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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폭싹 속았수다'

부모와 자식, 모두 다 처음이기에

by cogito
그리고 그들은 평생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And they lived happily ever after)


어릴 적 내가 좋아하던 동화책들은 하나같이 해피엔딩으로 끝났다.
왕자님과 공주님은 결혼하고, 행복한 여생을 보낸다는 밝고 희망찬 결말.

하지만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이런 이야기에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한다고 해서,
소원을 이뤘다고 해서,
그 이후의 삶이 무조건 행복할 수 있을까?
(주변을 둘러보면, 현실은 결코 그렇지 않다는 걸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들은 평생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그러나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는 이러한 동화적 사고를 산산이 깨뜨린다.
이 작품은 진정한 행복과 사랑이 무엇인지,

때로는 잔인할 정도로 현실적으로 그려낸다.




드라마의 주인공 애순이가 툭 던지는 한마디는 깊은 울림을 준다.


"난 그냥, 빨리나 늙었으면 좋겠어... (중략)
손에나, 속에나 굳은살이 절로 베기는 건 줄 알았는데...
난 그냥 다 뜨거워.
맨날 데어도, 맨날 아퍼.
나만 모지랭이인가?
남들은 다 어른 노릇하고 사나?"


이에 대한 남편 관식의 대답은 씁쓸하지만 위로가 된다;

"걔들도 다 어른이래니까. 어른인 척하고 사는 거야."


관식과 애순


애순이와 관식이는 치열하고 풋풋한 사랑을 한다.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에 골인하지만,
그들 앞에 펼쳐진 길은 꽃길이 아닌 험난한 자갈밭이었다.


눈 깜짝할 새 애순이는 엄마가 되고, 관식이는 가장이 된다.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처음이라 서툴지만,

삶은 적응할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하루하루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가난,

애순이를 못마땅해하는 시댁의 구박,

예기치 못한 막내의 죽음.....


이와 같이 수많은 시련 속에서도, 두 사람은 서로의 뒤를 봐주며
조금이라도 더 나은 내일을 위해 각자의 몫을 다한다.



이 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것은,
애순의 모성애, 그리고 관식의 부성애다.


애순과 관식은 딸 금명이와 아들 은명이를 최선을 다해 키운다.
자신들과 같은 고된 삶을 물려주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늙어가는 몸과 달리, 마음은 여전히 청춘이지만,
그들은 부모라는 막중한 책임 때문에 절로 '어른'이 되어간다.
자녀들이 각자의 인생에서 외줄 타기를 하고 있을 때,
혹여나 발을 헛디딜까 조마조마하며 밑에서 그물을 치는 그런 존재...
그들은 자식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안전망이자, 든든한 '백업'이 된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만으로는 세상의 풍파로부터 자녀들을 완전히 보호할 수 없었다.
금명이는 금명이대로, 은명이는 은명이대로
수많은 현실의 벽에 부딪히고, 때론 좌절한다.
그리고 자식들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며,
애순과 관식은 모든 게 다 처음인 것처럼, 매번 아파한다.


애순의 모습 (문소리) ... 국민 엄마 같다 ㅎㅎ


애순과 관식의 삶은 우리가 흔히 바라는 ‘해피엔딩’과는 거리가 멀다.
살기 조금 편해졌다고 느끼면 곧 다른 시련이 찾아오고,
잠시나마 행운이 찾아오면 이내 불행이 뒤통수를 친다.
그리고 평생 함께할 것만 같았던 인연들과도
언젠가는 이별을 맞이해야 하는 것이 삶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고달픈 삶 속에서도 서로에게 툴툴거리다가도
뒤돌아서면 가족을 걱정하는 걸 멈추지 않는다.
언제나 서로가 잘되기를 바라고,
잘못된 일이 생길까 염려하며,
힘든 일이 닥치면 서로에게 의지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생긴 ‘정’과 ‘애틋함’은,
단순한 해피엔딩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폭싹 속았수다의 영어 제목은
"When Life Gives You Tangerines"이다.
직역하면 "인생이 네게 귤을 줄 때"이지만,
그 속뜻을 담아 의역하면 "삶이 네게 시련을 던져줄 때"라는 의미가 된다.


영어권에는 이런 속담이 있다.

"When life gives you lemons, make lemonade."
(인생이 네게 쓰디쓴 레몬을 던질 때,
너는 그것으로 달콤한 레모네이드를 만들면 된다.)


삶에서 어떤 고난이 찾아오더라도,
그걸 버텨내며 나만의 행복을 개척하라는 의미가 담긴 말이다.
이 드라마에서는 원어의 ‘레몬’ 대신,
제주도의 상징인 ‘귤 (tangerines)’을 넣어 제목을 센스 있게 변주한 것이 아닐까.


삶을 살다 보면, 당연하지만 망각하기 쉬운 사실이 있다;
사랑하는 사람과 맺어진다는 것은
평생 가는 행복을 약속받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함께 헤쳐나갈 동반자를 얻는 것이다.


둘 다 사는 게 아프고 서툴기만 하지만,
그런 순간에도 금쪽같은 둘만의 행복을 찾을 수 있도록,
서로의 보탬이 되는 게 ‘사랑’이다.


우리 모두 누군가의 뱃속에서 나온 ‘아가’였지만,
다른 누군가의 버팀목이 되기 위해,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어른인 척하며 살아간다.


사는 게 힘들 때,
(그리고 인류애 충전이 필요할 때)
모두에게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를 권하고 싶다.


힘든 삶을 살아내는 모두에게,
폭싹 속았수다 (수고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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