퍼센트씩 '빼먹는' 부실시공이 아주 흔했다. 나중에 기자가 돼서 건축 설계를 하는 교수와 인터뷰하다 이런 말을 듣기도 했다.

"시공 현장을 둘러보면 항상 철근을 한 30%는 빼먹더라고. 그래서 아예 설계할 때 철근을 적정치보다 30% 더 넣었지. 그런데 현장에 가보니까 얼마나 많이 빼먹었는지 그래도 모자라게 시공했더라고..."

시범아파트 벽이 얼마나 단단한지 콘크리트 못도 박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게다가 국내 아파트에서는 보기 드문 라멘 구조(기둥과 보로 힘을 받는 방식, 국내 대부분의 아파트는 벽으로 힘을 받는 벽체식 구조다)로 지어져 층간 소음도 적고 리모델링도 간편했다.

사실 요즘 아파트들이 죄다 벽체식으로 지어지는 것은 단 한 가지 이유, '건축비가 싸기 때문'이다. 평당 건축비도 싼 데다 같은 높이와 면적에서 더 많은 세대수를 뽑아낼 수도 있다. 층간소음으로 살인이 나건 말건 무조건 돈벌이에 유리한 쪽으로 가는 것이다.

일본의 경우에는 벽체식 구조의 건물은 5층 이하로만 짓도록 건축기준법이나 시행령에 정해져 있고, 6층 이상은 라멘 구조로 지어야 한다고 한다.(얼마 전 법이 바뀌어 8층까지도 벽체식으로 지을 수 있게 되었지만, <확인 신청>과 <적합성 판정> 절차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6층 이상은 여전히 라멘 구조가 대세인 듯.)

여의도 시범 아파트는 단숨에 돈 많은 사람이나 고급 관료, 연예인, 외국인 등이 모여 사는 국내 최고급 아파트 단지로 떠올랐다. 대규모 단지인 데다 조경과 공원 설비가 잘 돼있어서 영화 촬영지로도 애용됐는데, 단지 안을 걷다 보면 영화를 찍는 현장을 종종 볼 수 있었다.

당시 영화 제작사는 대개 규모가 영세하고 장비도 후시(後時) 녹음(촬영 때는 영상만 찍고, 목소리는 제작과정에서 더빙하는 방식. 이에 비해 동시녹음은 촬영할 때 배우의 대사도 같이 녹음한다. ) 장비를 썼다. 그래서 감독이 배우 앞이나 옆, 카메라 렌즈에서 살짝 비껴 난 곳에 서서 한 문장씩 대본을 읽어주면 배우가 따라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어린 마음에 '저렇게 하면 나도 배우 할 수 있겠는데'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물론 배우에게 대사 외우는 것이 전부가 아니란 걸 모를 시절 이야기다.

시범 아파트가 세워진 다음 해에 10월 유신의 광풍이 몰아쳤다. 국민학교 5학년 때로 기억되는데 학교에서 '유신헌법이 꼭 필요한 이유를 설명하라'는 글짓기 대회가 열렸다. 나는 '흐트러진 양 떼는 늑대가 쳐들어오면 다 죽으니까, 강하고 똑똑한 양치기 개를 중심으로 뭉쳐야 한다'는 내용으로 글을 썼던 기억이 나는데 솔직히 그냥 주워들은 이야기이고, 초등학생 주제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국민투표일인 72년 11월 21일이 임박한 어느 날 각 세대 우편함에는 고급 만년필이 한 자루씩 배송되었다. 검은색 몸체에 금장으로 '봉황과 무궁화'(대통령실 문장)가 새겨진 이른바 '청와대 만년필'이었다. 지금이야 대통령실 기념 시계를 얼마든지 기념품점에서 살 수 있는 시대지만 당시엔 청와대 마크가 찍힌 물품이 아주 귀하게 여겨졌다. '막걸리 선거', '고무신 선거'의 고급판인 셈인데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유신헌법 제정을 위한 헌법개정안은 투표율 92.9%에 찬성 91.5%로 통과되었지만 여의도동에서는 찬성률이 50%를 겨우 넘어 전국 꼴찌 수준이었다는 말이 들렸다. 요즘엔 돈 많은 사람은 세금 깎아준다는 당 찍고, 돈 없는 사람은 선심 쓰는 당 찍어준다는데, 그래도 권력을 누리거나, 돈 많은 사람이 산다는 동네에서 정권에 반대하는 표가 가장 많이 나왔다는 건 나름 '배운 사람', '있는 사람'이 최소한의 양심은 지키려 한 건가 싶기도 하다.


[관련 역사] 와우아파트는 1969년 서울특별시가 마포구 창전동 와우산에 세웠던 아파트다. 1969년 6월 26일에 착공해 단 6개월 만인 12월 26일에 지상 5층짜리 16개 동을 준공했다. 준공 넉 달만인 1970년 4월 8일 15동이 폭삭 무너지면서 70여 명이 매몰당했다. 구조작업이 펼쳐졌지만 와우 아파트 입주민 33명과 잔해에 깔린 아래쪽 판잣집 주민 1명이 숨지고 40명이 다쳤다.

와우아파트_붕괴_참사_서울특별시 소방재난본부 사진.jpg 와우아파트 붕괴 참사-사진 출처: 서울특별시 소방재난본부

사고 뒤에 실시된 수사에서는 이 아파트 공사가 처음부터 끝까지 엉터리였음이 드러났나. 경사도가 높은 산허리에 대규모 아파트를 지으면서 지질검사도 하지 않았고, 서울시가 원가 이하의 공사비(1동에 1,100만 원)로 건설회사에 반강제로 떠맡긴 공사를 무허가 업체에 하청으로 넘기면서 10% 이상(1동에 125만 원씩)을 떼어먹었으니 애당초 제대로 된 공사가 불가능했다. 콘크리트에는 시멘트를 너무 적게 넣어 모래와 자갈을 간신히 물로 버무린 수준이었고, 그 물조차 불순물이 많은 하수를 사용했다. 철근 70개를 써야 할 기둥에 고작 5개만 쓴 것이 드러나기도 했다.

이 사건과 관련해서는 여러 가지 비화가 전해진다.

하나는 붕괴 직후 서독의 건축 전공 대학원생들이 사고 원인을 분석하러 왔다가 어이없어하며 돌아갔다는 이야기. 왜 무너졌는지를 알아보려 했는데, 애초에 턱도 없이 모자라는 자재로 어떻게 5층짜리 아파트를 지을 수 있었는지부터 건축공학으로 설명할 수가 없어서 그냥 갔다고.

또 하나는 조영남이 붕괴사건으로 민심이 어수선하던 1970년에 공연을 하면서 신고산 타령 가사인 "신고산이 우루루 화물차 가는 소리에~"를 "와우아파트 무너지는 소리에~"라고 개사를 했다가 모 기관으로부터 미움을 사서 군대에 입대하게 됐다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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