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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lish Oct 02. 2024

어린 은호

길 위에서 자라난다.

부정


아버지의 화난 모습을 실제로 본 적은 없었지만 누구도 아버지를 거스럴수 없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아버지는 하늘 아래 가장 무섭고 위엄있으면서도 모든걸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어벤져스나 토르와도 같은 그런 존재였다. 남들에게는 허준과도 같이 사람을 살리고 사람을 위하는 의원으로 못 고치는 병이 없었고 우리집 사랑방은 늘 침을 맞으러 오는 사람들과 주렁주렁 걸려있는 한약재들과 그것들이 들어찬 약장 서랍으로 언제나 붐비고 비좁았다.그 외 아랫방은 몇몇의 머슴들과 오갈데 없는 사람들을 머물게 한 아버지의 인정에 신세지는 사람들로 약간은 낯설게 따뜻하고 번잡했다. 


학교를 나설 때쯤 갑자기 쏟아지는 비를 보며 왜 우리 어머니는 다른 친구들처럼 우산을 갖다 주지 않으실까 궁금했던 딸부잣집 서열이 낮은 아이는 위 서열의 언니들을 키우느라 지친 어머니의 마음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햇볕에 달아오른 공기를 낯설고 차가운 빗줄기가 식혀주는 여름날, 우산은 가져다줄 수 없었지만 빗 속의 자식을 먹일 칼국수를 준비해 놓고 수건으로 몸을 닦아주며 맞아주던 기억이 그 위에 얹혀 오래된 사진처럼 남아있다.    


비가 오던 또 다른 어느 날, 우산을 잘못 들다가 친구 눈을 다치게 한 일이 있었는데 선생님이 부모님께 연락하는 것을 보고 꾸중들을 일에 겁먹고 숨죽이고 있었다. 아버지는 친구의 일을 처리하시고는 같이 집으로 돌아가면서 아무말도 하지 않으셨다. 파랗게 질린 아이를 혼내지 않고 조용히 걷기만 했다. 그 상황이 지금까지 잊히지 않는 것은 그때의 침묵에서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따뜻한 사랑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자식들이 기억하는 아버지의 사랑은 이런 식이었다. 식구들 중에서 누구도 아버지의 말을 거역할 엄두를 내는 사람은 없었다. 딸들을 줄줄이 둔 아버지가 딸들을 안전하게 지키는 방법은 위험에 노출되지 않도록 엄하게 통제하는 것이었다. 그나마 맏이와 둘째는 아버지와 여행도 가고 나름 남들처럼 즐거운 추억을 만들어 보기도 했다고 들었지만 아래 동생들은 뭔가 하고 싶은 일이 있어도 아버지의 눈을 피해서 몰래하기 바빴다. 친구집에 놀러 가거나 냇가에 멱을 감으러 가는 친구들을 쫓아가는 것도 허락되지 않아서 두세 번 허락받지 않고 몰래 간 것이 다이다. 그나마 소가 있어 소먹이를 핑계로 언니들은 하고 싶은 일들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좀 더 많아서 들로 산으로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었다.


이후에도 아버지에게서 의외의 따스함을 느낀 적이 있다. 미술 시간에 붓글씨를 한다고 붓과 벼루 등을 가져오라 하여 아버지가 내어주신 비싸고 커다란 것을 가져간 적이 있는데 정확한 과정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 소중한 벼루의 한 모퉁이를 깨어 먹고 말았다. 이번에도 아이는 잔뜩 겁먹고 풀이 죽은 채로 깨진 벼루를 들고 아버지께 나아가서 말씀을 드렸는데 아버지는 생각지도 못했던 한마디로 아이를 놀라게 하셨다. "내가 잘못했구나. 네 잘못이 아니다. 작은 걸 주었어야 했는데..." 그것이 눈물 나게 감사했던 그런 아버지였다.



풍경

그 시절 시골치고는 꽤 넓은 한옥집 마당에는 밤송이가 산처럼 쌓여 추운 겨울날을 위한 장작처럼 불쏘시개 가 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왼쪽으로 본채를 지나면 아버지가 약을 짓고 보관하는 각종 한약재가 걸려있고 약재들을 보관하는 작은 서랍이 줄줄이 달려있는 큰 약장이 있는 약방이 있었다.
그 방은 아버지가 약을 짓지 않고 출타를 하시거나 환자가 없을 때면 딸들이 이웃의 사촌들과  안 가득 모여 앉아  실뜨기, 쎄쎄쎄를 하거나 다리를 펴고 돌아가며 숫자를 세면서 그 시절 많이 하던 노래를 부르고 그 시절 많이 하던 놀이를 하거나 온갖 즐거운 게임을 하는 아지트가 되어 주었다. 본채에서 떨어져 있어 독립적이기도 했거니와 차곡차곡 들어앉으면 작은 방이 가득 차 아이들은 크게 웃고 떠들며 정겨운 시간을 보냈다. 그 방에서 깔깔대며 놀던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어디로 갔을까..
요즘 전통놀이를 다시 구성하는 모임들이 있는데 언젠가는 꼭 이 놀이들을 다시 한번 즐겨보리라. 아마도 요즘 아이들보다 어른 사람들이 더 많이 참가할 테지..

친구들과 들로 산으로 바쁜 언니들 뒤를 따라다니며 같이 가자고 울던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관례적으로 이런 자리는 잘 참석하지 않는 아버지는 없고 어머니만 홀로 가슴에 손수건을 달아주었고 이미 고학년이었던 언니들이 가끔 보러 올 뿐이었다. 1.2학년 때 아이는 학교생활에 금방 적응하지 못했고 정말 아무것도 몰랐다. 선생님의 얘기를 몇 번이나 곱씹어야 했고 받아쓰기, 숙제 등도 잘 이해하지 못했다. 맨 뒤에 앉아서 진짜로 잘 들리지 않았기도 했고 새로운 환경이 낯설고 모든 것이 안개처럼 흐릿하기만 했다. 준비물도 못 받아 적던 아이를 위해 고학년이었던 언니가 저학년 교실로 출동해서 대신 적어주기 일쑤였다. 그런 시간이 한 일 년, 이년 계속되었다. 그렇게 일이 년 시골 학교 운동장에서 친구들과도 뛰어놀고 적응도 하게 되자 정신이 좀 드는 듯했다. 성장하는 시기에 많이 뛰어놀아야 뇌가 발달한다고 하는데 아이몸소 경험으로 그것이 정말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운동장에서 오징어게임을 비롯해 공기놀이, 고무줄 뛰기, 그네 타기 등 놀이에도 트렌드가 있어서 때때마다 계절마다 다른 놀이를 하며 놀이기술의 연마와 함께 몸도 마음도 자라나고 있었다. 길지도 않은 쉬는 시간 10분 동안에도 운동장에는 온갖 놀이의 무대가 만들어지고 지워졌다 다시 펼쳐지기를 멈추지 않았다. 학교가 끝나면 나머지공부처럼 운동장 곳곳에서 해 질 녘까지 아쉬웠던 놀이가 계속되었고 아이의 공기실력은 점점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했으며 그네를 타고 지금은 나이가 들어 무서워서 못 타는 높이까지 바람을 가르며 날아올랐다. 방과 후면 동네에서 다시 만난 친구들은 집집마다 몰려다니며 전쟁놀이를 했고 겨울이면 논 위에서 썰매를 탔다. 방학이면 아침부터 동네 젤 달보이는 곳에서 동네 아래를 향해 자치기를 하며 실력을 연마했던 것이다. 이 이야기를 이렇게 길게 하는 이유는 아이의 지능과 감성이 이런 활동과 시간으로 구성되고 성장하였기 때문이다. 이 학원에서 저 학원으로 돌아야 그나마 친구를 만날 수 있는 지금의 아이들은 누리지 못하는 좋은 시절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아이의 이름은 은호.


 4학년 때의 은호의 뇌는 드디어 완성이 되었는지 누구보다도 빠른 계산력과 논리적 사유를 보여 주었고 그것을 알아보신 담임선생님과 둘이서 문답식 수업을 하기 일쑤였다. 그때의 친구들한테는 미안하지만 친구들의 속도는 너무 느렸고 아이의 머릿속에는 논리적 알고리즘과 탐구력이 불꽃 저럼 피어나고 있었다. 선생님과의 소크라테스식 문답 수업이 끝나면 선생님은 교무실에 업무를 하러 가시고 은호에게 친구들의 공부를 맡기곤 하셨다. 은호는 자기 스스로 지능적 약자였던 시절이 있어선지 나름 친구들이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 주고 배려해 주는 마음있어서 친구들이 잘 따라 쉬는 시간이면 선생님놀이나 다 같이 노래 부르기로 이어지곤 했다. 은호 호기심이 많고 탐구하기를 좋아해서 앞에 앉아 있던 대화가 잘 통하는 친구의 옷을 하도 잡아당겨서 목 뒤가 늘어났던 것이 기억난다.  영특했던 시절이었다.


드디어 소를 먹이러 갈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을 때 하필이면 소를 팔아버려  은호는 들판의 꽃이름도 풀이름도 언니들만큼 알지 못했다. 친구들이 부모님을 돕느라 놀 수 없을 때는 대문 옆에 있는 들창에 앉아 집에 있는 책들을 모조리 찾아 읽곤 했다. 어릴 적 젖을 먹지 못하고 큰 탓으로 아버지는 여름마다 들창에 있는 은호를 불러 약을 달인 것을 먹이곤 하셨다. 그때의 은호는 비위가 약해서 토하고 먹어내지 못했지만 아버지는 필요하다고 생각했는지 다 마실 때까지 다시 내밀곤 했다. 지금으로서는 그 약이 보약인지 청명탕인지 알지 못한다.

아버지는 다른 집처럼 조금이나마 용돈을 주지는 않았었는데 딸부잣집 형편도 형편이었지만 안 좋은 일에 얽히지 않게 하려는 아버지의 조처일 수도 있다. 돈은 늘 문제가 따라다니는 근원이라는 걸 아셨을 테니까.
어느 날 호주머니에 그나마 어디서 났는지 귀하게 모셔 두었던 동전이 없어져서 아버지께 말씀드렸더니 예상치 못하게 언니들을 다 소집해서 앉혀놓고 물어보셨다. 분위기는 싸늘하였고 겁을 먹은 언니 중 하나가 자수를 하자 회초리를 들어 종아리를 치시는 게 아닌가. 의도치 않은 전개에 적잖이 당황했지만 그때는 내가 르는 아버지의 이유가 있었던 듯하다. 나는 되려 언니에게 너무 미안해서 사과를 하고 싶었지만 어떻게 해야 할 지를 몰랐다. 똑똑하고 야무지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언니였기 때문이다.

3학년인가 4학년즈음 학교를 마치고 돌아가는 하교길에는 늘 지나 다니는 문방구가 있었다. 친구들은 쉬는 시간에도 참새가 방앗간 들르듯이 수시로 가서는 인기 있는 불량 하지만 맛있는 것들을 사곤 했다. 아폴로 같은 것은 줄줄이 나누어주기도 하고 어떤 것은 아껴두었다 혼자먹기도 하였다. 당시 용돈이라곤 없던 나로서는 이런 풍경들이 부럽기도 하고 낯설기도 하였다. 우리 집은 늘 집에서 끼니를 먹어야 하는 암묵적인 규제가 있어서 친구들 집에 가서 먹는 것도 공식적으로는 허용되지 않았다. 어려운 시골 살림에 민폐가 될까 봐 그랬으리라. 하지만 군것질의 유혹은 강했고 한여름 하굣길 신제품으로 나온 부라보콘과 한겨울 따끈한 어묵과 어묵국물에 대한 열망은 점점 커져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언니의 남자친구라며 훤칠한 대학생오빠가 나타나서 친구들과 먹고 싶은 것 다 고르라는 것이 아닌가. 이게 웬 떡인가. 요즘 아이들은 필히 개꿀이라고 했으리라. 겨울이라 어묵도 원 없이 먹고 먹고 싶던 과자들 풍선이랑 문방구 인기품목을 휩쓸고 돌아왔던 기억이 난다. 그 오빠와 결혼할 줄 알았는데 언니는 그러지 못했고 지금은 고생 끝에 아버지 못지않은 교육열로 아들 딸 잘 되어서 살고 있다.
요즘 그때 그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세트장 같은 마을을 조성해 놓고 파는 그런 레트로 과자들이 처음 나온 시기였던 것 같다. 내가 구세대와 신세대 사이에 있는 낀대이고 결국은 옛날사람임을 인증하는 이야기이기도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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