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서머싯 몸 <면도날>을 읽고...
1944년에 이 작품을 발표했고, 1874년에 작가가 태어났으니... 그리고 책 속에서 1차 세계대전과 1929년 경제대공황의 언급이 있던 걸로 봐서 최소한 10여년 전의 기억을 더듬으며 쓰고있는 작가 '서머싯 몸'을 그려본다. 530여 페이지로 담겨있는 것을 보면, 그다지 짧은 소설은 아니지만, 두껍다고 부담이 있는 책은 아니다. 이미, 그의 작품 <달과 6펜스>를 접해봐서 그런지, <면도날>이라는 책 제목 -책 내용에서는 전혀 언급이 없는- 또한 특이하지 않게 그럴 것이다는 짐작을 확인시켜 주었다.
책을 덮고선, 바로 책의 소표지에 담긴, 단 한번 언급된 '면도날'의 문장을 다시 읽어본다.
"면도날의 날카로운 칼날을 넘어서기는 어렵나니. 그러므로 현자가 이르노니, 구원으로 가는 길 역시 어려우니라." - 카타 우파니샤드
그러고는, youtube에서 "The Razor's Edge(1984)"의 짧은 영화 trailer를 본다. 그리고 떠오르는 생각을 바로 이어서, 인간문화재인 '작두타는 무당'의 영상을 찾아본다. 우리가 알고 있는 현실의 '작두'가 있는 반면, '아무런 상처없이 얼굴에, 팔에, 혀에 그어 보이고, 그 위에 올라 걷는 무당'이 있는 상황을 본다. 물론, 샤머니즘 적인 것이지만, 인간의 상식과 과학으로는 해석하기 곤란한 부분이다. 더불어 <달과 6펜스>에서 '고갱'을 대신했던 주인공 '스트릭랜드'의 모습을 떠올린다. 현실의 삶이라는 몸에 감싸인 두꺼운 껍질을 '이상'이라는 뿌리가 뚫고 나오는 모습을 그린다. 결국, 작가가 선택한 '면도날'이라는 제목에서, 이미 익숙한 사회적 틀 속에서 정의화된 인간의 삶과, 끝없이 찾고자 하는 인간으로서의 삶간의 경계를 나타내고 싶었던 듯하다. 이 역시, 인간 역사가 시작될 때부터 지금까지 끝임없이 되풀이 되어 물어오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왜? 우리는 인간이지 않는가. 그러고 보니, 주인공 '래리'의 모습에서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과 <싯다르타>의 모습이 보이고, <그리스인 조르바>, '카프카'의 <성 The castle>에서도 보았다.
이 작품은 작가 자신이 접한 실제인물들 - 물론, 이름은 가명 -의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작가도 한 등장인물로서, 그들의 삶을, 그리고 '래리'의 삶을 남겨보고 싶었던 듯하다. 그래서 아래와 같이 각 인물을 소개함으로써, 작품속에 담긴 이야기를 대신하고자 한다.
엘리엇 - 엘리사의 이모부, 상류층이라는 그들만의 세상에서 사는 인물. 상류사회는 그의 인생의 전부였고, 파티는 그에게 있어서는 숨구멍이었다. 그러므로 사교적인 파티에서 제외된다는 것은, 그에게는 치욕이고, 모욕이며, 두려움이다. 죽음이 앞에 있어도 파티에 갈 생각을 했고, 결국엔 주위에 아무런 상류층 인사들도 없이 홀로 죽음을 맞는다.
엘리사 - 상류사회에서 살아가는 방법이 길들여져 자란 여인. 그녀에게 돈은 힘이고 영향력이며, 남자는 일을 해서 자신을 안정되게 해야 한다는 가치관을 갖고 있다. 주인공 '래리'를 사랑하지만, 경제적 부와 안정을 줄 수 있는 '그레이'와의 결혼을 선택한다. 그렇지만, 자기가 사랑했던 '래리'는 다른 이에게 쉽게 내주고 싶지는 않는 자기 중심적 인물이다.
그레이 - '엘리사'만이 자신의 사랑의 대상이다. 부유한 집에서 성장했고, 1929년 경제 대공황이 있기 전까지는 주식투자사를 운영하며 많은 부(富) 를 유지하며 성공하며 살았다. 대공황 이후, 사업이 망하지만 재력가였던 '엘리엇'의 유산 덕분으로 상류층 사회에서 '엘리사'와 같이, 기존의 상류사회에서 살아가는 방식대로 살아간다.
수잔 - 프랑스에서 화가들의 모델로, 그리고 그 화가들과 같이 동거하며 살아간다. 우연한 기회에 소위 어느 재력가의 정부(情婦)로서의 삶을 선택하여, 경제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안정된 삶을 산다. 그 재력가의 본 부인이 죽은 후에는, 그와 결혼을 앞두고 만족하고 있다. 작가로부터 축하를 받고, 수잔 본인도 잘 되었다고 행복감을 갖고 있다.
소피 - 순수한 영혼을 가지고 있던 소녀였다. 행복한 결혼생활 중,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한다. 결국 남편과 아이를 잃고 자신은 그 트라우마속에서 타락의 삶을 선택하여 술과 마약, 매춘으로 살아간다. 마치, 소설 <소년이 온다>에서 트라우마를 이겨내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살아가던 인물들처럼... 타락의 삶 속에서 살던 중, 우연히 '래리'를 만나고 그와 결혼을 앞두며 새로운 출발을 하고자 한다. 그러나 '엘리사'의 질투가 다시 그녀를 타락의 길로 빠지게 하는 도화선이 된다. 결국, 그녀는 싸늘한 주검의 모습으로 자신의 삶을 마무리한다.
래리 - <면도날>이라는 의미를 남기게 한 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경제적으로는 안정된 삶을 살아 왔지만, 그것이 그의 삶의 목적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사회에서 요구되는 경제적 안정, 높은 지위의 획득 등은 그의 관심에 없다. 전장(戰場)에서 자기 친구의 죽음을 본 후, 그는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한다. 인생을 보고자 한다. 세상사에 순응하는 삶이 현명한 삶인지에 대한 의문을 갖는다. 결국, 그의 끊임없는 탐구와 구도를 향한 열망은 그를 인도로 이끌었으며, 인도철학 - '윤회'의 의미를 포함해서 -에서 그가 가져왔던 물음에 대한 갈증의 해소를 경험한다. 그리고 이제는 삶의 현장으로 돌아가려 한다. 아무것도 갖지 않고, 아무 명예도 바라지 않고...
나 - 작가 '윌리엄 서머싯 몸' 본인이다. '나'는 다른 등장인물을 모두 접하면서, 관찰자적인 입장으로 자신이 겪은 것을 최대한 사실적으로 옮기려고 한다.
작가는 6장은 전체적인 이야기의 흐름과는 관계가 없다고 한다. 게다가, 이 장에서 소개된 '래리'와의 대화가 없었다면, 이 소설을 쓰려고도 하지 않았다 한다. 이 장에서는 바로, 그동안 '래리'가 살아왔던 아니, 구도(求道) 해왔던 이야기가 담겨있다. "그의 삶이 끝난 후, 그가 지구상에 체류했음을 말해주는 흔적은 강물에 던져진 돌이 수면에 남기는 흔적만큼도 못 될지도 모른다." 작가는 '래리'의 삶을 그저 흘려보내고 싶지는 않았나보다. 종국에는 자기가 선택한 무일푼으로 일상의 삶 속으로 들어간 그의 삶 자체가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님을 세상에 남기고 싶었나보다. 작가를 비롯하여 이 곳에 나온 모든 등장인물은 지금 세상에는 없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도, 또 지금 이 책을 읽고 있는 독자도 어느 순간 이 세상에는 없을 것이다.
당신은 무슨 목적으로 '인생'이라는 운동장에서 뛰고 있는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