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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모 Sep 14. 2024

냉이 캐는 아이들


냉이 캐는 아이들.       - 정일모 (24.9.7)



어린 시절 아빠는 서울에서 일을 하셨고, 함께 살고 있는 엄마도 일을 나가셨다.

아빠는 몇 달에 한 번 시골에 오셔서 얼굴을 보는 정도고

엄마는 아침에 나가 저녁이 돼서야 집으로 돌아오셨다.

늘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생활이 어려워질 때마다 엄마는 일을 나갔다.

자식 중에 그것도 딸만 여섯이 있는 집안에서 왜 그 당시 언니들은 없었고 나와 동생 둘만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나중에 보니 언니들은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집에 어른들은 없고 나와 동생 재숙이와 지호 ( 그 당시는 은혜)만 있었다.

많은 아이들이 그렇듯 우리는 놀고 놀고 또 놀았다.

무엇을 하며 놀았는지 저녁이 되면 새까맣게 변해있었다.

인형 놀이를 해도 종이와 가위만 있으면, 구멍 난 양말과 옷 천만 있다면 인형 옷쯤은 뚝딱 만들었다.

다 익지 않은 딸기를 따 먹고 수박을 숟가락으로 각자 반 통씩 떠먹고  산속에 들어가 삘기를 뽑아 껌처럼 씹고 다니며 할미꽃과 제비꽃을 보면서 달리고 달렸다. 귀한 산딸기는 눈에 보이면 입으로 들어가고 널려있는 뱀딸기는 발로 밟았다. 내가 좋아하는 보라색 도라지꽃, 깻잎 밭 하늘 위 손만 뻗으면 무수히 부딪히며 날아다니는 잠자리, 집 뒤에 바람에 흔들리는 대나무 소리, 장독대 뒤에 숨어서 숨죽이던 순간, 뱀을 자주 마주쳐 소스라치게 놀라고, 이른 아침 떨어진 호두를 가장 먼저 주우려고 졸린 눈을 비비고, 구연동화 테이프에 귀를 바짝 대고 납작 엎드려 헨젤과 그레텔을 듣고, 너무 돌려 들어 테이프가 늘어나고도 잠에 들면서 모두가 불을 끄고 숨죽이며 듣던.

무수히 말로 담지 못하는 그 시절. 얼마나 많은 순간들이 우리에게 각자의 기억으로 남아있을까.


그 시간들이 어디 즐겁기만 했을까. 지금 생각해 보면 너무나 즐겁고도 아련한 장면들.

분명 행복하게 웃고 놀았는데 그 시절을 떠올리면 왜 눈물이 흐를까.

어린아이 셋이 부모를 기다리며 신나게 놀았으니 즐거움과 기다림이 함께 있었으리라.

부모 없이 셋이 의지하며 잠시 미뤄둔 안정감을 지켰으리라.

저녁이 되면 엄마가 돌아오니 믿음으로 기다렸을 것이다.

자유분방했으나 선택적 자유는 아니었을 것이다.

어찌 보면 자유고, 어찌 보면 방임 같은 시간.

우리를 지켜주는 것은 우리뿐이었다.

나는 셋 중에 언니라서 아이들을 재미있게 놀아줄 의무가 있었다.

때론 무섭게 귀신 놀이로 울리기도 하고 때론 회사원 상사로 때론 달리기 선수로, 패션 놀이로 동생들과 함께 놀았다.

밥때가 되면 먹을 것이 없어 가마솥을 열어 남겨진 밥을 차려 먹고, 엄마 몰래 찬장을 열어서 먹으면 안 되는 다시다를 꺼내어 밥에 뿌려 먹기도 하고, 계란과 빠다를 꺼내 간장과 비벼 먹고 지금 생각해 보면 영양 상태 별로 없는 음식들 투성이었다. 아이스크림을 직접 만들어 얼려 먹고 불량품 주스 가루를 물에 타서 먹으면서도 너무 맛있고 함께라서 즐거웠다.


밭에서 냉이를 캤다.

냉이와 냉이 아닌 것들은 일찍부터 구분했다.

어린아이 셋이 도구를 챙겨 지천으로 널려있는 봄 냉이를 캐며 소꿉놀이했다. 넓은 그릇 바구니는 어디서 찾았는지 각자 캔 것을 각자의 바구니에 담으며 누가 더 많이 캐나 열심히 캤다. 어둑해지면 엄마가 돌아온다. 어둠이 내리면 노느라 잊고 있던 기다림이 배가 된다. 저 너머에 논과 밭이 흐려질 때쯤 엄마의 형체가 보이기만을 기다린다. 대나무 산 아래 하나 있는 집 다른 곳보다 지대가 높은 우리 집. 높은 문지방에 올라서서 문 테두리를 잡고 떨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며 엄마가 오는 길을 쳐다본다. 마침내 엄마가 보인다. 까만 비닐봉지가 손에 들렸는지의 여부는 우리의 행복을 좌우했다. 까만 봉지가 보이지 않으면 그렇게 실망스러울 수가 없었다. 환호성을 지르며 좋아하던 것이 엄마였을까 까만 비닐 봉지였을까 아니면 집에 있던 우리를 생각해 준 엄마의 마음이었을까. 지금 생각해 보면 엄마는 얼마나 고단했을까. 어린 자식 셋을 집에 두고 나가 종일 일을 하고 돌아오는 길은 어땠을까. 차도 없는 먼 길을 걸어올 때는 어땠을까. 집에 오면 쉴 수는 있었을까.

엄마가 돌아오자마자 우리는 봉지를 반기고 캐 놓은 냉이 바구니를 자랑한다. 이만큼이나 캤다고 엄마를 기쁘게 해주겠다고 칭찬을 받겠다고 재잘거리고 떠드는 아이 셋. 잘했다 많이 캤다 국 끓여 먹어야겠다고 말하는 엄마 말에 안심하고 좋아했다.



어른이 되어서 첫 개인전을 열었을 때, 냉이 캐는 아이들이 첫 번째 그림으로 그려졌다. 다음은 호박잎 따는 엄마, 그다음은 언니와 나 ( 췌무니와 나) … 이렇게 첫 개인전은 나의 어린 시절의 이야기가 한가득이었다. 내가 집을 떠나 서울로 오기 이전까지 말이다.


얼마 전, 동생 재숙이와 지호를 만났다.

내가 평소 좋아하지도 않던 고기, 그중에서도 삼겹살 생각이 났다.

“삼겹살 먹고 싶어 ~ 그런데 같이 먹을 사람이 없어 ~” 하하

다음날 재숙이랑 지호는 바로 나타났다. 우리는 삼겹살을 먹으면서 희희낙락 웃고 떠들었다.

필요하다니 바로 채워주는 동생들. 표현하니 바로 오는 선물들. 때마침 나는 우울했고 무기력했다. 생각으로는 일어나야지 하면서도 몸은 물먹은 솜 같았다. 서서히 에너지 흐름이 바뀌고 전환을 맞이하던 참에 동생들을 만난 것이다.

또 때마침 나타나 고깃값을 계산하고 우리를 노래방까지 데려다준 제부도 있었다.

얼마 만에 노래방이라는 곳을 왔는지. 내가 먼저 첫 곡을 핑클 노래에 춤을 췄다. 그다음은 주루룩 우리의 추억 곡들과 춤이 척하면 척척 손발이 맞아 광란의 시간을 보냈다. 웃다가 배가 아팠다. 더 격하게 놀지 못하는 그러나 격해 보인 임신 중비중인 지호도, 빠르게 춤을 춰도 뭐든 느려 보이는 재숙이도 근래에 이렇게 크게 웃고 배가 아플 정도로 눈물 흘리며 웃었던 적이 있었나.

함께 어린 시간을 보낸 셋은 말 안 해도 척척 맞는 순간과 눈만 봐도 아는 것들이 있다. 옷차림 몸 상태 얼굴 상태 마음 상태들을. 가족이라 그러하겠지.

각자가 따로 잘 살면서도 서로의 삶을 침범하지 않으면서도 만나면 잘 놀고 잘 지내는 냉이를 캐던 아이들.

각자가 사는 삶의 무게를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잘 살아내면서.


그날 집으로 돌아와 사진과 영상들을 몇 번이고 돌려 보았다.

오랜만에 웃음이 아주 개운했다.

마음에 환기와 정화가 일어났다.

냉이 캐던 아이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함께 잘 논다.

노래방을 나와 늦여름 함께 걸어오던 개천 길 생각이 난다.

아직은 덥고 마침내 가을의 기운을 살며시 머금은 바람과 만족스러운 우리의 수많은 걸음.

언니들을 만난다고 막내가 만들어다 준 반찬을 손으로 집어 먹으면서

우리의 오랜 연결성이 애잔하고 고맙고 소중했다. 그리고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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