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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영이 엄마의 서글픈 팔자

때로는 살아있는 것조차도 용기가 될 때가 있다.

by 이은정 Nov 25.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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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엄마는 1955년생.

이름은 김순자.

가난한 집 다섯 남매 중 막내딸로 태어났다.
 


막내딸이라 귀하게 사랑만 받고 자랐을 거 같지만

먹고살 걱정 많은 가난한 집에 단지 입하나 늘어났을 뿐이었다.
 
 

엄마에겐 바로 위에 언니가 엄마를 가장 예뻐해 준 유일한 친구이자 보호자 같은 존재였다.



그런 언니가 가난한 살림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자 서울로 돈을 벌러 나갔다.

그때 엄마는 혼자였다.



언니는 몇 년 뒤 우울증을 앓고 다시 고향으로 내려왔다. 엄마는 그녀와 함께 하게 되어서 내심 좋았다.

 
 

언니는 서울에서 만난 사랑했던 남자를 헌신적으로 뒷바라지를 하다가 버림을 받았다고 한다. 어리고 여린 마음에 커다란 상처를 입은 언니는 그렇게 다시 고향으로 내려온 것이다.

 
 

고향에 온 며칠 뒤 삶의 의지를 잃어버렸던 언니는 엄마와 단둘이 지내던 작은방 안에서 약을 먹고 고통에 몸부림치다 죽어갔다.



그때 엄마의 나이가 15살쯤이었다고 했다.

그날은 엄마에게 첫 죽음이라는 충격과 슬픔을 안겨준 날이었다.
 
 

첫사랑도 아닌 첫 죽음 이라니.



그렇게 언니의 죽음을 시작으로 엄마 곁에 사랑하는 가족들의 연이은 죽음이 이어졌다.

이는 계속해서 엄마의 팔자를 서글프게 만들어 갔다.



유일하게 잘 따랐고 보호자 같았던 언니가 죽고 엄마가 20살 되던 해 부모님 마저 갑자기 사고로 돌아가셨다. 그날이 엄마가 겪은 두 번째 죽음이었다.

 
 

엄마는 어릴 적에 먹을 게 부족해 배가 고파 먹을 걸 찾아 울기라도 하면 늘 언니 오빠들 한 테 보채지 말라고 혼이 나거나 힘이 센 오빠한테는 자주 맞았다.

 
 

그럴 때마다 외할머니는 어린 막내딸을 위해 쌀 항아리 같은 곳에 삶은 감자 반쪽을 숨겨 두었다가 몰래 챙겨 주곤 했다.



그때 언니 오빠들에게 받았던 크고 작은 질투 섞인 행동들이 상처가 되어 엄마의 자격지심이 됐고 작은 오해들이 쌓여 결국 가족과 인연을 끊고 홀로 세상에 나온다.

 
 

배움도 짧고 기댈 곳이 필요했던 엄마는 서둘러 결혼을 했다. 첫 번째 결혼 생활 중 아들을 셋이나 낳았다.



그 아이들은 매번 이유도 모른 채 세상을 떠났다.

나중에 내가 커서 만난 무당들은 같은 말을 했다.



네 년과 엄마는 무당 팔자다.

엄마가 무당이 됐어야 네 년도 무사한데 지금은

둘 다 팔자가 사납다


 
젊은 엄마는 어린 자녀들이 연이어 세상을 떠나자 본인 탓으로 돌리기에 바빴다. 죄책감이 쌓이다 무너졌다.

그렇게 도망치듯 이혼했다.



이혼 후 혼자 세상을 살아보려 애썼으나 세상은 무서웠다. 누군가 기댈 사람이 필요했고 친구가 필요했다.

 
 

어느 날 작고 약한 엄마 곁에 따뜻하고 자상했던 남자가 다가왔다. 그렇게 엄마는 나를 낳아준 아빠를 만나게 되었다. 엄마는 다시 한번 행복을 꿈꾸며 재혼했고 내가 태어났다.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아들만 셋을 잃은 엄마는 내가 태어날 때도 아기가 죽게 될까 두려웠지만 출산을 도와주시던 산파 할머니가 딸아이가 나왔다고 말해 주고서야 이 아이는 살겠지 하는 막연한 희망이 생겼다고 했다.

 
 

엄마의 확신대로 나는 건강하게 자랐고 부모님은 바로 연년생 남동생을 낳았다.

 
 

그러나 동생이 세상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아빠는 일하던 현장에서 사고로 바로 세상을 떠났다.

 
 


그간의 엄마를 스쳐 지나간 수많은 죽음의 충격들이 완충 작용을 했을까? 남아있는 어린 두 아이를 홀로 키워야 하는 두려움이 갑자기 세상을 떠난 남편의 죽음마저 슬퍼할 겨를도 주지 않았다.



당장에 어린아이들을 둘러업고 먹고살아야 하는 막막 함에 엄마도 남편을 따라 아이들을 데리고 세상을 떠나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했다.

 
 

엄마는 어린 남매를 데리고 소주 몇 병을 사서 여관으로 향했다.

셋 다 죽어야 끝나는 날. 죽을 생각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간 여관에서 엄마의 마음은 어땠을까……


 
엄마의 무거웠을 발걸음을 상상하면 같은 여자이자 현재 두 아이의 엄마인 나는 공감 하지도 상상하지도 못할 두려움이다. 그렇게 죽어야 끝이 날 것 같은 그 박복한 엄마의 삶은 죽을 의지마저 사치였다.



어린 두 생명이 자신에게 모든 걸 의지한 채 매달려 울어 대던 눈물은 엄마에게 다시 살 용기를 주었다.



엄마는 본인이 살아내기 위해 또 자신의 두 아이를 살리기 위해 주변의 조언으로 어린 아들을 다른 집으로 입양 보냈다.

 
 

다시는 아들을 찾아오지 않겠다는 굳은 약속을 하고 그곳에서 건강히 잘 지내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아들을 떠나보냈고 흐르는 눈물을 감추며 어린 나를 데리고 살던 동네를 떠난다.



낯선 곳에서 엄마는 나를 데리고 하루하루 겨우 버티고 있었다. 어린 나를 등에 업고 식당에서 일을 했는데 내가 등 뒤에서 울까 바 몸이 힘든 것보다 마음을 졸이느라 하루가 더 고단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내가 등에 업히지 않아도 될 만큼 컸을 때 나는 식당 앞 골목에서 엄마를 하루 종일 기다렸다. 유치원도 다녀보지 못한 나의 하루는 엄마를 기다리는 일이 제일 재미있는 시간이었다.

 
 

여자 혼자 어린 딸을 키우며 살던 고단한 인생살이가 늘 엄마를 외롭고 지치게 했다.



엄마가 일하는 식당에 자주 왔던 내게 친절한 아저씨가 있었는데 그 얼굴이 낯이 익어 갈 때쯤 어느새 나보다 3살 어린 동생을 데리고 내 새아버지가 되었다.

 
 

엄마의 재혼은 그녀가 자신의 박복한 삶을 잊기라도 할까 여전히 가난했고 고단했으며 불행했다.

 
 

엄마 아빠는 낡은 1톤 트럭으로 파지와 고물을 줍고 다녔다. 고된 일을 마치면 두 분은 항상 술을 먹고 집에 늦게 돌아왔다.

 
 

행복한 삶을 꿈꾸며 나를 데리고 기댈 곳이 필요했던 엄마에게 새아빠는 여전히 가난하고 힘없는 존재였다.

 
 

새아빠는 늘 술에 취해 살았고 그로 인해 병을 얻어 5-6년의 시간 동안 병원에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다 결국 세상을 떠났다.
 
 

나는 지겹도록 병원을 오가며 엄마를 고생시키는 아빠가 빨리 돌아가시라고 기도했다. 그래야 엄마도 나도 숨이 트일 것만 같았다.



그렇게 새아빠가 떠나고 우리에게 남은 건 한 겹 더 쌓인 엄마의 박복하고 서글픈 팔자와 내게도 대물림된 고된 팔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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