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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lish Oct 02. 2024

1장. 구름이 둥실둥실 피어오를 때

구름을 향해 걷다.

해 질 녘 구름이 이끄는 대로 하늘을 따라가다 보면 토끼굴이나 블랙홀을 지나 어느덧 눈앞에서 여름과 겨울처럼 정반대의 하늘이 오른쪽과 왼쪽에서 서로 다른 이야기로 속삭인다. 미지의 우주를 머릿속으로 헤집고 다니거나 서로 다른 차원의 시간을 헤매다가 자신만의 이야기를 찾아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붉은 하늘이 되려 뒤를 쫓아온다. 어둠이 붉은 구름을 완전히 삼킬 때까지.


흘러가는 구름사이로 수많은 이야기를 보고 아름다운 망상을 많이 하는 사람은 예술적인 안목도 그렇지만 아이러니하게 현실감 또한 상승한다. 인간의 삶은 각자그릇만큼 스스로 그려보범위 안에서 뻗어 나갈 뿐이기 때문이다. 가끔 우주의 기운을 받은 어느 별에서 예상치 못한 인연이 튀어나오기도 하지만 그것도 예정된 페이지의 등장인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현실감이 떨어지진 않지만 지혜가 커가는 만큼 운명론적인 믿음에 기대게 된다. 모든 지혜로운 철학자와 작가, 예술가들이 그렇게 흘러가다 사라져 갔듯이.


하루에도 마음이 수 백번씩 뭉쳤다 헤쳤다 실타래처럼 엉켰다 풀렸다 하고 있다. 정처 없달까. 아침에는 시원했는데 점심때가 돼서는 무더위와 끈적한 습기에 그늘과 시원한 음식을 찾게 하는 한낮의 여름, 잔뜩 지뿌린 얼굴로 회색으로 일렁이다가도 시원한 바람으로 풀어지곤 한다. 장마철 아침에 창문을 열고 새로 태어난 공기를 들이마시며 바라본 하늘에 또다시 피어난 구름이 하얗게 뭉게이면 다시 구름을 따라나선다. 까맣고 연 구름들이 엉켜 시원한 바람을 만들어내면 폭풍의 언덕을 내려가듯 길을 걷는다. 화려한 구름의 움직임을 쫓아서 캔버스 같은 하늘의 예술질에 선망하듯 눈을 떼지 못하고 목을 추켜 올리며 딱딱하게 굳어가는 목덜미에 새로운 각도를 세워본다.

이 구름에 대한 선망이 어디서 시작됐을까? 또는 이루어졌을까?

아마도 수없이 오갔던 그 길일까..

너무나 많이 오가면서도 시작도 끝도 알 수 없었던 나른한 오후의 그 길.

안개를 헤치고 가듯 미지의 세계를 꿈꿨던 그 길.

많은 현실에 대한 큰 그림과 작은 그림이 하늘이라는 캔버스에 물들었던 그 길에서 나의 망상도 번뇌도 구름처럼 피어나고 흩어졌으리라.


모든 이야기의 시작


이 이야기는 한약방을 하면서 나름 구태하지 않고 진보적인 편이었던 아버지가 자손이 귀한 집안에서 딸을 연달아 둔 후에야 아들을 보고 직접 밤나무를 심어 밤산, 사과밭을 일구며 살아 온 이야기, 어머니의 솜씨있는 음식과 함께 성장한 가족들의 희노애락의 서사이다. 젊어서 다친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아버지는 침을 놓고 약을 달이며 오갈 데 없는 이들을 집으로 데려와 집은 늘 북적였고 일꾼들 밥해 먹여가며 밤산, 과수원을 도맡아 홀로 전전긍긍했던 어머니의 이야기와 한약방에서 어린시절을 보낸 후에 도시로 떠나 살아간 아이들의 이야기이다.


아버지는 침을 잘 놓아 아이 못 낳는 여인까지 고치고 길거리를 헤매는 어려운 이들을 집에 거하게 하기도 하여 주위 백리의 인심을 얻고는 있었으나 정작 자신의 꿈은 접고 사는 사람이었다. 담배는 한 번도  하지 않았지만 술은 꽤나 좋아해서 저 너머 동네 지인들과 하루가 멀다하고 거하게 한잔을 걸치고는 해 질녘 어수룩한 동구밖에서부터 딸들 이름을 하나씩 돌아가며 부르곤 했다. 그럴 때면 평소의 엄한 얼굴과는 다르게 얼굴 가득 미소를 띠고 개구리며 메뚜기를 손바닥에 감추고는 장난을 치기도 하였다. 본인이 품은 뜻을 펴지 못하고 시골 한약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데 대한 자조와 회한이 장난이라는 해학으로 풀어지는 중이었다. 저너머 지인들과 즐기지도 않는 소소한 내기를 놀이삼아  때면 지는 법이 없어 돈을 따도 다시 나눠주고는 막걸리나 거나하게 마시고 돌아오는 길이다. 

아버지는 어릴 적 나와 남동생을 앉혀놓고 한자를 가르치기 시작했었는데 평소에 엄했던 아버지와 다른 모습으로 귀하디 귀한 아들보다 여럿 중의 하나인 내가 조금 잘하면 아낌없는 칭찬을 해주셔서 나를 놀라게 하였다. 그 시절 다니던 초등학교 교장선생님도 아버지한테 물어보고 배우러 우리 집에 방문할 만큼 아버지는 한자에 조예가 깊고 글도 꽤 많이 쓰셨으나 어쩐 일인지 그 기록들이 지금은 오리무중이라 아쉽기만 하다. 한의학을 공부하고 한학을 통달하신지라 사주니 명리학 비슷한 쪽으로도 밝으셨는데 남들에게는 말하지 않은 딸들의 운명과 평소 술을 많이 하셔서인지 추운 겨울날 갑자기 심장에 이상이 생겨 돌아가시는 것을 당신은 이미 알고 계셨을지 나중에 사람들은 궁금해하기도 하였다.


아버지의 화난 모습은 사실 아주 어릴 때 몇 번의 기억으로 어느 누구도 아버지를 거스럴수도 이길수도 없을뿐더러 아버지는 하늘 아래 세상 누구보다 무섭고 위엄있으면서도 모든걸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어벤져스나 토르와도 같은 그런 태양이었다. 사실 남들에게는 아버지는 허준과도 같이 사람을 살리고 사람을 위하는 침으로 아이 못 낳는 아낙네를 고쳐주기도 한 유능한 사람이었고 우리집 사랑방 한의원은 늘 침을 맞으러 오는 사람들과 주렁주렁 걸려있는 한약재들과 약재들로 들어찬 약장 서랍과 가끔 겨울밤 더글 더글 모여서 깔깔대며 그 시절 모든 놀이들을 시전하는 자매들로 붐비고 유쾌했다. 그 외 아랫방은 몇몇의 머슴들과 오갈데 없는 사람들을 머물게 한 아버지의 인정에 신세지는 사람들로 약간은 낯설게 따뜻하고 번잡했다. 어느날은 아주 착하고 정겨운 언니인지 이모인지 모를 낯선 이와 혼자 가던 비밀스런 언덕이나 논길을 가기도 하며 갑작스럽지만 인간적이고도 따뜻한 우정을 경험하기도 했다. 지금도 가끔 그립다.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어느날 갑자기 떠나버린 그녀가 이렇게 그리워 질 일인가. 나이가 조금 더 많던 딸부잣집 윗 것들은 조금 더 구체적으로 알고 있으리라. 이 가슴 따뜻해지는 기억의 실체를..     

학교가 끝나고 친구들과 노을이 내려앉을 때까지 하늘을 가로지르며 지평선에 닿을 듯 신나게  그네를 타다가 저녁을 해놓고 기다리고 있을 가족들 생각에 학교 앞이 집이었던 친구들 부르는 소리에 복작대던 우리는 순식간에 각자의 집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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