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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비딕

허먼 멜빌 <모비딕>을 읽고...

by 하늘

아침, 저녁으로는 긴소매를 챙기게 된다. 어느덧 9월이군...! 마지막 독서일기를 남긴지가 언제였던가? 문득 캘린더를 꼽아보니, 한 달이 훌쩍 지나갔다. <모비딕>을 손에 쥔 지, 그 기간을 보냈다. 꽤나 오랜동안 이 책을 붙들고 있었구나. 핑계라고 해야할까? "피클볼"의 재미가 책 읽던 시간을 대신하면서, 어느새 딱 맞던 바지가 제법 헐렁해지고, 꽉 끼던 셔츠가 그럴싸하게 입을만 하게 된 8월을 보냈다. 한 여름, 피클볼 코트에서 일광욕을 즐기고, 다이어트는 덤으로 얻은 듯 하다. 이런, 일상의 얘기로 페이지를 채우기보다는, <모비딕>의 책 속으로 얼른 들어가 보도록 하자.




어디서부터 시작을 해야 할까? 소설의 story전개에 집중해 볼까? 작가 '허먼 멜빌'에 의해 집약된 고래백과사전에 대한 감탄을 담아볼까? 아니면, 스쳐가는 일상의 소소함에서 찾는 깊은 삶의 철학을 옮겨볼까? 게다가, 이 책은 작가 본인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한, 포경업에 대한 안내서로 제공될 수 있기도 하겠다. 책의 발간 당시, 서점에서도 이 책을 소설보다는 해양, 특히 고래에 대한 연구 서적으로 분류시킴으로써 대중적으로도 눈에 띄기 어려웠다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난다. 그만큼, 고래 백과사전 같기도 하고, 또는 <모비딕>을 쫓는 과정에 얽힌 소설 같기도 한, 때로는 별과 어둠에 둘러싸인 망망대해 속에서의 사색이 담긴 철학서를 담고 있기도 하다. 이렇듯 일반 소설과는 달리, 다양한 관점에서 들여다 볼 수 있는 책이었음은 분명하다. 800여 페이지에 가까운 두꺼운 책! 쉽게 시작하지 못하고 마음 속에 담아 두었던 것이, 바다를 가르며 다가오는 '피쿼드'호 처럼,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고자 했던 '이슈메일'처럼, 그동안 무심코 지나쳐 왔던 바다의 세상에서 보낸 8월이었다.




작가 '허먼 멜빌'에 대해서는 책 뒷부분에 상세한 설명을 담고 있다. 그가 고전을 공부해서 그런지, 그리스 신화에 대한 이해, 서양의 고전 철학, 성경에 나와 있는 '요나'이야기나 '아합(Ahab)', '이스마엘(Ishmael)', '엘리야(Elijah)', '라헬(Rachel)' 등의 인물, 그리고 각종 문화 유적 등에 대한 기본 지식이 있는 독자라면, 작가가 의도하고자 하는 바를 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그다지 겁먹을 필요는 없다. 600여개에 달하는 각주를 살펴보면, 책 외의 방대한 세상 지식을 구경할 수 있으니 말이다. 왜 '피쿼드(Pequod)'호가 이 배의 이름이고, 그것을 쫓는 모비딕(Moby Dick)은 왜 흰색이었을까? 백인이 미국에 정착할 당시의 Native American에게 어떻게 했는지에 대한 이해가 있다면, 대충 앞뒤가 맞아 떨어지지는 않는가? 역시, 책을 통해 세상을 보게 된다. 잠시, 작가 '허먼 멜빌'이 이 작품을 쓰면서 어떤 감정이었을지를 상상해 보고 다음 말을 이어가도록 하겠다.

다른 사람에게는 평범해 보이는 주제를 다루면서 가슴이 부풀어 우쭐해하는 저자들이 있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그렇다면 이 레비아탄을 쓰고 있는 나는 어떨까? 나도 모르게 내 글씨는 현수막의 대문자처럼 커진다.

광범위하고 개방적인 주제의 미덕은 우리 자신까지도 확대한다는 것이다. 우리도 그 주제의 크기만큼 커지는 것이다. 웅대한 책을 낳으려면 웅대한 주제를 선택해야 한다.




작품 <모비딕>에선 새로운 세계에 대한 경험을 하고픈 빈털털이 '이슈메일'의 관점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포경선에 승선하며 발생했던 모든 사건, 인물 또는 고래에 관한 방대한 얘깃꺼리를 담고 있다. '모비딕'으로 불리는 흰 고래에 대한 복수가 삶의 이유였던 '에이해브'선장부터, 야만인 출신의 작살잡이 '퀴퀘그', 스타벅스라는 이름을 만들어낸 '스타벅', 야만인들에게 음식을 대접해야 하는 백인 급사 '찐만두' (그 당시는 노예제가 있었던 때였음을 감안한다면 아이러닉하기도 하다.) 등까지 그들의 다양한 이야기가 빼곡하다. 게다가, 완벽한 음식의 맛을 배가시키는 철학적 메시지의 여운은 <모비딕> 감상의 특유한 향기를 더해 주었다. 때론 가슴 속에 담아보기도, 머릿 속에서 그려보기도 한 시간으로 기억된다.




인터넷 시대! 글로 적혀 있는 것을 몇 자 타이핑만 하면, 바로 눈으로 확인해 볼 수 있는 '책상 앞 여행시대'의 혜택을 톡톡히 누린다. 이렇듯, 미국의 넨터켓(Nantucket)으로의 자정의 시간에 온라인 여행을 가 보기도 한다. 작살로는 고래를 어떻게 잡았는 지 과거를 가보기도 한다. 최근엔 폭탄을 작살에 설치하여 고래를 잡고 있다는 잔인한 현실도 찾아본다. 고래삽이라고 하는 건 뭘 뜻하는 거지? 그것으로 마치 생선껍질을 벗기듯, 살과 지방(기름)을 떼어나는 장면을 본다. 고래머릿 속의 담긴 기름을 어떻게 기름통에 담그는 지를 찾아보고, 한 마리 고래에서 나오는 기름의 양이 얼마일지를 눈으로 보며, 고래들은 바닷 속에서 어떻게 수면을 취할 지.. 등의 모든 궁금한 것은 타이핑과 클릭으로 쉽게 눈 앞에 놓여진다. 새삼, 여행으로 Cape Cop를 갔을 때가 기억난다. Nantucket을 그냥 지나쳤었으니, 참으로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을 다시한번 실감하며 말이다. 때론 Map을 따라가 보고, 사진으로 또는 동영상으로 책 밖의 세상여행은 오늘도 계속된다.




두서없이 몇자를 적어가다보니, 책 속의 내용보다는 담겨진 방대함에 대한 감탄으로 가득한 듯 하다. 책을 읽은 즐거움보다, 책 밖의 것들을 주로 담은 듯 하다. 물론, 두꺼운 책이기는 하나, 한 번 읽고 그냥 접어두고 싶지는 않은 책이다. 스토리를 보면 단순할 수도 있고, 고래백과사전과 같은 학문적인 지루함을 느낄 수도 있지만, 틈틈이 담겨있는 철학적 또는 사색의 메시지가 나를 붙드는 책이다. 제법 살아온 인생의 경륜으로 공감하면서 말이다. 짤막하게나마, 형광색 마크를 남겨놓은 문장들을 아래와 같이 열거하며, 나의 첫번째 읽은 <모비딕>의 독서일기를 마치기로 한다. 한 두 문장씩 계속 적어가다보니, 이것만도 거의 한 페이지를 메우는 구나. 잠시 작은 미소를 머금고, 1956년에 나왔다던 고전영화 "모비딕"을 보기위해 TV를 켠다.


명상과 물은 영원히 결부되어 있는 것이다.

신앙이란 것은 승냥이처럼 무덤들 사이에서 먹이를 찾고, 이런 죽음의 회의 속에서도 가장 활기찬 희망을 주워 모으려고 한다.

우리가 영적인 사물을 바라볼 때, 그것은 마치 굴조개가 바다 밑에서 태양을 바라보며 흐린 물을 가장 맑은 공기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을지도 몰라. 내 몸뚱이는 보다 나은 내 존재의 찌꺼기인지도 몰라.

우리들 인간이 참된 철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철학적으로 살거나 그렇게 살려고 애쓰는 것을 의식하지 말아야 한다.

이 세상의 모든 특성은 비교에 의해서만 드러나기 때문이다. 단독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눈을 감지 않으면 아무도 자신의 정체성을 올바르게 느낄 수 없다. 우리의 육체적 부분에는 빛이 더 맞지만, 실은 어둠이야말로 우리 실체의 본질적인 요소인 것 같다.

세상에서 가장 위험하고 긴 항해가 끝난다는 것은 두 번째 항해가 시작된다는 뜻이니, 두 번째가 끝나면 세 번째가 시작되고, 그렇게 영원히 계속된다. 그렇게 끝없이 이어지는 것, 그것이 바로 견딜 수 없는 세상의 노고인 것이다.

배의 유일한 친구가 바로 배의 가장 고약한 원수인 것이다. --> '파도'를 말함

가장 숭고한 진리, 끝이 없는, 신과같은 무한정한 진리는 육지가 없는 망망대해에만 존재한다.

우리가 도살자인 것은 사실이다. 세상 사람들이 기거이 존경하는 사령관들도 도살자들이고, 게다가 잔인하기로 이름 높은 도살자이다.

차분하고 견실한 그의 인생은 대부분 소리로 이루어진 지루한 장(章)이 아니라 동작으로 이루어진 인상적인 무언극이었다.

"고래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내 보트에 절대로 태우지 않겠다"고 스타벅은 말했다. -중략- 이 말은 두려움을 모르는 사람은 겁쟁이보다 훨씬 위험한 동료라는 뜻이기도 했다.

이 풍족한 낮 시간은 마치 장미 향수를 뿌린 눈으로 만든 페르시아 빙과를 수북이 담은 수정 그릇 같았다. 별이 빛나는 장엄한 밤은, 보석으로 장식한 벨벳 옷을 걸치고 집에 홀로 남아, 자긍심 속에서, 정복하러 떠난 백작들, 황금빛 투구를 쓴 태양들의 기억을 끌어안고 있는 도도한 귀부인들 같았다. 낮은 그렇게 매력적이고 밤은 그렇게 유혹적이어서, 잠을 언제 자는 게 좋을지 선택하기가 어려웠다.

삶과 더 오래 연결되어 있을수록 인간은 죽음을 생각하게 하는 그 무엇과도 관계를 덜 갖게 된다.

선장과 항해사들의 식탁을 지배한 것은 참을 수 없는 억압과 눈에 보이지도 않고 형언할 수도 없는 오만함이었지만, 그보다 지위가 낮은 작살잡이들의 식탁을 지배한 것은 태평스러운 방심과 여유, 그리고 거의 광란이라 할 만한 자유분방함이었다.

엄동설한처럼 춥고 황량한 노년에 육신이라는 나무줄기 속에 갇혀버린 에이해브의 영혼도 동굴 같은 그곳에서 어둠의 음침한 손바닥을 핥으며 살아가고 있었다.

지금 그대가 누리고 있는 생명이란 부드럽게 흔들리는 배가 나누어준 그 흔들리는 생명뿐이다. 배는 그 생명을 바다에서 빌려왔고, 바다는 그 생명을 신이 만들어내는 불가사의한 조류에서 빌려왔다.

오오! 나는 내 초라한 처지를 분명히 본다. 나는 반항하면서 복종하고, 동정하면서 증오한다. 그의 눈 속에서 지독한 비애를 읽기 때문이다.

복수심보다 더 무서운 것은, 에이해브가 광적일 정도로 과민해져서 결국에는 자신의 육체적 고통만이 아니라 지적/정신적인 분노까지도 모두 흰 고래와 결부시켰다는 점이다.

인간은 다른 기분일 때는 흰색으로 고결하거나 우아한 것을 상징하지만, 흰색이 가장 심오한 관념적 의미를 짊어질 때는 인간의 영혼에 초자연적 환상을 일으키게 한다는 것을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신격화된 '자연'은 매춘부처럼 진한 화장으로 우리를 매혹하지만, 그 매력은 그 밑에 있는 납골당을 가리고 있을 뿐이다.

이런 경이로운 사건들은 (모든 불가사의와 마찬가지로) 사실상 태곳적부터 있었던 일의 단순한 반복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아아, 우연과 자유의지와 필연-이들이 결코 조화를 이룰 수 없는 것은 아니다-그것들은 뒤섞여 함께 일한다.

바다의 간특한 지혜를 생각해보라. 가장 무서운 생물은 물속 깊이 들어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가장 아름다운 쪽빛아래 숨어 있다. 또한 수많은 종류의 상어가 제각기 아름다운 자태를 갖고 있듯이, 바다에서 가장 무자비한 종족들 대부분이 갖고 있는 악마 같은 광채와 자태를 생각해보라.

폭풍이 오기 전에 그것을 예고하는 깊은 정적이 폭풍 자체보다 더 무섭다고 한다. 이 정적은 사실 폭풍을 싸고 있는 포장지일 뿐이고, 겉으로는 아무런 해도 없어 보이는 라이플총 속에 치명적인 화약과 탄알과 폭발력이 들어 있듯이 그 정적 속에는 폭풍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깨닫는 것은 삶이 갑자기 죽음으로 급선회할 때 뿐이다.

오오, 인간들이여! 고래를 찬미하고, 그들을 본받도록 하라! 그대들도 얼음 속에서 따뜻한 체온을 유지하라. 그대들도 이 세상의 일부가 되지 말고 이 세상 속에서 살아라. 적도에서는 시원하게 지내고, 극지에서도 피가 계속 흐르게 하라. 오오, 인간들이여! 성 베드로 대성당의 거대한 돔처럼, 그리고 고래처럼, 어떤 시기에도 그대 자신의 체온을 유지하라.

내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은 내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내 마음대로 지배할 수 있는 것은 밧줄의 한쪽 끝뿐이라는 사실이다.

사색에 잠긴 인간의 수려한 이마는 아침 햇살을 받은 동녘 하늘 같다.

외떨어진 고래-외로운 고래-는 대체로 늙은 고래다. 수염에 이끼가 낀 존경할 만한 대니얼 분이 그랬듯이 늙은 고래는 '자연'외에는 가까이하지 않고 황량한 바다에서 자연을 아내로 삼아 살아간다. 자연은 우울한 비밀을 많이 간직하고 있지만, 그래도 세상에서 가장 좋은 아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독자들이여, 여러분도 역시 '놓친 고래'인 동시에 '잡힌 고래'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나는 오랫동안 되풀이된 경험을 통해 인간이란 어떤 경우든 자기가 얻을 수 있는 행복에 대한 개인적 평가를 결국에는 낮추거나 어떤 식으로든 바꾸어야 한다는 것, 행복은 결코 지성이나 상상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내나 연인, 침대나 식탁, 안장이나 난롯가, 전원 같은 데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내면에 슬픔보다 기쁨을 더 많이 가진 인간은 진실할 수 없다. 진실하지 않거나 아직 인간이 덜되었거나 둘 중 하나다.

깨달음의 길에서 벗어나 헤매는 자는 (살아있는 동안에도) 죽은 자들 속에 있으리라.

물로 에워싸인 이 광대한 바다를 보라. 더없이 공정하고 공평한 이 바다에서는 인간의 행복이나 불행을 표현하는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대는 빛이기는 하지만 어둠에서 뛰어나왔다. 하지만 나는 빛에서 뛰어나온 어둠이다.

헤아릴 수 없는 상념 이외에 그 무엇이 진실로 존재하는가? 지금 여기서는 가장 무서운 죽음의 상징인 관이 단순한 우연으로 가장 절박한 위험에 처해 있는 생명에 대한 구원과 희망의 표상이 되어 있다. 관으로 만든 구명부표!

이 보잘것없는 심장은 어떻게 고동칠 수 있고, 이 작은 두뇌는 어떻게 사색할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아니라 신이 심장을 고동치게 하고, 두뇌를 돌아가게 하고, 삶을 영위하게 하는 것이다.

고독한 생애 끝의 고독한 죽음! 오, 내 최고의 위대함은 내 최고의 슬픔 속에 있다는 것을 지금 나는 느낀다.

바다라는 거대한 수의는 5천년 전에 굽이치던 것과 마찬가지로 굽이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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