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아주 보람 있는 하루였다. 글 쓰고 산책하고 책을 읽었다.” 1934년 8월 30일, 버지니아 울프는 이렇게 일기를 썼다.
오늘은 2023년 12월 23일, 크리스마스이브의 이브 아침이다. 퇴사 후 처음 맞이 하는 크리스마스인 것이다. 날씨는 기가 막힐 정도로 화창하고 맑지만, 영하의 기온으로 창문이 들썩거릴 정도로 매섭게 바람이 분다. 하늘은 파랗고 구름 한 점 없다. 창문으로 새어드는 햇살에 눈이 부시지만 따사롭고 감사하다. 반짝반짝 테이블 위 작은 트리만이 곧 크리스마스가 다가온다는 것을, 한 해가 저물고 새해가 다가온다는 것을 넌지시 알려준다.
아침에 깨어 일어나기 전, 머릿속 상상의 세계는 가장 자유롭고 활발하게 움직이는 것 같다. 오늘 아침잠에서 깨기 전, 나의 머릿속 상상의 세계는 황홀하기 그지없었다. 나는 누구보다 평온하고 자유로운 일상을 누비며 읽고 쓰고, 걷고, 차를 마신다. 천천히 생각에 잠겨 걷고, 호흡의 리듬에 맞춰 느긋하게 걷고,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상대로 확신에 찬 발걸음으로 앞으로 달려 나간다. 달콤한 세상에서 잠시라도 더 머물고 싶고 깨어나기 싫었다. 그 어느 때보다 자유롭고 따뜻하며 충만한 나의 에너지와 마음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자리에 누워 몇 차례 마른세수를 하고, 꼼지락꼼지락, 꿈틀꿈틀 몸을 들썩 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지개를 펴 몸과 마음에 에너지를 불어넣고 하루의 시작을 알린다. 빨갛고 달콤한 사과를 한 입 베어 물고, 보이차를 우려내어 유리숙우를 가득 채우고 보듬이 잔도 채웠다. 두 손 가득 잡히는 보듬이의 따뜻한 온기가 온몸으로 퍼진다. 잔을 들어 차향과 차훈을 호흡과 함께 느끼고, 몸을 충분히 이완하며 눈으로 들어오는 따뜻한 빛을 가만히 느껴본다. 기분 좋은 느림으로 아침을 열고 곧 책상에 앉아 글을 쓴다. 시간에 얽매이지 않고 쓰고 싶은 만큼 책상에 앉아 글을 쓴다는 것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를, 내가 꽤 잘 버텨내고 즐긴다는 것을 곧 알 수 있었다.
무거운 몸을 억지로 일으켜 샤워를 하고, 머리도 덜 말린 채, 그렁그렁 눈물을 흘리며 화장을 하고, 갑갑한 가슴조차 만성이 된 채 좀비처럼 시작했던 지난 하루가 스쳐 지나간다. 불쑥 올라오는 불편하고 힘든 감정을 호흡으로 다스리고 이내 내려놓았다. ‘그래, 많이 힘들었구나!’
해야 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 사이에서 항상 외줄 타기를 하며 갑갑함과 스트레스를 받았던 나는 지금처럼 항상 하고 싶은 일들을 상상하며 잠이 들곤 했고, 뚜렷하게 기억나진 않지만 좋은 생각과 아이디어로 잠을 깨곤 했다. 눈뜨기 싫은 아침이 되면 다람쥐 챗바퀴처럼 반복되는 지리멸렬한 하루는 나의 정갈하고 아름다운 생각을 집어삼켰고, 나는 언제 그랬냐는 듯, 습관처럼 내가 아닌 다른 이가 되어 하루를 꾸역꾸역 살아내고 있었다.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아이디어는 내 머릿속에서 태어났다 머릿속에서 금세 사라지고 말았다. 현실을 도피하듯, 원하는 삶을 꿈꾸듯 상상 속 세상에서 벌어진 일들이 현실이 되었다. 여유롭게 일어나고 글을 쓰고, 산책을 하고 책을 읽는다.
알베르 까뮈의 스승인 프랑스 철학자 장 그르니에의 섬세한 철학적 에세이 <섬>을 읽었던 것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당시에 나는 고통과 슬픔이 삶의 일부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고, 좋든 나쁘든 그 모든 순간은 피할 수 없다는 진리와 맞서 싸우고 있었다. 복잡한 머릿속을 비워내고 적절한 위로를 책으로부터 찾았지만 단 한 줄의 문장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덮어버리기 일쑤였다. 그렇게 몇 개월의 시간을 힘겹게 보내던 어느 날 우연히 펼쳐 들었던 책이 <섬>이었고, 나는 이내 책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잠시나마 슬픔과 고통을 잊을 수 있었고, 고난은 피할 수 없지만 삶의 태도와 생각은 선택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장 그르니에는 이렇게 말했다. “만인에게 감추어진 삶에는 어떤 위대함이 있다.(…) 달은 우리에게 늘 똑같은 한쪽만 보여준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의 삶 또한 그러하다. 그들의 삶의 가려진 쪽에 대해서 우리는 짐작으로 밖에 알지 못하는데 정작 단 하나 중요한 것은 그쪽이다.” 나무의 뿌리는 그 나무의 가지만큼 뻗어 나간다고 하는데, 혼자만의 고민과 성찰의 시간만큼 나는 나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고 단단해져 가고 있었는지 모른다. 혼자만의 고통과 슬픔 속에 머무는 동안 인생에 대한 현실감을 가지게 되었고, 꽤 다른 시각으로 나를 바라보는 계기가 되었다. 혼자만의 비밀스러운 삶은 자신의 참다운 모습을 발견하는데 중요한 시간인 것이다. 장 그르니에 못지않게 고독 안에서 참된 나를 만나는 삶의 자세를 탐구했던 헤르만 헤세는 <데미안>에서 이렇게 말한다. “아, 지금은 안다,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을 가는 것보다 사람이 더 싫어하는 일은 없다는 것을!(…) 그 무엇도 두려워해선 안 돼. 우리 안에는 영혼이 소망하는 그 무엇도 금지된 것으로 여겨선 안 돼. 깨어난 인간에게는 단 한 가지, 자기 자신을 탐색하고, 자기 안에서 더욱 확고해지고, 그것이 어디로 향하든 자신만의 길을 계속 더듬어 나가는 것 말고는 달리 그 어떤, 어떤, 어떤 의무도 없다.(…)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진정한 소명이란 오직 자신에게로 가는 것, 그것뿐이다.
퇴사 전, 겨우 시간 내어 즐기거나 스쳐 지나가듯 누렸던 소중한 시간들은 그 시간을 인증하는 단 한 장의 사진으로 끝나고 번잡하고 소란스러운 몸과 마음을 다스리며 내 안으로 들어가는 충분한 여유와 시간을 주지 못했다. 꿈속에서 펼쳐내던 상상 속의 이야기가 현실 속에서 살아 움직인다. 고독한 적거의 시간을 보내며 읽고, 쓰고, 걷고, 마시는 일상은 지금 내 삶의 가장 중요한 영역이 되어 가고 있고, 자유롭게 깨어 있는 삶을 살겠다는 삶의 태도를 다져가는 시간이다. 소박하지만 진지한 공백과 다정한 침묵을 즐기며 묵묵히 시간을 쌓아간다.
크리스마스를 앞둔 어느 날, ‘쉽고 빨리 읽을 수 있는 얇은 고전을 읽겠다’는 단순한 이유로 책장에서 헨리크 입센의 <인형의 집>을 꺼내 읽은 건 우연이었다. 1879년에 출간된 이 소설은 남성위주의 보수주의 문화가 팽배했던 유럽에서 사회적으로 큰 논란이 되었던 작품이다. 여성은 남성의 소유물과 다름없이 여겨지던 19세기말, 성스러운 결혼제도에서 벗어나 자신의 존재 그 자체로 인정받기를 원했던 여성의 이야기는 어떻게 받아들여졌을까? 내가 느낀 통쾌한 해방감은 자아 찾기의 담론이 행복과, 자존감, 자유라는 에너지와 결합하여 사회 전반에 흐르고 있던 폭발적 변화에 편승조차 못하는 불안정한 마음에 대한 늦은 자각에서 비롯된 것일까! 결혼과 가정을 파괴한다는 사회적 비난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인습과 타협하지 않는 ‘노라’라는 캐릭터를 탄생시킨 노르웨이 19세기 희곡작가 헨리크 입센이 나에게로 들어왔다. 35살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에드바드 뭉크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헨리크 입센은 ‘협오스러운 그림을 그린다 ‘는 대중의 혹평으로 실의에 빠져있던 뭉크에게 “적도 많겠지만, 팬도 많이 얻게 될 것이오 “라는 예술적 위로를 건네며 뭉크의 작품 활동에 힘을 실어 주었다. 삶에서도 소설에서도 과묵한 질서보다는 진화의 변화를 선택하는 노작가의 소신이 최초의 페미니즘 희곡을 탄생시켰다. 한 가정을 지키기 위해 혼자만의 비밀을 가지고 고군분투해 온 주인공 노라는 집안 형편이 나아지려는 시기에 오랫동안 숨겨온 비밀이 탄로 날 위기에 처하게 된다. “오 나의 종달새, 노라. 종달새는 깨끗한 입으로 노래해야지, 틀린 곡조로 노래하면 안 돼” 아내를 종달새라고 부르던 남편 헬메르는 아내의 상황과 마음을 헤아리기는 커녕 비밀이 들통나자 아내를 맹렬히 비난했다. 남편에게 종달새로 불리는 인형과 같은 존재 노라는 남편을 위해 모든 것을 맞추며, 천진난만하고 행복한 여성으로 보이기 위해 노력한다. 세 아이의 엄마였지만, 여전히 남편의 사랑을 받는 예쁜 아내로 철없고 해맑게 살아가는 아내이자 엄마가 그녀의 역할인 것이다. 예상 못한 갈등상황에서 협박을 받고 모든 비난을 혼자 감당해야 했던 노라는 결국 자신의 삶에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깨닫고, 집을 떠나기로 결심하게 된다.
“나는 당신의 인형 아내였어요. 친정에서 아버지의 인형 아기였던 것이나 마차가지로요. 나는 당신이 데리고 노는 게 즐겁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놀면 아이들이 즐거워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로요. 토르발 그게 우리의 결혼이었어요. 먼저 해결해야 하는 다른 과제가 있어요. 나는 나 자신부터 교육해야 해요. 내가 혼자 해야 해요. 그러니까 나는 당신을 떠날 거예요.”
22년 만에 돌아온 부산은 많은 것이 낯설다. 호시탐탐 벗어나고자 기회를 엿보고 있던 불안했던 내 청춘이 고스란히 담긴 이곳에서 읽고 쓰는 삶이 시작되었다. 여유와 투박함을 동시에 지닌 일상에서 바다와 산을 언제든지 골라잡을 수 있는 도회적인 자연 속을 걸으며 내 삶에 숭숭 구멍이 나버린 상실감을 새로운 이야기로 조금씩 채워나가고 있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단 한 번도 제대로 완성하지 못한 한 편의 글이 지금 이 순간 어렵지 않게 이루어지고 있지 않는가! 머릿속의 생각들이 사라지기 전에 다시 한번 정리하며 글을 쓰고, 생각나는 아이디어는 다이어리나 노트에 깔끔하게 메모해 둔다. 어떠한 방해도 받지 않고 온전히 나로 존재하며 글을 써 내려가다 보면, 어느새 눈에는 눈물이 고이고 가슴은 울컥한다. 얼마나 썼다 지우고 또 써내려 갈지! 어두운 안갯속 희미한 기억과 일렁이는 마음은 하나가 된다. ‘오늘은 아주 보람 있는 하루였다. 글을 쓰고 산책하고 책을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