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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정 Nov 13. 2024

그해겨울

첫눈이 오던 날


2014년 12월 1일.


그날은 내가 살아오면서 가장 설레기도 했고 떨리던 순간이며 고통도 겸비한 경이로운 날이었다.



14년 11월 마지막 주.

나는 출산 예정일을 며칠 앞두고 있었다.

예정일을 딱 맞춰 나오는 일은  거의 어려우니 그 주간 하루하루가 초긴장 상태였다.


나는 난임 판정을 받아 집에서 차로 40분가량 걸리는 불임 전문 병원에 다녔다.

여러  번의 시도 끝에 인공수정으로 아이를 임신했다.


그런데 자궁 선근증이라고 자궁벽이 두꺼워지는 질환 때문에 임신을 유지하기가 힘들고 분만까지 잘 유지하는 과정도 중요하다고 했다.


자궁 선근증이 심한 경우 유산하는 일이 거의 다반사라고 했다.

나는 심한 케이스였기 때문에 실력 좋은 선생님이 필요했다.


그렇게 담당 의사 선생님의 권유로 직접 추천받은 분만 전문 병원에 다니게 되었다.


병원은 집에서 한 시간 거리에 있지만 내가 갖고 있는 여건이 특이한 사례라 어쩔 수 없었다.


나와 비슷한 상황에  있던 다른 산모는 7개월까지 유지하다가 자궁이 파열되어 아이도 엄마도 모두 위험에 처하는 일까지 갔단 사연을 들으니 멀어도 선생님께서 추천해 주신 대로 다닐 수밖에 없었다.


그 분만병원에 속한 여러 원장님 중에 또 특별히 추천받은 선생님이 계셨는데 좀 특이하신 분이란 소문을 들었다.


궁금해서 병원에 가기 전에 인터넷에 검색을 해보니 사람들의 후기가 호불호가 매우 강했다.


처음 진료하는 날 왜 그렇게 극과 극으로 사람들의 반응이 엇갈리는지 단박에 알아챘다.


선생님은 50대 중반으로 보였다.

고등학생 아들이 있다고 했으니 부모님 뻘보다는 큰 형님 정도 되는 나이 차이였다.

보자마자 대뜸 반말로

" 자 어서 와 이쪽으로 앉아" 하시는 거다.


남편과 나는 마주 봤다.

둘 다 같은 생각을 하는 거 같았다.

'어이가 없네?'

이어서 담당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그래 네가 ㅇㅇㅇ 원장이 보낸 이은정 산모구나! 특별히 신경 써 달라고 단단히 부탁해서 기다리고 있었어. 이제부터 너를 책임지는 사람은 나야.

그 녀석이 겁주던 말은 잊어버리고 앞으로 나만 믿어. 내가 둘 다 건강하게 출산할 수 있도록 도와줄 테니 말이야."


반말하는 의사는 처음 봤다.


그런데 기분 나쁜 것도 아니고 좋은 것도 아닌데 뭔가 신뢰가 팍팍 갔다. 처음 인공수정 하던 병원 원장님이 워낙에 신뢰가 가셨던 분이고 우리 부부를 매우 걱정해 주신 분이 특별히 잘 아는 친구분이자 실력이 좋으시다고 소갤 시켜주셨으니 믿음이 갔다.


그러면서 자신감 넘치는 말투와 신뢰감 가는 당당함이 불안한 마음을 안심시켜 주었다.


그 뒤로 진료를 가면 선생님은 항상 다정하게


"은정이 왔어? 지금이 제일 행복할 때야 남편 한데 맛있는 거 많이 사달라고 하고 데이트 실컷 해둬~

나중엔 잠도 못 자고 울면서 지내는 날이 올 거야.

그때 후회 하지 말고 지금 실컷 즐겨야 돼. 아기는 건강하게 잘 커가고 있어~ 아주 가만있질 않고 발발 대니 걱정하지 마!~"

언제나 우릴 기분 좋게 맞아 주시고 안심시켜 주셨다.


그렇게 건강하고 기분 좋게 40주가 채워졌고

선생님은 자연분만을 추천하셨다.


그래서 내게 마지막 검사할 때 배가 진짜 너무 아파서 기어 올 정도 아니면 절대로 올 생각을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고 보냈다. 어설프게 아픈데 오면 다시 집으로 보낼 거라고….


여기 병원은 무슨 일이 있어도 담당 원장이 분만까지 책임진다. 의사 선생님들은 모두 병원 근처에서 지내시는 거 같았다.


11월 마지막 날 오후부터 배가 살살 아파지는 게 평소랑 달랐다. 시간 간격 상 가진통이 시작된 거 같았는데 아픈 건 심하지 않았다.


기어갈 정도는 아닌 거 같아 그냥 참고 있었다. 그런데 밤이 될수록 시간 간격이 점차 줄어들었다.


그렇게 진통이 시작되고 남편과 자정이 되어서야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으로 너무 멀쩡히 걸어 들어가는

나를 본 간호사들이 말했다. 집에 돌아가셔야 할 거 같다고..

그러나 집도 멀고 이왕 오셨으니 진통 검사는 하고 가자했다.


그런데 진통 세기가 분만준비를 할 정도라고 놀라 했다.


그렇게 나는 기어가지 않고 걸어가서 분만 대기실에 입원을 했다.  입원하고 분만 준비를 잘 마친 다음 서서히 고통의 시간이 시작됐다.


짧지만 강한 고통은 점점 나를 두려움에 떨게 했고 언제 끝날지 모르는 시간이 무서웠다.


숨 쉬는 게 힘들었다. 이러다 죽는 거 아닌가 생각도 들었다.  간호사 선생님을 수시로 불렀다. 그런데 선생님들은 나 같은 산모를 많이도 봐서 그런지 대수롭지 않아 했다.

 

남편을 부여잡고 숨을 못 쉰다 나 죽을 거 같다 온통 생 난리를 쳤다.

그 틈에 나는 잠깐식 졸기도 했다는데 코도 골았다고 했다. 믿어지지 않았다.

이렇게 아픈데 내가 코를 골았다고? 말도 안 돼. 그러는 사이 우리는 점점 지쳐갔다.


제발 수술시켜 주시면 안 돼요?? 사정을 해도 자궁문이 거의 열리고 있으니 조금만 참으라는 야속한 대답만 돌아왔다. 그 시간 원수 같은 남편은 졸음을 참기 위해 옆에 앉아서 핸드폰으로 게임을 하고 있었다.


아파서 머리채를 잡는 게 아니라 진짜 너무 어이가 없어서 머리채를 잡고 뜯고 싶었다.

나는 산소호흡기까지 코에 꽂아놓고 울고 있는데 졸리다고 게임을 하다니 이런 어이없는 남편이 어디 있나?


그러는 사이 아침 10시 30분이 되었다.

진통과 분만 준비와 각종 난리 통 속에 밤을 지새우며 겨우겨우 곧 출산을 위해 무통주사까지 맞은 상태였다. 와! 이제야 사는 거 같고 조금만 힘주면 이 모든 지옥 같은 순간이 끝나겠지 하는 순간.

갑자기 내가 수술실로 가야 한다는 거다.


내가 그동안 숨을 잘 쉬지 못해서 아기에게 산소가 부족해 위험한 상황이라 긴급하게 수술해야 한다고….

무통 주사까지 다 맞은 상태로 힘줄 연습만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수술이라니….

밤새 진통이랑 씨름한 게 나는 너무 억울했다.


심지어 어제저녁밥 먹은 게 전부이고 나는 뱃속도 다 비워놔서 배가 너무 고픈데 지금 수술하면

낼 까지 굶어야 하지 않나....


어쩔 수 없이 수술실에 들어간 나는 옆에 계신 마취 선생님께 말씀드렸다.

하반신 마취 말고 전신마취 해달고 눈뜨고는 무서워서 수술 못 한다고 말씀드렸다. 선생님은 알았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고 나는 언제 잠드나 기다리고 있었다.


갑자기 밑에서 원장 선생님이 물어보신다.


"은정이 아프니? 은정이 아파? 안 아프지? 괜찮지?"


하는 순간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고 못생긴 아기가 내 얼굴 바로 앞에 다가왔다.


원장님이 괜찮지 하고 물어보신 이유는 그때 내 배가 갈라지고 애기가 나오고 있던 순간이었다.

나는 분명 눈뜨고 수술 못한다고 말씀드렸는데... 걱정하지 말라시더니....


간호사 선생님께서 내 앞에 쭈굴쭈굴 못생긴 아기에게 첫인사 나누라고 하신다.

그 정신없는 틈에 나는  마취 선생님 배신자란 생각뿐 아기고 뭐고 첫인사 나눌 정신이 없었다.


"별님아, 안녕?"

겨우 태명을 불러 주며 안녕? 인사한마디 건넸다.

그리곤 더는 할 말이 없어요…. 그게 다였다. 별님이와 첫 만남 첫인사는..


그리고 눈을 뜨니 회복실이었다.


게임만 하던 야속한 남편은 내가 깨어나니 눈물을 그렁거리며 고생했다고 다독여 줬다.


마취 기운도 남아있던 터라 아픈 게 당장은 없어 살 거 같았고 눈물을 그렁거리는 남편이 내 곁에 있으니

야속함은 사라지고 우리가 해냈다는 생각에 기쁨의 눈물이 쏟아졌다.


12월 1일 11시 4분 나는 그렇게 엄마가 되었다.


나는 마취에서 깨고 생각했다.

나는 이제 어른이다.  왠지 뭔가 대단히 어려운 일을 이겨낸 듯한 기분에 어른이 된 거 같았다.


아무튼 나는 그렇게 건강하게 무사히 출산을 마쳤고 아들을 품에 안았다. 난임 병원의 원장님과 분만병원의 괴짜 같지만 츤데레 같은 원장님 덕분에 임신 기간 내내 불안하지 않고 평안한 마음으로 출산하게 된


그해 겨울


14년 12월 1일은 내 생에 잊지 못할 날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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