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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ah Sep 21. 2024

2. 암 말기, 아버지의 죽음 2

아버지와의 마지막 8주

2024년 5월 27일, 아버지를 내가 사는 곳 타우랑가로 모셔오기 위해 오클랜드로 갔었을 때 아버지의 얼굴은 핏기가 없이 노란빛이 돌고 있었다. 얼굴에 생기라고는 전혀 없는, 누가 봐도 병자의 모습이었다. 나는 그저, '황달기가 있으시네, 간이 안 좋으신가'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엄마에게 잘 지내시라고, 아버지를 내가 잘 모시겠으니 편히 쉬시라고 하고 간단한 작별을 했다. 


아버지에게는 당뇨 2형과 전립선 문제가 있어 의사를 꾸준히 보는 편이었기에, 올해 초부터 아버지를 괴롭혔던 소화 문제와 관련해서도 의사가 잘 봐주고 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고 있었다. 타우랑가에 도착한 날에 부재중 전화와 음성 메시지가 있어 확인했는데, 오클랜드 주치의 병원의 간호사가 아버지의 피검사 결과 철분 수치가 매우 낮으니 의사와 상담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전화 통화를 하여, 타우랑가에 왔고 당분간 여기서 지낼 생각이니 오클랜드에 가려면 시일이 걸린다고 설명하였다. 그쪽에서도 알았다고 하면서, 혹시 응급 상황이 생기면 응급실로 가라는 말을 할 뿐이었다. 이때 헤모글로빈 수치가 낮다는 이야기는 없었기에 그저 철분이 부족한 정도로만 이해하고 그쳤다. 나는 아버지에게 타우랑가에서 주치의 아닌 곳에서 예약 없이 진료를 보는 병원이 있으니 가보자고 제안했지만, 아버지는 괜찮다며, 오클랜드에 가서 하면 된다고, 별 것 아닌 것으로 넘기셨다.


그렇게 암인 줄도 모르고 타우랑가에서 막내딸과 함께 매일 사우나를 가고, 딸이 아버지의 취향을 고려해 정성스럽게 차려준 밥상을 하루 세끼 드시면서 보내신 3주가 ignorance is bliss - 모르는 게 축복인- 마지막 시간이 되었다. 철분제도 챙겨드리고, 붉은 고기는 소화가 안되어 잘 못 드시니 육수라도 내어 죽으로, 국으로, 찌개로 내어드렸다. 오클랜드에서 픽업했을 때의 누렇게 뜬 얼굴에서, 핑크빛 혈색이 도는 얼굴로 회복이 되셔서 나는 아버지가 회복되고 있다고 믿었다. 실제로 아버지에게 어머니로부터의 스트레스가 사라졌고 꽤나 건강한 식단과 사우나는 아버지에게 활력소가 되고 있었다. 때론 식사량이 상당히 좋을 때도 있었고 심지어 아이들 먹으라고 준비한 생선튀김을 달라시며 맛있게 드시기도 했다. 심지어 이때 남는 시간에는 시내버스를 타고 도서관도 가셨고 약간의 산책도 쉬엄쉬엄 하셨었다. 우리 식구들 모두가 아버지가 회복을 잘하고 계신다고 믿었던 시기이다. 그 시간이 아버지에게 허락된, 임종 전 마음 편하게 삶을 만끽할 수 있는 마지막 시간이 될 줄은 그 누구도 몰랐었다. 


2024년 6월 18일 아버지는 타우랑가 병원에서 CT결과 간암, 위암, 식도암을 진단받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통증이랄 것이 없었다. 그다음 날인 19일 위 내시경과 조직검사를 실행하였다. 내가 보호자이자 통역으로 아버지 곁에 있을 수 있었는데, 모든 면에서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다. 마취제로 환자 본인은 잠든 상태이나, 아프거나 불편한 감은 반사적으로 몸이 표현하였고, 조직 검사를 한다고 집게로 조직을 뜯을 때 출혈이 있는 것, 열린 식도에서 올라오는 냄새, 모니터를 통해 컬러로 보는 내부 상태, 그 어느 하나도 유쾌할 수 없는 경험이다. '암'이라는 밉상인 녀석을 눈으로 마주하는 순간이기도 했으니까. 식도 안을 울퉁 불퉁하게 만들고 식도를 좁게 한 모습이나, 식도와 위 안에 육안으로도 커다랗게 보이는 여러 암의 모습들, 의료지식이 없는 내가 보더라도 조직검사가 의미가 없음을 깨달았다. 식도암과 위암이 같은 종류인지가 당최 중요하지 않았다. 이미 다 퍼졌고, 특히 간암도 다 크게 퍼져 모든 치료가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힘든 검사가 끝나고도 한참을 더 주무신 아버지는 깨어나신 후 의사와 최신 요법에 해당하는 면역치료에 대해 질문하고 싶었지만 그다음 날을 기약해야 했다. 그날 저녁은 집에서 하루 주무신 후 다음날 다시 병원으로 갔다. 


엄마도 또한 충격 상태였던 것 같다. 이 병마의 최종 위협인 죽음이 아버지에게 닥친 일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는지 못하는지... 집에 와서 얘기라는 것을 할 때, 아버지와 나는 '암'이라는 그 주제를 놓고 얘기를 할 수밖에 없었는데, 엄마는 자꾸 전혀 관련이 없는 이야기만을 할 뿐이었다. 회피 기제가 작용하는 듯 보였다. 침울하거나 슬프거나 걱정하거나 하는 감정보다는 아버지가 아닌 나를 지나치게 잘 챙겨주며 활짝 웃는다거나 치매가 아니라 암이라 다행이다라는 적절하지 못한 언행이라던가... 차라리 엄마가 울면서 그동안 좀 잘해줄 걸 후회가 된다거나 하는 인간적인 모습을 보였더라면 그게 장기적으로 더 건강할 것 같았다. 충격이 올 때 그 충격을 고스란히 느끼고 극복하는 것이, 못 느끼고 아무 대처 없이 있다가 장기간 문제가 생기는 것보다 낫다는 심리학 시간에 배웠던 내용도 생각이 났다. 부정 - 분노- 타협 -우울 - 수용의 단계에서 어머니는 곧바로 '수용'으로 넘어가서 끝나고 만 것처럼 내 눈에 보이는 것이다. 당시엔 마음이 고장 난 사람 같아 보였다. 그래도 배우자로 한평생을 살았는데 정말 그렇게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까. 자신이 받은 상처가 크면 그동안의 좋았던 시간들 마저 모두 삭제가 되는 것일까. 이때 나의 감정은, '아버지는 불쌍하고, 어머니는 너무하다'로 정리할 수 있다. 내가 뭐라고 부모를 판단하겠냐만은, 이때 나도 아버지의 시한부 소식에 내 감정이 매몰되어 다른 것들, 특히 엄마가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왜 그러한 반응을 나오는지를 살필 여력이 없었다. 돌아가신 후 엄마는... 불쌍하다. 그렇다. 잘해드리자.


사실 큰 충격을 받았던 어머니


그다음 날은 병원에서 입원 마지막 날이었고, 퇴원 전 의사와 충분히 상담하고 필요한 것들을 받아가는 절차였다. 암전문의가 병원에 있지만, 아버지의 암 말기 케이스는 손을 쓸 수 없는 단계이므로 호스피스로 연계해 준다는 내용이었다. 뉴질랜드에서 호스피스는 무료라고 하였다. 외국인은 물론 해당되지 않지만, 워크비자 2년 이상인 사람부터는 의료에 있어 영주권자와 같은 대우를 받기에 호스피스는 무료였다. 아버지의 워크비자가 9월 2일까지였는데, 의사 선생님은 호스피스에게 아버지가 호스피스 대상자로 이야기할 것이니 나에게도 굳이 비자 만료일이 언제인지 언급하지 말라고 귀띔해 주었다. 우리는 비자 만료가 넘어가면 그때부터는 돈을 내야 하는 건지, 케어가 끊기는 건지, 모든 게 불투명했지만, 물었다가 긁어 부스럼이 될까 묻지도 못하였다. 돈을 내야 하면 내지 뭐.. 하는 생각도 있었고, 돈은 대수가 아니었다. 의사는 그동안 먹었던 약들(콜레스테롤, 고지혈, 전립선, 당뇨, 소화제)은 삶의 질 개선을 위해 먹던 것들인데, 이제는 먹지 않아도 좋다고 하였다. 추후 필요한 약들은 이제 주치의와 호스피스 간에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의사 외에도 영양사가 와서 앞으로 점점 더 식사를 못하게 될 것이고 이제는 몸에 좋고 나쁜 음식 의미가 없으니 드실 수 있는 거면 무엇이든 드시게 하라고 하면서 간편하게 마시는 영양음료 Diasip 두 박스와 Ensure 분유도 두 통 처방해 주었고, 작업치료사가 방문을 와서 샤워용 의자를 처방해 주었다. 의사가 처방한 철분을 정맥 링거로 맞고, 처방받은 것들을 챙겨서 집으로 왔다. 그렇게 사흘간의 대장정을 마치게 되었다. 


그 후 집에서는 여러 혼란의 도가니였다. 우리 모두가 처음 겪는 일이니 그럴 수밖에. 아버지도 지치셨겠지만 내 몸도 정신도 너덜너덜해진 것 같았다. 아버지는 연말까지 시간이 있을 것으로 보고 이것저것 생각하고 계획을 세우고자 하셨다. 한국에서 호스피스 병동에 입원을 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 한국을 한 번은 다녀와야겠다는 생각, 뉴질랜드에서 가보고 싶었던 곳들을 여행하겠다는 생각, 딸들을 위해 선물을 사고 싶다는 생각, 상속 문제가 복잡하지 않게 한국에서 금융문제를 정리하겠다는 생각, 한국 세무사가 우리 집 근처로 방문을 오게 해 업무를 마무리하겠다는 생각 등등... 아버지 마음이 꽤나 번잡하셨다. 


나에게는 아버지의 등록 병원을 타우랑가로 옮기는 일과, 호스피스로부터 연락을 주고받는 일, 아버지를 케어하는 일 등 분주한 나날들이 이어졌다. 그런데 아버지의 암 진단 과정에서부터 주치의를 옮기고 호스피스 케어를 받는 일, 임종 과정과 임종 후 모든 과정들에 있어서 하나님의 섭리를 자꾸만 느끼게 되었다. 모든 일이 막힘이 없고 순조로웠다. 아버지가 한국을 가시겠다고 고집을 부리실 때도, 노령의 환자가 비행기를 타는 것도 문제인데, 가서 서울에 집도 없는데 그 복잡한 곳에서 일을 보러 다니고 친구들을 만나고 하는 게 무리이시다, 안 가셔야 한다, 삼일만 기도를 해보시라고 부탁을 드렸더니 아버지가 그다음 날 기적같이 가지 않으시겠다고 마음을 돌리신 일이나, 타우랑가로 등록 병원(주치의)을 옮긴 바로 다음날부터 극심한 통증이 시작되어 등록병원으로 가 의사를 만나고 바로 모르핀을 받을 수 있었던 일이나, 집에서 평안히 식구들이 있는 가운데 돌아가신 일이나... 모든 일들이 기적같이 일어났다. 모든 것이 간증거리이다. 


"사람의 마음에는 여러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만이 완전히 서리라" (잠언 19:21)


자꾸 이 구절이 마음에 떠올랐다. 아버지의 분주한 마음과 여러 계획이 의미가 없음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하나님께 고백했다.

"하나님, 하나님은 다 아셨죠? 다 아셨잖아요. 아니, 계획하신 거죠."

하나님이 다 아셨고 계획하심이란 것을 받아들이니 아버지의 시한부도 한결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아빠가 예수를 주로 영접하고 구원받았기에, 데려가셔도 될 때 데려가시는 것과, 그 긴 세월 인내로 아버지를 기다려 주신 것,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가정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신 언약의 말씀을 지키신 것과, 그렇게 기도한 저희의 기도를 들어주신 것, 모두 감사합니다. 아버지, 제 아빠를 낫게 해 달라고 살려달라고 기도를 해야 할지, 아니면 구원을 잃지 않고 가시는 날까지 평온하게 계시다 안식에 들게 해달라고 기도를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솔직히 나을 병 같지는 않아요. 물론 주님은 못하실 일 없으시지만, 낫게 하는 게 주님의 뜻이 아닐 수 있으니까요. 우리는 모두 한 번씩 육체의 죽음을 맞는 것이 정해져 있을진대, 육체를 낫게 해 달라고 목매고 기도하는 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 같지는 않아요. 주님은 육체가 아닌 영 구원에 관심을 두시니까요. 우리 아빠를 따뜻하게 품어주세요. 잘 보살펴주세요. 오직 주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저희들 되게 해 주세요. 육체를 초월하고 주님만 생각하는 경지에 갈 수 있다면 좋겠어요. 도와주세요. 저희 아빠가 고통 없이 가실 수 있게 도와주세요."


저의 기도는 이랬습니다. 


저희 아버지는 2024년에 5월 27일에 요양차 타우랑가 저희 집으로 오셨고

두 달만인 7월 27일에 하나님 아버지 품으로 돌아가셨어요.

그런데 아버지의 생일이 10월 27일이거든요. 기억하기도 참 쉽게요. 

짜 맞추려도 이렇게 맞추기 힘들 텐데, 이렇게 의미 있는 날 27일을 세 번씩이나 되풀이되게 하시며 '봐라, 내가 여호와 하나님이다'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이건 증명할 수도 없는 비과학의 영역이고, 제가 느낀 바가 그러하다는 것뿐입니다. 저에게는 그런 의미가 있죠. 


다음번 글에서는 가정에서 받는 호스피스의 완화치료 (palliative care)에 대해서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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