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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지 않는, 적지 않는 유서

그날이 오지 않길


10월 3일 원래라면 칠곡경북대에서

조직검사 결과를 듣고 임상항암을 하는 날이지만

그 전날 병원에서 아직 검사결과가

나오지 않았다며 외래 날짜를 일주일이나 미뤄져 버렸다.

그래 임상을 할 수만 있다면 일주일이든

한 달이든 기다릴 수 있다.

이번 조직검사에서도 불가판정을 받으면

나에게 남은 항암은 딱 한 가지뿐이다.


악명 높은 폴피리..

그중에서도 이리노테칸 이놈이 항암계 타노스

라고 불릴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무섭고 힘들다고 한다.

그리고 내가 포기한 항암제다.


계속 미뤄지는 외래와 잦은 통증에

생각하면 안 되지만 나의 마지막을 계속 생각하게 된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고

글로 적지 못한 마지막 유서

난 이걸 아무도 읽지 않고 아무도 몰랐으면 좋겠다.

그날이 오지 않을 거라고 아직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어서다.


나와 결혼하고 싶다고 했던 남자친구

난 지금은 결혼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혹시나 모를 나의 죽음에 너에게

사별이라는 꼬리표를 달게 해주고 싶지 않았고

너무나 젊고 착한 너에게

아픔 뒤에 좀 더 쉬운 사랑을 주고 싶었다.

옆에 있어준 자체로 너무 고맙고 미안하고

혹시 내가 많이 아프게 되면

많이 울지 않았으면 좋겠고,

술로 하루하루를 보내지 않고,

부디 짧은 슬픔이었으면 좋겠다.

너무 길게 나를 생각하지 말고

매일 찾아오지 않길 시간이 지나

행복한 일이 넘쳐나서 문득 내 생각이 나면

가끔 찾아와서 나한테 자랑해 주길

그렇게 행복한 일로 하루하루 행복하게 보내다가

나에 대한 모든 게 나란 존재가 빨리 잊히길 바란다.


너무 여리고 착한 남자친구

걱정도 많고 기댈 곳이 서로였던 우리는

지금의 시련은 너무 힘이 든다.

그렇기 때문에 더 열심히 살기 위해

발버둥 칠 것이고 악착같이 살아남을 거다.

그래서 나의 적지 못한 유서가

아무도 모르게 아무도 보지 못하길..

나는 오늘도 살아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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