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커: 폴리 아 되 리뷰
나는 마음에 드는 영화는 반드시 극장에서 최소 두 번, 더 좋다면 그 이상 본다. 밥 한 끼를 굶더라도, 영화 한 편을 보는 것이 더 값지다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그만큼 영화는 나에게 단순한 문화생활이 아니라, 삶의 중요한 일부다. 하지만 영화를 진지하게 바라보기 시작한 후, 온몸에 전율을 느끼게 했음에도 단 한 번만 본 영화가 두 편 있다. 바로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과 토드 필립스 감독의 <조커>다. 두 작품은 빈부격차라는 날카로운 사회적 문제를 다룬다. 그리고 영화가 진행될수록 작은 언덕에서 시작해 거대한 산을 쌓아 올리듯, 서서히 관객을 압도하며 현실의 잔혹함을 직시하게 만든다. 이 두 영화가 더욱 소름 끼쳤던 이유는, 그들이 전하는 메시지가 결코 '허구'가 아니라 현실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그저 스크린 속 이야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문제를 가장 날카롭게 드러낸 작품이다. 나는 감독들이 '위험한 메시지'를 너무나도 정교하게 전달한 방식에 경외심을 느꼈고, 동시에 깊은 공포를 느꼈다. 그 엄청난 전달력 때문에, 나는 이 두 작품을 다시 볼 수 없었다. 그리고 그렇기에 더욱, 이 두 감독을 존경하게 되었다.
아서 플렉이 아닌 '조커'
<조커>가 정말 소름 끼쳤던 이유는 이 이야기가 결코 비현실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아서 플렉은 온전한 사랑을 받아본 적 없는 인물이다. 어린 시절부터 학대와 구타를 당하며 자랐고, 정상적인 가정 환경도, 제대로 된 교육도 받지 못했다. 그는 신경질환으로 인해 원하지 않는 순간에 웃음을 터뜨리는 증상을 가지고 있었고, 그 병은 주변 사람들에게 조롱거리가 되었다. 그가 팻말을 빼앗긴 후 아이들에게 맞을 때 본능적으로 뒷목과 사타구니를 가리고 있는 장면은, 그가 이미 수없이 폭력을 당해왔던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가장 무서운 점은 그의 비극이 단순히 개인적인 불행이 아니라, 사회가 만들어낸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고담시는 최악의 경제 불황 속에서 복지 정책이 삭감되었고, 부유층과 빈곤층의 격차는 극단적으로 벌어졌다. 아서가 받던 정신과 상담과 약물 지원이 끊긴 것도 결국 사회가 그를 버린 순간이다. 아무도 그를 이해하려 하지 않았고, 그를 돕기보다는 조롱하고 외면했다. 그는 절망적인 현실 속에서 점점 세상을 원망하게 되었고, 그 분노를 폭력으로 표출하면서 그것을 정당화하게 된다. 아서 플렉이 조커가 된 과정은 결코 비현실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사회가 한 사람을 어떻게 파괴할 수 있는지를 날카롭게 보여준다.
아서가 처음으로 살인을 저지르는 장면에서, 희생자들은 이미 '죽을만한 존재'로 묘사된다. 그들은 지하철에 타면서부터 클럽에서 만난 여성에 대한 품평을 늘어놓고, 앞자리에 앉은 동양인 여성을 비하한다. 그렇기 때문에, 아서가 총을 쏘는 순간 관객은 두려움과 함께 뒤틀린 희열을 느낀다. 그리고 곧이어 밝혀지는 사실은 그들이 금융권에 종사하는 '가진 자들', 소위 기득권층이라는 것이다. 이 장면을 기점으로 영화는 더욱 극단적으로 흘러간다. '가지지 못한 자들'은 누구인지도 모르는 광대 분장을 한 살인자를 찬양하며 거리로 쏟아져 나온다. 그의 범죄는 단순한 살인이 아니라, 사회적 저항의 상징으로 변모해버린 것이다.
조커가 저지르는 마지막 살인이 가장 무서운 이유는, 그 순간까지 관객들이 감독이 유도한 대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가 점점 고조될수록, 관객들의 마음 속에는 "제발 가지고 온 총으로 머레이의 머리를 날려버렸으면 좋겠어"라는 위험한 생각이 서서히 피어오른다. 머레이는 원래 아서가 존경하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방송에서 아서를 조롱거리로 만들었다. 그렇게 분노에 차오른 조커가 머레이의 머리에 총알을 박는 순간, 관객들은 불쾌한 쾌락과 함께 섬뜩한 두려움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 더 끔찍한 것은, 이 장면이 전국에 생방송으로 송출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시점에서 거리는 이미 '가지지 못한 자들'이 '가진 자들'을 끌어내리기 위한 시위의 공간으로 변해 있었다. 그렇게 경찰차에 실려 처벌을 받으러 가던 조커. 하지만 시위대가 경찰차를 습격하고, 뒤집힌 경찰차 속에서 피투성이가 된 아서는 천천히 일어나 자신의 입 주변을 피로 칠한다. 그리고 아서 플렉은 조커 그 자체가 된 채, 광기 어린 춤을 춘다.
이렇듯 <조커>는 '아무것도 아니었던' 아서 플렉이, 사회적으로 엄청난 힘을 가진 존재가 되어가는 이야기다. 그리고 영화는 그 변화 과정을 관객들이 무의식적으로 따라가게 만들고, 마지막 순간에는 오히려 공감하게 만든다. 그 점이 이 영화가 진짜 무서운 이유이다.
'조커'가 아닌 아서 플렉
전작의 초반부에서는 처절할 정도로 불쾌한 현실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결국 조커로서의 각성과 함께, 그와 대척점에 있는 존재, 브루스 웨인의 부모님이 사회적 혼란 속에서 '가진 자'로서 '가지지 못한 자'에게 살해당한다. 이 장면은 배트맨의 탄생을 암시하며 강렬한 여운을 남겼다. 그렇기 때문에 관객들은 당연히 후속작에서 어떠한 모습으로든, 비록 나이 차이가 많이 나지만 조커와 배트맨이 대척점에 서는 모습을 기대하게 되었다. 혹은 조커 주변의 인물들을 통해 세계관이 더욱 확장되는 이야기를 예상했을 수도 있다. 또한, 조커가 처음으로 사랑하는 존재 '할리 퀸'을 만나고, 아름다운 탈옥과 함께 고담시를 위협하는 판타지적인 모습을 보여줄 것이라고 생각하며 작품을 기다렸을 것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전작과 같은 모습을 기대했던 관객들의 바람을 철저히 배반하며 등장했다. <조커>의 마지막에서 코믹스 속 '조커'와 같은 모습으로 각성했던 아서 플렉. 그러나 현실에서 그는 단순한 '살인자 1'에 불과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감옥에 갇혔고, 전작에서 보여줬던 말도 안되는 '정당성'을 부여한 살인을 통한 희열과 광기의 춤과 같은 판타지는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관객들은 여전히 기대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전작 역시 초반부의 극한 압박감과 불쾌감을 주인공의 '살인'을 통해 해소하는 방식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폴리 아 되>는 중반부에 접어들며, 아서 플렉과 조커 사이에서 갈등하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는 변호사를 분노에 차 밀어내고 '조커'의 자아를 선택하는 듯 보이지만, 결국 이 작품의 방향은 판타지가 아닌 철저히 '현실'로 흘러가버린다. 처음으로 사랑을 주고받으며 '조커' 안에 잠들어 있던 '아서 플렉'이 깨어난 순간, 그는 조커로서 했던 모든 행동을 뉘우치고, 혼란스러운 감정을 쏟아낸다. 그리고 이것은 불쾌하지만 쾌락을 선사했던 <조커>를 기대했던 많은 관객들에게 정통으로 비수를 꽂아버린다. 그렇지 않아도 뜬금없는 뮤지컬 장면들을 감내하며, 전작처럼 강렬한 하이라이트를 기다려온 관객들, 하지만 그들에게 절대 강자의 모습으로 군림하는 '조커'는 끝내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그들에게 남겨진 것은 찌질하고 부서져버린 '아서 플렉'뿐이다. 그리고 그를 사랑했던 할리 퀸 역시, 더 이상 '조커'가 아닌 '아서 플렉'에게 아무런 흥미조차 느끼지 않는다. 결국, 전작에서 중요한 소재로 등장했었던 계단 위에서 그녀는 아서 플렉을 밀어내고 그대로 사라져버린다.
가장 최악이었던 장면은 단연 마지막 장면이다. 우리는 <조커>와 <폴리 아 되>를 통해 좋든 싫든 '아서 플렉'의 조커에게 감정이입을 해왔다. 그리고 당연히, DC 코믹스 세계관을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은 호아킨 피닉스가 연기하는 '조커'가 언젠가 배트맨과 대립하는 순간을 기대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기대는 철저히 무너졌다. 마지막 장면이 끝나는 순간, 우리는 앞으로 어떠한 작품에서도 '조커'를 마주할 수 없게 되었다. 그가 조커로서 남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동안 도대체 무엇을 보고 감정이입했던 것일까? 이것이야말로 이 작품에서 가장 불쾌했던 순간이었다.
이제 한동안 조커는 없다.
<조커>는 단순한 악당의 탄생을 다룬 영화가 아니었다. 이 작품은 사회에서 소외된 한 인간이 어떻게 변화하고, 어떻게 자리를 잡아가는지를 가장 비극적인 방식으로 그려냈다. 우리는 아서 플렉이 '조커'가 되어가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그의 분노와 절망, 그리고 광기를 이해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감독이 의도한 불쾌한 공감을 경험했다. 그러나 <폴리 아 되>에서 우리는 또 다른 현실을 마주했다. 전작에서 그렇게 강렬하게 각성했던 '조커'는 사라지고, 다시금 부서지고 망가진 '아서 플렉'만이 남았다. 그는 더 이상 세상의 부조리에 맞서는 존재도, '가지지 못한 자들'을 대변하는 상징도 아니었다. 그저 처음부터 끝까지 한없이 나약한 한 인간이었을 뿐이다. 그렇다면 묻지 않을 수 없다. 이 모든 이야기는 결국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가? 우리는 이미 한동안 호아킨 피닉스의 조커를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영원히 그 세계관에서는 그가 연기하는 '조커'를 볼 수 없게 되었다.
이제, (한동안)조커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