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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시대의 고등학교

수류탄과 총검술

by 송종문

70년대의 고등학교에는 교련이라는 과목이 있었다. 검은색 얼룩무늬의 유사 군복을 입고 군사훈련을 받는 시간이다. 검붉은 재생 플라스틱으로 만든 모형 M1 소총을 메고 제식훈련, 총검술 같은 걸 배웠다. 여고생들은 그 시간에 구급법을 배웠다.

내가 다닌 학교는 교련에 그다지 열심이지 않았는데, 대기업이 장학사업 차원에서 세운 학교라 학업에 치중했고, 교장이 대학교의 학장을 지냈던 저명한 영문학자이기도 해서였던 듯하다.

그러나 교육부 평가에 목을 매던 교장이 있는 대부분의 학교는 교련에 무척 열심이었다. 이사장이 군 출신인 학교, 공립학교, 실업계 학교는 더욱 심했던 모양인데 해마다 학교별로 교련 검열을 해서 점수를 매기고 시상식을 하며 경쟁을 부추겼다. 그 정점은 수 만 명의 학생을 동원하는 합동 교련실기대회였다.

작가 은희경은 소설 '마이너리그'에서 교련실기대회에 관해 이렇게 썼다. "그 행사를 위해 해마다 시내의 고등학생들은 매일매일 어두워질 때까지 교련복과 체육복을 벗을 틈도 없이 학교 운동장에서 살아야 했다. 여학생들은 압박붕대 사용이나 삼각끈 매기 같은 훈련이 끝나면 카드섹션과 제식훈련을 연습하느라 뙤약볕 아래 픽픽 쓰러졌다."

군사훈련에 카드섹션이라니 뭔가 싶지만 1976년 6월 18에 부산에서 열렸던 '부산학생 교련 종합실기대회' 장면을 보면 이해가 간다.

카드섹션_부산 교련 종합실기 760619_대한뉴스1087.jpg 부산학생 교련 종합실기대회(1976.6.18)-출처: 대한뉴스 1087호

지역별로 매년 열리던 교련실기대회에는 사열과, 분열, 응급처치법 등의 경기에 직접 참여하는 수천 명의 학생 말고도 수만 명의 학생들이 관중으로 동원되어 저렇게 학교별로 카드섹션을 해야 했다. 주로 학교 이름을 보여주는 정도였지만 좀 더 눈에 띄고 싶었던 학교는 학교 이름뿐 아니라 '유신'등의 글자를 교대로 보여주기도 했다.

동영상으로 보려면 국가기록원(https://www.archives.go.kr/)이나 e영상역사관(https://www.ehistory.go.kr/), 또는 유튜브에서 해당 호차의 대한뉴스를 보면 된다.

그래도 단색으로 글자 몇 개 보여주는 정도의 카드섹션은 며칠 연습하면 되겠지만, 본격적으로 "높은 어른께 뭔가 보여주겠다'라고 결심하면 수준이 달라진다.


제4회 고등학교 안보실기대회_대한뉴스960.jpg 제4회 전라남도 고등학생 안보 실기대회(73.12.1, 광주)-출처: 대한뉴스 960호

73년 12월 1일 광주에서 열린 제4회 전라남도 고등학생 안보 실기대회 장면이다. 관중석 한가운데 '대통령각하 감사합니다"라고 쓰고 봉황과 무궁화로 둘러싼 컬러풀한 카드섹션이 보인다. 물론 이걸 바라보는 정면 사열대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앉아 있었다. 그런데 도대체 뭐가 감사한 걸까? 교련 교육을 받게 해 줘서? 지역까지 몸소 내려와 봐줘서?

서울에서는 5.16 광장(현재 이름은 여의도 광장)에서 만 2천 명 정도의 고등학생이 참가해 제식훈련과 총검술 등의 시범을 보이고 행사가 끝나면 시가행진을 했다.

교련실기대회 19750624_서울기록원 148개 4만3천명2.jfif 6.25 전쟁 25주년 제4회 교련실기대회(1975.6.24, 서울) 행사 후 시가행진-출처: 서울기록원

기이하게도 저런 교련실기대회는 '민속경연대회'를 겸하고는 했다. 군사 행사 끝부분쯤에 풍물놀이나 고싸움 같은 민속 행사를 곁들이는 건데 단순히 흥밋거리를 끼워 넣은 건지, 군사 정권의 행사답다는 비판을 희석시키려는 건지, 당시 탈춤패와 풍물패 등 전통문화를 매개로 하던 대학의 민주화운동에 맞불을 놓으려던 건지는 모르겠다.

군사훈련은 교련시간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고등학교 체육과목은 체력장이라는 검정시험을 거쳐 대학입시에 반영됐는데(예비고사 340점 만점에 체력장이 20점) 그중 한 종목인 '던지기'가 어느 때인가부터 야구공 던지기에서 '수류탄 던지기'로 바뀌었다. 그때 쓰던 검붉은 재생고무로 만든 모의수류탄은 요즘 가끔 중고물품 거래 사이트에 매물로 나온다.

모의수류탄.jfif 체력장용 모의수류탄-출처:중고나라

체력장(體力章)이라는 용어 자체가 일본에서 1937년 중일전쟁 이후 건강한 황국신민을 기른다며 ‘국민 체력장’을 실시한 데서 비롯됐다고 하니까, 군사훈련의 의도가 숨어 있었던 셈이다.

요즘 TV 프로그램에서 '북한은 어린 학생들까지 군사훈련을 시킨다'라고 하는 걸 보고 젊은 세대들은 "웃기다", "어처구니없다"라고 하지만 직접 저런 교육을 받은 나로서는 '남의 얘기'처럼 들리지가 않는다.


[관련 역사] 고등학교 교과목이었던 교련(敎鍊)은 1969년부터 실시되었다. 그 전해인 1968년 북한이 청와대를 공격하기 위해 무장간첩을 침투시킨 1·21 사태가 일어나자 안보의식과 전시 대처능력을 높인다는 명분으로 교련이 고등학교의 필수과목이 되었다. 주 4시간이던 체육 수업을 3시간 줄이고 교련을 주 2시간씩 편성했다. 1994년부터 군사훈련이 공식적으로 전면 폐지되고 응급 처치와 안보교육 등으로 바뀌었다. 2002년부터 선택과목으로 변경되었다가 2011년부터 과목이 '안전과 건강'으로 변경되면서 완전히 폐지되었다.

교련 교사는 중위부터 소령까지의 예비역 장교 출신을 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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