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자아'의 탄생, 죽음 그리고 '에고'의 탄생
2025년 12월 12일
새벽 12시 12분 12초
대부분의 하루가 끝난 시간
새로운 아이가 지구별에 내려왔다.
'응애응애응애'
마치 자신이 이곳에 있다는 걸 알리고 싶은 듯
작지만 우렁찬 울음소리가 새벽 공기를 타고 퍼진다.
이제 막 지구별에 내려온 아이는
눈앞에 펼쳐지는 모든 것에
즐거움을 느끼고 호기심을 느낀다.
'이건 난가? 저것도 나인가?'
자신의 앞에 있는 모든 것에
자신을 대입하여 바라보고 느끼고 즐긴다.
모든 병원에 있는 신생아실에선
늘 해맑은 웃음소리가 퍼진다.
신생아는 하루에도 400번 이상을 웃는다.
눈을 뜨고 있을 때도, 잠을 잘 때도 웃는다.
막 태어난 신생아에게는 '자신'이 없다.
'관찰하는 자는 관찰자 자신을 보지 못한다'
그곳에 있음을 분명하고 또렷하게 느끼고 있지만
'자신'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렇기에 눈앞에 펼쳐지는 모든 것에 자신을 대입하고
모든 것을 구분 없는 '무경계'의 상태로
그저 모든 것을 '자신'으로서 관찰하고 즐긴다.
'이것도 나는구나! 저것도 나는구나!'
경계가 없기에 모든 것을 자신으로 인지한다.
'i am that i am'
시간이 지나고 부모를 따라 하고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부모는 '언어'를 통해
아이에게 경계를 설립한다.
'엄마' '아빠' '나'
언어는 세상을 구분 짓는 경계선이자
창조하는 힘이자 스스로를 가두는 철창이다.
그렇게 부모를 통해 언어를 배우고
스스로 세상을 분리하기 시작하면
이를 축하하는 '돌잔치'가 열린다.
돌잔치는 아이가 태어나고 100일이 지난날을
기념하는 날이지만
동시에 '참 자아'의 죽음을 알리는 날이자
새로이 태어나는 '에고'를 축하하는 날이다.
인간은 3-4세 이전을 기억하지 못한다.
이를 유아기 건망증이라고 하는데
모든 것이 자신이던 본연의 모습인
'참 자아'를 잊고 '에고'로써
살아가기 시작하는 시기이다.
우리 인간들은 눈앞에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는다.
대상에 붙어있는 '이름표'를 본다.
특정 대상을 '언어'를 통해 분리하고
언어로 만든 이름표를 통해
대상을 본다고 '착각한다'
인간들은 대상의 본질을 바라보지 못한다.
어떠한 대상의 이름표를 바라보기에
이름표가 사라지는 순간
언어가 사라지기에 대상을 볼 수 없게 된다.
그렇기에 인간의 세상은 양자의 세상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언어의 세상이기도 하다.
사실 언어의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본다는 건
크게 문제 되지 않는다.
이는 대상을 창조하는 인간의 능력에서
기반되어 있기에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필요한 영역이 되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바로 이를 통해 생성되는
'에고의 호불호'이다.
에고의 호불호는 굉장히 강한 힘을 지녔고
인간의 삶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며
때로는 지옥 같은 삶으로 이끌기도 한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 '에고'는
그렇게 강력한 힘을 지닌 것이고
인간의 삶을 불안으로 이끌고
인간은 이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모른다는 걸 모르기 때문이다.
모른다는 걸 모르기 때문에
벗어날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일생을 그렇게 살아오며
에고의 호불호가 '습관'으로 기억되어
자리 잡고 안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대다수 인간들은 이 에고의 습관인
생각을 따라가는데 너무나도 익숙해져 있다.
오늘 아침 길을 나선 당신은
날이 너무 춥다고 짜증을 내며 차를 탄다.
날씨는 그저 그 자리에 있을 뿐인데
당신의 에고는 거기에 대해 분노한다.
이렇게 보니 정말 아둔하지 않은가?
우주적 시점으로 봤을 때
당신은 티끌에 속하지도 못할 정도로
정말 작은 존재인데
'참 자아'가 아닌 만들어진 자아인 '에고'는
자신의 호불호에 따라, 자신의 기준에 따라
우주가 흘러가고 세상이 펼쳐지기를 바란다.
그리고 자신의 기준과 달라지면
거기에 대해 분노하고 불평하고 불안해한다.
즉, 에고는 세상 모든 것을 자신이 통제하려 한다.
흐르는 강물을 이쑤시개로 막는다고 막아지는가?
바꿀 수 없는 것을 바꾸려 온 힘을 다하고
당신은 이런 에고와 자신을 동일시하니
'삶이 늘 불안하고 두렵고 불 만족스러운 것이다'
재차 말하지만 에고에게는 아무런 힘이 없다.
마치 뉴스를 보며 쌍욕을 하는 어르신들처럼
펼쳐지는 세상에 쌍욕을 하며 바꾸려 하고
불평불만을 지니지만 결과는 어떤가?
절대 바뀌지 않는다.
하늘에 아무리 고함을 지르고 애써도
해는 뜨고 지며, 구름을 흘러가고, 비는 내린다.
내일 회사에 출근하기 싫다고,
내일 학교에 나가 수업을 듣기 싫다고
늦은 새벽까지 아무리 버티고 애써도
결국 내일 회사를 가고 학교를
오히려 더 피곤하고 짜증이 가득한 상태로 간다.
이것이 에고의 생각과 판단과 호불호를
따라가며 자신과 동일시 여겼을 때 에고가 지니는
강력한 힘이자 인간이 벗어나지 못하는 굴레이다.
이러한 생각과 호불호와 감정들은
당신이 알아차릴 틈도 없이
에고를 통해 무한히, 끝없이 떠오른다.
하지만 이러한 '에고'는 당신이 아니다.
당신은 그 안에서 떠오르는 생각을 듣는 자이며
펼쳐지는 기억들을 관찰하는 자이며
올라오는는 감정들을 느끼는 자이다.
세상은 무수히 많은 양자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양자들은 관찰자가 있어야 존재할 수 있다.
당신의 내면에 떠오르는 생각, 기억, 감정도
마찬가지로 관찰하기에 존재할 수 있다.
'i am that i am'
'i'로의 회귀.
이것이 '참 자아'인 본연의 모습을 찾는 것이고
이것이 인간의 삶에 있어 가장 큰 과제이다.
그럼 어떻게 돌아갈 수 있는가?
정말 돌아갈 순 있는가?
당신은 이미 i를 '알아차림'으로
존재를 존재하게 했으며(being)
이미 당신은 그곳으로 돌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