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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기적 J Oct 18. 2024

순수한 지루함

그립다 내 순수함이

내게 학창 시절이 어땠냐고 묻는다면,

나는 '지루했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이건 내가 지금부터 돌아보고 내린 전체적인 평가다.

당시에는 그런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학교에 다니고, 시험을 치르고, 축구 농구를 하며 친구들과 어울리는 일상이었다.

어느 하나 특별히 잘하지도 못했고, 눈에 띄지도 않았다.

서태지의 ‘교실 이데아’ 가사처럼 치열하게 무언가에 맞서는 일도 없었다.


내가 그나마 눈에 띄었던 건 또래에 비해 키가 크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멀대' '전봇대' '멸치' ‘키 큰 애’ 같은 별칭을 얻기도 했다.

하지만 그 별명조차도 시간이 지나면서 사라졌다.

친구들이 나를 따라잡았고, 어떤 친구는 나를 앞서갔다.

그렇게 별명도, 나도 그저 평범함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러다 진로를 결정해야 할 열아홉 번째 겨울이 다가왔다.

열아홉 번의 겨울 중 기억나는 건 고작 열세 번 정도였다.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냥 12년 학교만 다녔는데, 진로를 어떻게 정해?'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저 '대학은 가야 한다'는 막연한 목표만 있었고,

퍼즐 맞추기 하듯 기웃거리며 내 점수 모양을 찾았다.


스무 번째 봄, 성인이 되었지만 열아홉 번째 봄과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단지 술과 담배에 대한 자유가 생겼다는 것뿐이었다.

연애와 이별 같은 소소한 이벤트는 있었지만 내 인생에 특별한 이벤트라 할만한 건 없었다.

나는 휴학 한 번 없이 학교를 성실히 다녔고, 복학할 시점에 맞춰 군대도 다녀왔으며,

졸업 후에는 전공을 살려 바로 취직도 했다. 그때까지도 나는 똑같이 평범하게 지나가리라 생각했다.


스물여섯 번째 봄, 세상엔 희한하고 대단한 사람이 많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광고 업계라 더 유별났을지도 모른다.

각자의 개성과 능력이 뾰족하게 ‘낭중지추(囊中之錐)’라는 말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무엇이 그들을 뾰족하게 만들었을까?


지금 생각해 보면 이기심 때문이었다.

‘이기심’이란 단어는 내게 그저 그냥 누구나 가지고 있는 흔한 심리 중 하나였다.

하지만 사회에 흔한 이기심은 없었고 너무나 다양했다

원래 둥글고 네모났던 이기심들이 부딪혀 각양각색 뾰족뾰족하게 깎인듯했다.


내 둥글었던 이기심도 어느덧 네모나게 깎였고, 남들과 거리를 두도록 뾰족해졌다.

내 표정이 바뀌고 말투가 바뀌며, 그렇게 회사에서 내 개성이 생기고 내 영역이 생겼다.


더 빨리 승진하고 싶은 욕구, 중요한 프로젝트를 맡고 싶은 갈망,

남들보다 두드러지고 싶은 마음. 이기심은 나를 앞서 가게도 만들었고,

때로는 남들을 밀어내며 나만의 공간을 지키고 싶은 욕망을 품게 했다.

그 과정에서 때론 날카로웠고, 예민했으며, 또 비굴했다.

그렇지 않고는 내 뾰족한 가시가 무뎌질 것 같았다.


지금은 그때보다 더 단단하고 넓어진 이기심을 갖고 있다.

사회에서 부딪히고, 찔리고, 깎여진 상처들이

이제는 두꺼운 굳은살이 되어 나를 보호하고 있다.

뾰족한 가시들이 두꺼워지니 되려 둥글어진 듯했다.


사회생활을 하는 신입들을 순수하다 하는 이유는 이기심의 유무라 생각한다.

1년, 6개월, 3개월이라도 먼저 시작한 친구들은 그새 본인들의 이기심을 뾰족하게 깎아

신입들을 툭툭 찌른다. 그걸로 본인들이 앞서있다 생각하게 하는 이기심을 만족시킨다.

찔린 신입들은 그제야 자신들의 상처에 가시를 깎아 심는다. 그렇게 또 이기심은 뾰족해진다.


돌아보면, 학창 시절이 지루했던 이유는 친구 대부분이 이기심을 발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 내가 특히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그 중에도 경쟁에 이기심을 부리던 친구는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난 이기심, 특히 승리에 대한 이기심이 없었기 때문에

공부에도, 운동에도, 친구 관계에도 별다른 열정이 없었다.

승리라는 이기심에 중독되지 않은 삶은 당연히 지루하다.


그렇다고 다시 돌아가 이기심 가득한 삶을 살아보라고 한다면, 나는 거절할 것이다.

이기심 없이 모두를 대하던 순수한 내가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이기심에 대해 이야기할 자격조차 없을 테니까.


다시 둥글어지는 내 이기심의 작은 요철들이 없어지기까지

얼마의 시간이 더 걸릴지 모르겠지만

순수했던 그 지루함이, 이제는 오히려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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