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욕탕에 들른 후 서점하는 고모네에서 마음껏 책을 골라 읽는 것도 그 시절의 낙이었다. 사랑채 앞 대문 옆에 붙어있는 정자처럼 생긴 들청에서 여름날 내내 뒹굴며 책을 읽었고 읽다가 아버지가 달여낸 쓴 약을 억지로 마시고 토했던 기억도 있다. 많은 딸 중 젖을 먹지 못하고 바로 아래 남동생이어서 그런지 아버지는 은호에게 눈에 보이지 않는 애틋함이 있었던 모양이다. 여름마다 큰 닭을 큰 삼과 달여내어 은호에게만 주기도 하고 한약은 철마다 달여 먹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린 마음에 그때는 그것이 너무나 싫었던 것이 아쉽다. 지금은 없어서 못 먹는데.. 4학년쯤이었나 초등학교를 다니던 어느 날에는 손을 잡고 도시에 나가 큰 병원에서 정밀검사도 받게 하였다. 별 탈 없이 멀쩡한 걸 확인한 후에 환한 얼굴로 돌아오는 길 이웃마을 지인과 정겹게 술 한잔 하시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아버지는 스스로 훌륭한 한의의 기술을 가지고도 불안했던 모양이다.
기차를 타고 지나가는 길을 바라보다가 언젠가 아버지와 나섰던 어느 하루의 외출을 떠올리게 되었다.
어린 시절 흔치 않게 장거리 나들이를 하게 될 때면 만화경처럼 순식간에 지나가며 바뀌는 풍경들을 보면서 아득한 먼 그리움이랄까 낯선 곳으로의 여행이 주는 미지에의 동경으로 마음이 부풀어 오르곤 했다.
그날도 어김없이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알지 못하는 장소와 사람들에 대한 상상의 나래를 펴며 속으로 바쁜 시간을 보내면서 건강검진이라는 꽤 먼 진주로의 외출을 나서게 되었다. 그때로서는 그나마 큰 도시였던 진주로의 입성과 동시에 지독한 매연과 경적소리, 멀미가 날 것 같은 온갖 음식냄새들.. 감각을 두드리는 도시가 주는 곤혹스러운 인상에 정신이 혼미했더랬다. 발걸음을 내딛는 순간 아득한 현기증이 느껴지는 듯했다.
딸들을 줄줄이 나은 어머니에게 아버지는 한약을 지어서 먹여 가며 기어이 아들을 보고야 말았는데 바로 은호가 터를 잘 팔아서 남동생을 볼 수 있었다는 덕담과 함께 은호는 집에서 유일하게 젖을 못 먹고 컸다는 이유로 여름마다 책을 읽던 들청에서 아버지가 은호를 위해지어 주신 쓰디쓴 한약을 매번 불려 내려와 마시고 돌아가야 했던 것이다. 써서 먹다가 토하기도 여러 번, 비위가 약했던 은호에게는 고역이 아닐 수 없는 경험이었다. 그것도 모자라 아버지는 어느 가을날 은호를 앞세우고 생전 처음 건강검진이라는 것을 단행한 거였다.
Brunch Book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