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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양귀자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을 읽고...

by 하늘

1992년, 대학캠퍼스! 수업을 마친 또래의 남학생들이 옹기종기 모여든다. 자판기 커피를 하나씩 들고서, 그들의 입에 문 담배에서 연신 연기를 뿜어댄다. 청년들의 잡담이 가득하다. 그 중엔 나도 섞여 있군. 그러나, 담배 문 여학생은 왜 안보이지? 카페 한 구석에선 티키타카하며 연신 연기를 뿜어내더니, 누가 본다고 그런가? 그들은 어느새 다소곳한(?) 학생들이 되어 있다. 기억난다. 몇몇 여학생들은 선배들에게 '형! 형!'하면서 불러대곤 했던 모습들이... 그렇지만, '언니!'라고 하며 부르는 남자 후배들은 찾아볼 순 없었지.



의례, 여성 직원들은 커피를 타고, 다과를 대접하는 것이 관례였다. "미스 김! 미스 리! 여기 커피 한 잔!' 남자들에게선 얼마나 당연한 요구였던가. 아마도 TV드라마에서도 자연스럽게 본 듯 하다. 직장의 여성 과장이나 부장은 당연히 히스테리많은 노처녀였던 걸로 기억한다. 30살 넘어 시집 안 간 여자는 문제있는 여자였으니 말이다. 이런 시대에, 소설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이 세상에 나왔다. 양귀자, 그녀의 나이 39세, 세상에선 결혼도 안한 자기주장에 똘똘 뭉쳐있는 괴이한 노처녀라고 봤었을까? 이미 그녀 또한 26세에 결혼하여 딸을 둔 엄마이기도 했던 것이다. 작가 양귀자는 말한다.

성(性)의 대결이나 성의 우월을 가리기 위해 이 소설이 쓰인 것은 아니다. 이 소설은 말하자면 상처들로 무늬를 이룬 하나의 커다란 사진이다

한국의 가부장적 사회, 관습, 문화로부터, 숨죽여 있던 여성들의 메아리를 주인공 '강민주'로 하여금 대신 소리질러 준 것이다.




소설의 줄거리를 간단히 요약해 보자면, 대략 아래와 같이 전개된다.

심리학 공부를 하며, 대학원 강사로 그리고 여성 문제 상담소의 상근직으로 강민주가 등장한다. 남성들의 가정폭력, 아픔만을 울부짖는 여성들, 무언가를 해 보려다 또 다른 폭력을 겪는 여성들, 그 아픔을 치료할 해결책도 없는 현실에 대적하려, 강민주는 기꺼이 세상과 싸우기를 결단한다. 그녀의 결단은 이미 오래 전부터 준비되어 왔으리라. 그리곤, 황남기의 도움으로 유명 남배우 백승하를 납치한다. 강민주의 손과 발을 담당하는 행동대장, 황남기, 그는 강민주의 어머니로부터 길들여진 강민주의 하인과 다름없다. 납치된 백승하의 괴로움은 강민주의 즐거움이었다. 그러나, 강민주에게 변화의 온기가 피어오른다. 그것은 감금된 백승하로부터의 진심어린 납치범(강민주)에 대한 염려를 경험하면서 퍼져 간다. 강민주의 단단함은 서서히 녹아지고 있다. 급기야, 감금된 아파트내에서 백승하의 요청--이는 물론 강민주가 제안한 것이다.--에 따라 '수업'이라는 공연 연습을 강민주는 같이 하게 된다. 시간이 지나며, 이전의 강민주가 희미해 지게 된다. 성(性)차별에 대한 경종을 울리고자 했던, 그래서 자신을 바치면서까지 세상과 싸우려 했던 강민주가 사라져 가고 있다. 결국엔, 백승하의 공연을 위해서라면 그녀는 경찰에 체포될 위험도 기꺼이 감수하겠다고 생각한다. 그 공연은 결국 강민주 자신의 공연이기도 하다고 되내인다. 결국, 주인 강민주의 변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황남기는 주인이 스스로 목숨을 버릴 것을 예상한 것이었는지, 공연 중, 강민주의 역할이 죽는 장면에서 주인을 향해 총을 쏜다. 그렇게 강민주는 고요하게 적막하게 사라진다.




이 소설을 읽기 전에, 같이 하는 독서모임에서 하퍼 리 <앵무새 죽이기>를 읽고 토론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래서인가, 내가 인식하던, 또는 인식하지 못하던, 지금도 내 주위의 '앵무새'는 없는지, 혹시라도 보게 된다면 그 '앵무새'의 소리를 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마음이 있었나 보다. 그러기에, 강민주의 소리가 더 깊이 메아리치고 있는지 모르겠다. 뿐만 아니라, 작가 양귀자가 살아왔던 사회를 나 또한 보고, 듣고, 만지며 살아왔다. 나 또한 수많은 가해자 중의 한 사람은 아니라고 부정할 수는 없다. 사회 통념적으로 대게 그렇게 하는 게 관례야, 또는 무의식적으로 그냥 해왔던 데로 살고 있지는 않을까? 과거도 그렇지만, 지금은, 아니 앞으로는 어떨가? 30여년이 지난 지금 2025년, 성(性)의 역차별에 대한 논쟁도 허다하다. 물론, 남성과 여성의 문제만은 아니다. 혹시 우리가 쉽게 지나쳐 버리는 '트랜스젠더' 이슈는 어떻게 보고 있는가? '미혼모'를 보는 시각은? '이민자'를 보는 시각은 어떤가? 등등 책 속의 이야기에 파 묻히기보다 그 외의 것들도 꺼내어 볼 수 있는 '우리'가 되어가면 좋겠다.




책을 읽으며, 하이라이트로 표시해 두던 문장들을 다시 한번 읽어본다. 그리고 몇몇을 아래에 남기면서, 이번 작품의 짧은 독서일기를 마친다.


삶이란 신이 인간에게 내린 절망의 텍스트다. --(중략)-- 나는 운명을 거부한다. 절망의 텍스트는 그러므로 나의 것이 아니라 당신들의 것이다.

도대체 자신의 고민을 자신 이외 누가 해결해 줄 것인가 말이다.

나는 흡연 그 자체보다도 매번 정답이 제시된 주제를 선정하는 편집자의 상투성부터 실컷 비꼬았다. --(중략)-- 흡연이 문제가 된다면 인간의 흡연이지 여자의 흡연은 아닐것이라고 말하면서...

모든 삶은 길 위에 있다. --(중략)-- 애초 길은 없었다. --(중략)-- 순례자에게 길이 어디 있는가. 오직 고행의 가시밭길만 있을 뿐이다.

게다가 그 한결같은 끝말들, '죽지 못해 살지요'에 이르면 나는 거의 소리를 지르고 싶은 심정이 되어버린다. 죽지 못해 살다니. 그런 삶의 변명이 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녀들이 수행하는 복수는 겨우 그 철저한 자기 학대뿐이란 말인가.

강자에게 짓밟히는 약자들이 끝없이 소원하는 것은 단 하나다. 힘. 언젠가는 힘으로 다시 너를 누르리라. 내게 힘이 있다면 반드시 지금 당한 그대로 너에게 돌려주리라.

그랬다. 나는 그녀들이 간절히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 그것도 아주 완벽하게. 나는 비로소 내가 초월자라는 것을. 응징의 대리인이라는 것을 알았다.

희고 말간 것은 싫다. 탱탱하고 반들거리는 피부도 싫다. 한 번도 깨져보지 않아 굳은살이 배기지 않은 삶은 정상적인 삶의 행로라고 볼 수 없다. 그런 삶은 가짜다. 역사가 없는 것이다.

나는 인간이란 이름의 텍스트로 살아가는 운명이 아니다. 나는 아주 일찍 그것을 거부했다. 단호하게. 또한 확실하게.

나는 낡은 생각, 낡은 언어, 낡은 사랑을 혐오한다. 나의 출발점은 그 낡음을 뒤집은 자리에 있다.

역사가 깊은 이 남성중심의 사회에서는 억압과 회유의 반복이라는 양날의 통치 기술이 아주 성공적으로 쓰여 왔다.

그 둘 다가 모두 나의 진짜 모습이지요. 진리에의 탐구, 그리고 남자들과의 전쟁. 이 두가지가 모두 내 일생의 과제니까요.

여자인 주제에 감히 이만한 일을 저지를 수 있겠는가, 라는 그 무작정한 고정관념을 수정하지 않는 한은 그들은 결코 나를 찾아낼 수 없다. 그리고 그들은 절대 자신들의 고정관념을 버리지 않을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백승하의 이 말은 그러나 비난이 아니다. 나는 그것을 알 수 있다.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묻어있는 수심은 오직 강민주의 안위를 걱정하는 것일 뿐이다.

우리는. 아, 나는 지금 너무 자주 우리는, 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우리는, 우리는, 우리는.

아, 나는 자꾸 변하고 있다. 나는 변하고 있는 스스로가 불안해서 더욱 새로운 계획에 매달린다. 위험한 것은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을 나는 안다.

그의 괴로움이 깊으면 깊을수록 반대로 즐거움이 깊어지던 그런 강민주는 어느덧 사라지고 말았다. --(중략)--. 그날 이후 몇 날 동안 계속되던 백승하의 침울한 모습때문에 나는 또 얼마나 안절부절못했던가.

모든 젖어있는 것들은, 그것이 여자의 얼굴이건 남자의 얼굴이건 관계없이 나를 슬프게 한다는 것을 나는, 이제, 서서히 깨닫는다. 모든 젖어있는 것에 나는 태연할 수 없다.

백승하에게 이 공연이 소중한 것처럼 나에게도 이 공연은 중요했다. 나는 그의 당당한 동업자로 무대에 서는 것이다. 나는 납치범이 아니라 그와 함께 무대를 꾸려갈 주인공이다.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이란 이 긴 제목은 뽈 엘뤼아르의 시 <커브>의 전문(全文)이다. by 양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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