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라는 바다, 상상력이라는 요트
나는 바다 보는 것을 굉장히 좋아한다.
드넓고 푸르른 바다를 배경 삼아
아름답게 부서지는 파도 소리를 음악 삼아
산책을 하고, 멍을 때리고, 명상을 한다.
모든 것에 의미가 없어지며
동시에 모든 것에 의미가 생긴다.
내가 없어지며 그곳에 온전히 존재하게 된다.
이 순간만큼은 고요해지며 평온해진다.
인생이란 드넓은 바다 와도 같다.
바람이 없는 날엔 파도 하나 없이 잔잔하고
바람이 강하게 부는 날엔
파도가 거세게 방파제를 쾅쾅 두들기며
태풍이라도 부는 날엔 온 바다가 뒤집어진다.
하지만 바다는 그 자리를 지키며
늘 펼쳐지며 흘러가며 순환한다.
잠시 흐트러지거나 거세지는 순간이 찾아오더라도
전혀 개의치 않으며 흘러간다.
인생 또한 마찬가지이다.
인생에는 희로애락이 존재한다.
기쁘기도 슬프기도 즐겁기도 두렵기도
하루는 평온한 날이었다가도
태풍이 찾아온 바다처럼 한 없이 흔들리기도 한다.
하지만 인생은 흘러가고 삶은 펼쳐진다.
바닷가를 관찰하며 산책하듯
펼쳐지는 삶과 인생을 관찰하며 관망하는 자세가
앞서 이야기 한 '소극적 참여자/내맡기기'이다.
그렇다면 '적극적 관찰자'는 어떤 것일까?
당신은 '상식'과 '상상'의 차이를 아는가?
상식은 모두가 하는 생각이자 일종의 규칙, 약속이다.
대중들이 하는 생각이 상식이다.
'상상'은 대중들이 아닌 나 와 '나'가 하는 생각이다.
즉, 나만의 생각이자 나만 할 수 있는 생각이 바로 '상상'이다.
이 '상상'이 바로 '적극적 관찰자'의 핵심이자 전부이다.
잠시 어릴 때를 떠올려보자.
주변 반응을 신경 쓰기보다는
내 생각과 마음이 가는 대로 행동했다.
마음껏 뛰어놀고 노래 부르고 싶으면 노래 부르고
새하얀 도화지 위에 그리고 싶은 대로 그림을 그리며
얼굴에서 웃음꽃이 떠날 줄 모르며 마냥 행복했다.
타인의 평가가 우선 시 되지 않고
내 마음, 내 생각, 내 상상이 우선 시 되었다.
슬플 땐 한 없이 슬퍼했으며
즐거울 땐 한 없이 즐거워했다.
그래서 어릴 땐 내 안의 참 자아인 '나'와 온전히 하나 되어 세상을 즐긴다.
하지만 학교를 들어가고 교육을 받기 시작하는 순간
'상식'을 알고 '상식'만이 정답이라고 배우는 순간
'상상'은 죽음을 맞이한다.
어느새 나는 노래를 잘 못 부르는 사람이 되어있고
그림을 그릴 땐 정해진 규칙을 따라야 하며 규격화되어 가고
마음껏 뛰고 싶어도 더 이상 뛰지 못하며
찬란하게 만개하던 웃음꽃은 어느새 시들어 버린다.
그렇게 '대중'이 되고 '상식'이 내 생각이 되고
이 '상식'을 통해 생각하니 어느새 삶이 불안해지고 즐겁지 않다.
불안한 삶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내가 배운 '상식'을 활용하자니 마땅히 길이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어린 시절을 추억한다.
'어릴 땐 참 좋았는데, 뭐가 그렇게 즐거웠는지, 그립다, 좋을 때다'
나는 이전 이야기까지 소극적 참여자 시점인 '내맡기기'를 제시했다.
이는 펼쳐지고 흘러가는 삶을 참 자아인 '나'의 시점, 마음의 시점에서
온전히 감사하고 즐기고 바라보는 것이 '내맡기기'이다.
펼쳐지는 삶에 순응하고 삶이 주는 선물을
온전히 감사하게 받는 것도 좋지만
어떤 삶이 펼쳐질지 미지수이기에 직접 설계하고 싶을 수 있다.
이때 필요한 것이 바로 '적극적 관찰자 시점으로의 상상력'이다.
긴 시간을 할애하여 시간은 허상이고
세상은 관찰함으로써 펼쳐지고 이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인
양자역학의 세상임을 알려주고 우리 모두가 '신'임을 일러주었다.
눈치 빠른 독자나 깨달음이라는 친구가 한 번이라도
당신 마음의 문을 두들긴 사람은 이미 눈치챘을 것이다.
적극적 관찰자 시점이란 삶에서 한 발 물러나 참 자아인 '나'의 시점으로
나만 할 수 있는 생각인 '상상'이라는 요트를 타고
무한하게 펼쳐지는 인생이라는 바다에서 돛대를 잡고 항해하는 것이다.
세상은 우리가 '관찰'함으로써 존재하게 된다.
이는 현대물리학인 양자역학을 기반으로 하고 있고 우리는 그 안에 살고 있다.
관찰하기에 존재할 수 있고 관찰자가 없으면 대상은 존재할 수 없다.
'상상'은 나만 할 수 있고 나만 그릴 수 있는 그림이다.
'상상'을 통해 마음속에 모든 것을 관찰하고 있는 참 자아인 '나'에게
이미지를 연상시키는 '심상화'를 통해 내 상상을 관찰하게 한다.
관찰되었기에 '나'는 나를 통해 세상에 이를 창조하게 된다.
이것이 흔히 이야기하는 '끌어당김'의 본질이자 원하는 삶을 창조하는 방법이다.
그래서 앞선 이야기에서
'그만 불안하고 싶으면 그냥 그만 불안하면 된다'라고 이야기한 것이다.
그만 불안하고 '싶다'라고 소망하는 것은 현재 그렇지 '않다'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문장이기에 그렇지 않은 현실을 창조한다.
그렇기에 그만 불안하고 '싶다'가 아닌
나는 '불안하지 않고 행복하다'와 같은
과거완료형이나 현재진행형의 문장을 이야기하라 강조한 것이다.
내가 이런 삶을 이미 살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고
그 상상 속에 온전히 몰입하여 행복한 감정을 느끼고 감사를 느끼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참 자아인 '나'는 이를 면밀히 관찰하고
관찰된 이미지를 나를 통해 세상에 창조해 직접 느끼며
결국 나는 불안하지 않은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끝없이 파도치는 인생이라는 무한하고 경이로운 바다 위에
'상상'이라는 요트를 타고 펼쳐지는 대로 흘러가되
돛대를 내가 잡고 방향을 조절하는 것.
이것이 인생을 대하는 두 번째 자세인 '적극적 관찰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