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여름은 예측불가, 모든 것이 이상하다. 나는 여름을 좋아한다. 짧고, 느슨하며, 간편한 옷차림으로 활동은 자유롭고 기분은 좋아진다. 물기 많은 달콤한 과일과 맹렬히 쏟아지는 햇빛을 좋아하고, 데이비드 호크니의 <예술가의 초상>과 호아킨 소로야의 <해변에서의 산책>을 좋아하며, 티모시 샬라메 주연의 영화는 아직도 미루고 있지만, 섬세한 감정을 감각적인 언어로 표현한 책 ‘그해 여름’ 안드레 애치먼의 <콜미 바이 유어 네임>도 좋으며 톡톡 쏘는 시원한 맥주 한 모금도 사랑한다. 예년보다 부쩍 기온이 올라 정신이 혼미하고 어지러울 정도로 무더운 날이 계속되면서 자연스럽게 몸은 무거워지고 게을러지기 시작했다. 무더운 날씨 탓만 하기엔 불안하고 불편한 마음은 늘 존재감을 드러내며 무겁게 나를 짓누르고 있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무언가를 상실하고 세상과 단절된 기분조차 결국 마음의 고요함으로 귀결되었다. 정해진 시간에 가야 하는 곳이 없고, 하기 싫지만 해야 하는 일이 없고, 꼭 만나야 할 사람이 없다는 것은 일종의 자유와 평안이었고, 정해진 시간과 규칙의 경계를 무디게 만들었다. 무뎌진 칼날처럼 반듯한 형태를 유지하되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날이 길어지더라도 슬쩍 눈감아 기다려주는 것은 흩어진 균열을 채워줄 멈춤과 여유가 새로운 꿈을 만들고 가꾸어 나갈 동력이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무언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이러지 말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은 다시 시작하고 꿈꾼다는 또 다른 말이기도 하다.
‘으레 그렇다.’ 꼭 필요한 것이 당긴다. 불완전한 일상을 채워 주는 위안과 격려의 텍스트로 넘쳐나는 데이비드 화이트의 <위로>는 내 세계에 벌어진 틈을 찬찬히 더듬어 주었다. “위안은 극도로 힘들고 추한 순간에 우리 자신, 우리 세계, 우리 서로에 대해 아름다운 질문을 던지는 기술이다. 오랜 기다림이 인식 가등한 형태로 열매를 맺지 못했을 때, 사랑하던 사람이 사라질 때, 희망이 그려 온 것과 다른 모습으로 만들어질 때, 우리는 위안을 찾아야 한다. “ 데이비드 화이트는 해양 동물학을 전공했으며, 갈라파고스 섬, 안데스 산, 아마존 밀림, 히말라야 등 세계 곳곳을 여행하며 다양한 시와 산문을 써 왔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충분히 설명할 방법이 없다고 느껴서 시를 쓰게 되었다고 하는데, 그의 자유로운 삶에서 피어난 시 <슬픔의 우물>은 통제할 수 없는 낯선 상황에서 불안과 우울사이에 잠들어 있던 나를 일순간 깨워 건져내주었고, 멈출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손 놓고 체념해 버린 시간들이 얼마나 순식간에 휘발되어 날아가는지, 그 무의미한 시간에 내가 놓쳐버린 것이 무엇인지 웃음이 났다.
<슬픔의 우물 >
슬픔의 우물에 빠져
고요한 수면 밑 어두운 물속으로 내려가
숨조차 쉴 수 없는 곳까지
가 본 적 없는 사람은
결코 알지 못한다. 우리가 마시는
차고 깨끗한 비밀의 물이 어느 근원에서 오는지.
또한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무엇인가를 소망하는 사람들이 던진
작고 둥근 동전들이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고 있는 것을.
-데이비드 화이트-
날씨 탓만 하기엔 널뛰는 감정과 예민해진 감성은 내면에 일으킨 파동을 살피는데 여념이 없었다. 나가서 운동하는 횟수가 급격히 줄어들어 급기야 본격적인 집순이 모드를 장착하고 3주는 넉근히 방콕모드를 하다가 내 생애 최고의 몸무게를 찍었다. 퇴사를 하고 처음 맞이하는 여름을 스스로 망쳐가고 있었다. 20년간 한 직장에서 일하며 매일같이 반복했던 기나긴 시간과 압도적인 스트레스에서 처음으로 자유로워진 내가 퇴사 6개월이 지나서야 안전하게 폭발하듯 시위하고 있는 것이다. 때론 몸이 미처 마음을 따라잡지 못하는 경우가 더러 있으니까! 처음 맞이하는 자유롭고 불규칙한 시간을 불안하게 경험하는 낯선 나를 바라본다. 직장생활을 시작하면서 입에 달고 살았던 ‘나 회사 그만둘 거야’를 실행에 옮겼던 운명적인 그날, 일이 익숙해질 무렵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던 말이지만, 정작 그만둘 때는 충분한 준비와 계획에 의한 치밀한 선택이 아닌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어 ‘라는 숨 막힐 듯한 마음에서 비롯된 다소 충동적인 결정이었다.
주섬주섬 운동복을 챙겨 입고 야구캡을 눌러쓴다. 하얀 양말에 운동화를 싣고 핸드폰 플레이리스트를 열고 귀에 이어폰을 꽂고 집을 나선다. 눈물이 그렁그렁 앞을 흐린다. 늦은 밤 듣다 만, 왈칵 눈물을 쏟아낸 리처드 용재 오닐의 쇼스타코비치 왈츠 2번이 흘러나온다. 그렇게 집순이 모드에서 해방된 것은 꼭 한 달 만이다. 찜통 같은 무더위를 뚫고 밤산책은 그렇게 시작되었고, 맹렬했던 한낮의 더위는 밤이 되면 지친 듯 꼬리를 감춘 여우처럼 무겁게 내려앉았다. 짙은 어둠이 내려앉은 밤, 무거운 발걸음으로 늘 그랬듯이 몇 개의 신호를 기다려 건널목을 건너고 해운대해변으로 향했다. 1년 전 여름, 수술 한 직후 몸의 회복을 위해 본가로 내려왔었다. 지칠 대로 지친 몸과 마음은 무엇도 허락하지 않았고, 하루 타임스케줄은 아주 단순하고 단조로웠다. 해변 걷기로 시작하는 아침은 몸을 움직여 마음을 치유하는 가장 쉽고 합리적이며 과학적인 방법이었다. 아침이 되면 부리나케 운동복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갔다. 줄지어 늘어선 고층 아파트를 지나면 건물과 건물사이로 시원한 바람과 반짝반짝 윤슬과 함께 바다와 하늘이 맞닿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풍경이 눈앞에 나타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뷰스팟이다. 눈이 멀 것 같은 강렬한 햇빛을 온전히 흡수하며 하늘이 어디까지고 바다가 어디까지인지 가늠할 수 없는 수평선을 따라 걷다 보면 잠시잠깐 태양을 가려줄 구름 한 점이 그리워지기도 한다. 야구모자 챙에 의지하여 실눈을 뜨고, 시시각각 변하는 반짝반짝 윤슬을 바라보며 감탄하고, 장애물 하나 없이 마주하는 바닷바람의 기세는 몸을 가누기 어려울 때도 있지만, 가볍게 불었다 세게 불었다 갑자기 바람 한 점 없이 고요했다 밀당을 하며 송골송골 맺힌 코의 땀을 식혀준다. 바람의 리듬에 맞춰 출렁이는 파도는 부서지며 만들어 내는 한 폭의 그림과 다양한 사운드로 눈과 귀를 호강시키고 드문드문 스쳐 지나가는 비슷한 모드의 러너들은 미묘한 동질감으로 나를 응원해 준다. 강렬하지만 느슨한 해변의 질서에 박자를 맞추듯 능숙하고 경쾌한 발걸음은 어느새 속도를 높인다. 일어났다 사라지는 수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부딪치고 흔들흔들 균형을 잃은 마음을 한걸음 한걸음 내딛는 발걸음으로 발바닥과 바닥이 맞닿는 감각 속으로 스며들어 어느새 자취를 감춘다. 가장 사람이 적은 한여름 아침 한적한 해운대를 온전히 누리며 걷는 기분은 꽤 호사스럽다. 작년 여름 내내 해운대를 누비며 담아둔 바다의 풍경과 어깨와 허벅지에 남은 새하얀 살과 구리빛살의 경계선은 아직도 희미하게 남아있다.
불어난 몸무게는 발목과 무릎에 부담을 주며, 무겁게 나를 누른다. 해운대 해변의 밤은 낮에는 숨어있던 빛들이 존재를 드러내며 바다의 풍경을 새롭게 한다. 가던 발길을 잠시 멈추고 기웃거리고 싶은 매력적인 장소는 보기 힘들지만, 사라진 자리에 요즘 인기 있는 소금빵집이 들어왔고, 몇 해 비어 있던 자리는 치킨집과 맥줏집, 카페와 퓨전레스토랑이 들어서 여름의 허기를 채우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해변로를 따라 늘어선 상점과 음식점 그리고 호텔에서 흘러나오는 경쾌하고 신나는 최신 유행곡들, 한국어 불어 영어 스페인어 중국어 일어 베트남어가 뒤 썩인 다양한 언어들이 내 귀청을 때린다. 육상 장애물 경기를 방불케 하듯 요리조리 사람들을 피해 보폭을 넓혔다 좁혔다 속도를 조절하고 재빠르게 방향을 바꾸어 걷다 보면 익숙한 향수냄새, 불쾌한 땀과 알코올 냄새가 시간차를 두고 내 코를 공격한다. 시각과 청각, 후각으로 공격받으며 걷는 여름밤의 해운대는 손을 뻗으면 잡힐 듯 하늘에 박혀있는 커다랗고 밝은 달을 연신 터지는 사람들의 휴대폰 셔터 소리에 알아차릴 만큼 정신을 쏙 빼놓는다. 벨기에의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는 “나는 회화를 이용해 사유를 가시화한다.”라는 말처럼 화가보다는 철학자로 불리기를 좋아했다. 1960년대 작품 <심금>은 산과 강을 배경으로 투명하고 가녀린 유리잔 위에 옅은 바람에도 금세 날아가 버릴 것만 같은 몽실몽실한 구름 한 덩이가 놓여있다. 신비로운 작품을 보고 있으면 금세 생각이 많아지고, 평소에는 잘 출력되지 않는 느낌과 감정들이 끌려 나와 그림 보는 재미를 더한다. 정답과 오답의 경계가 무의미한 예술 세계로의 몰입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한 발짝 더 다가가게 한다. 심금의 사전적 의미는 “외부의 자극에 따라 미묘하게 움직이는 마음”이다. 하루에도 수십 번, 환경과 자극에 따라 미묘하고 복잡하게 움직이는 마음을 구름처럼 가볍게 만나게 해 준다.
불규칙하고 거친 나의 호흡과 온몸에서 흘러내리는 땀방울은 예고 없이 들이닥치는 외부의 자극으로부터 내 안으로 들어오는 유일한 통로이며, 소란스럽고 복잡한 공간 속에서 내 몸을 흐르는 들숨과 날숨의 더딘 리듬은 이내 평안과 고요를 찾아준다. 저 멀리 하늘에 걸린 달을 본다. 짙은 어둠이 내려앉은 여름밤 달빛에 고정된 시선은 이내 코끝에서 느껴지는 가벼운 ‘숨’으로 이어진다. 고층빌딩에서 쏟아져 나오는 빛줄기와 저 멀리 바다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불빛을 투영하며 일렁이는 바다를 바라본다. 나 스스로 멈춰버린 시간 속에 홀로 머물러 있는 동안 나를 제외한 모든 것이 변해버린 것만 같다. 늘 그 자리에서 빛나는 달빛은 잔잔해진 내 호흡의 리듬에 맞춰 가만히 빛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