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외로움에 대해 말하고 싶을 때면, 나는 늘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나의 아버지다.
아버지는 어린 시절부터 집안의 가장이었다.
6남매의 셋째로 태어난 아버지는 초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생업 전선으로 내몰렸다.
아직 부모님의 품에서 어리광을 부릴 나이에, 아버지는 가족의 생계를 짊어졌다.
그것이 운명이라 믿으며, 묵묵히.
큰아버지는 머리가 좋았고, 집안 형편은 빠듯했다.
결국 아버지가 벌어온 돈은 형과 동생들의 학비로 고스란히 들어갔다.
아버지도 학교에 가고 싶었고, 또래 친구들과 어울려 놀고 싶었을 테지만, 어린 나이에 그런 감정들은 사치였으리라.
하지만 아버지는 포기하지 않았다.
한자와 영어, 심지어 한글까지도 독학으로 익혔고, 배움의 끈을 놓지 않았다.
내 기억 속 아버지는 강인했고 우직했다.
어머니 없이 우리를 키워내셨고, 40대 후반부터는 자신이 그토록 원했던 공부를 시작해, 시인이 되겠다는 꿈을 이루셨다.
마침내 문예운동으로 등단까지 하셨다.
그런 아버지에게 외로움이란 감정이 끼어들 틈은 없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우리 집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강인했던 아버지도, 영원할 것 같던 재정도 모두 송두리째 무너져 내렸다.
아버지는 우리가 살던 집과 가게를 정리하고 중국으로 사업을 하러 떠났다.
그때 나는 치기 어린 청춘을 탕진하고 있었다. 마약과 폭력, 유흥으로 얼룩진 삶을 살면서도,
뒤치다꺼리는 늘 아버지와 누나의 몫이었다.
무엇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던 나를 아버지는 단 한 번도 나무라지 않으셨다.
그저 묵묵히 나를 믿어주었다.
몇 년이 지나 아버지에게 연락이 왔다.
돈을 보내줄 수 있냐는 말이었다. 순간 혼란스러웠다. 중국으로 가실 때 10억 가까운 돈을 가지고 가셨던 아버지였는데,
왜 나에게 돈을 부탁하시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아무 의심 없이 돈을 보냈고, 그렇게 몇 년 동안 아버지에게서 맡아두었던 돈은 거의 다 빠져나갔다.
돈이 바닥난 후에야 아버지의 상황을 제대로 알게 됐다.
중국에서 사업은 힘들었고, 함께 사업을 했던 지인은 마약에 빠져 아버지를 외롭게 만들었다고 했다.
중국말도 생활도 잘 몰랐던 아버지에겐 매일 집과 가게를 오가는 삶이 전부였다.
모든 것이 무너졌을 때, 아버지는 생을 마감하는 것까지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때 나는 칵테일 몇 잔 만드는 법과 클럽 앞에서 사람을 끌어모으는 일밖에 할 줄 몰랐다.
내가 아버지를 책임져야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정신이 무너질 지경이었다.
그렇게 나는 또다시 나만을 생각했다.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이기적인 아들이었는지 모른다.
그때 만약 지금처럼 생각했다면, 나는 당장 아버지에게 한국으로 돌아오시라고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말을 하지 못했고, 이제 아버지는 이 세상에 안 계신다.
아버지가 떠난 뒤에야 나는 이 모든 일들이 ‘외로움’이라는 감정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외로움은 늘 가까이에 있었지만, 그 누구도 외로움이라는 이름으로 부르지 않았다.
나는 왜 아버지의 외로움을 한 번도 알아보지 못했을까.
그래서 나는 이제 ‘외로움’에 대해 쓰기로 결심했다.
이 글을 쓰면서, 누군가는 내 아버지와 나의 이야기를 통해 위로받기를 바라며.
누군가는 더 늦기 전에, 누군가의 외로움에 손 내밀어주기를 바라며.
이 글은 결국 지극히 개인적인 나의 감정과 회한의 기록일지 모른다.
하지만 한 줄의 문장이라도 당신의 가슴에 닿는다면, 그 문장은 아마도 어두운 바다 위에 작게 빛나는 등대가 되어 줄지도 모르겠다.
이제야 나는 아버지가 그토록 힘겹게 건넜던 외로움의 강을 바라본다.
그리고 그 강을 건너는 당신이, 당신 곁에 있는 누군가의 외로움을 놓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