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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송 The Trial

프란츠 카프카의 <소송 The Trial>을 읽고...

by 하늘

책을 덮은 지 하루가 지났다. 감동의 아지랑이가 피어나고 있던 어제부터 지금까지 꼬박 24시간이 된 것 같다. 아주 뜨거웠던 음식이 식어간다고 해야 할까? 그 음식은 뜨거워야 제 맛인데... 시간이라는 불순물이 섞이면서, 어느새 미지근해지고, 또 차가워지게 되면 제 맛이 잊혀지리라. 저녁식사를 뒤로 한 채, 성급히 컴퓨터앞에서 다짜고짜 내 안의 <소송>에 대한 감동의 실타래를 풀어가려 한다. 책의 마지막장을 넘겼던 그 순간의 안개 속이긴 하지만, 한 가닥 심지의 불빛을 기억하며...




미완성인 작품을 왜 읽고자 했는가? 아마도 <변신>, <성>을 통해 만났던 카프카의 작품에 담긴 철학적 고찰에 대한 호기심일 수도 있겠다. 또 한 편의 유명한 <소송>까지를 읽어보게 된다면, 카프카를 좀 경험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자기충만욕구도 있겠다. 어쨌든, 일반적으로 많이 읽혀져서 경제적인 부를 이루고자하는 의도로 쓴 작품이 아니기에, 내겐 좀 더 마음을 열고 그에게 빠져볼 수 있기도 하다.




카프카, 그의 작품 속 이야기에는 삶 속에서 발견된 철학적 고민을 갖고 있다. 이야기로서의 가치도 있지만, 그 안에 담긴 작가의 고민을 만났을 때, 카프카 작품의 액기스를 먹는 기분일 것이다. 카프카는 법학을 공부했다. 자기의 의도가 아닌 아버지의 강요이다. 1914~1915년에 이 작품 <소송>이 쓰여졌다고 하니, 그의 나이로 치면 30대 초반에 인생의 마무리에서 찾을 법한 삶의 불합리성 내지는 의도하거나 계획대로 되지 않음을 깊이 다루고 싶었던 듯하다. 흔히들, 삶의 부조리라고도 한다.




그의 작품 <변신>, <성>과 같이, 이 작품 <소송>에서도 어느날 갑자기 뜻하지 않는 사건이 벌어진다. 주인공 '요제프(Joseph) K'는 자고 일어나니 갑자기 체포된다. 무슨 영문인지, 무슨 죄인지도 모른다. 회사에서는, 소위 잘 나가던 젊은 간부인 그는 이제 형사소송의 피의자로 재판을 받게 된다. 그의 주위의 사람들은 그가 재판에 넘겨져 유죄가 될 것으로 예상하는 데, 정작 당사자인 K는 왜 재판을 받아야 하는지 조차도 모른다. 이런 수수께기 같은 재판에 얽히게 된 과정이 진행되는 동안, K는 업무적으로나, 육체적 그리고 정신적인 고갈 상태를 겪게된다. 게다가 이미 재판에 넘겨진 이상, 어떻게 변론하던, 이 곳에서는 본질적인 무죄를 받아낼 수 없음을 알게 된다. 그러니, 재판이 이루어지지 않도록 연기시키는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고, 그러자니, 이미 그가 유죄인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 되기도 한다. 결국, 31살이 되기 하루 전날 밤, 두 명의 형집행관은 K의 하숙집으로 들어온다. K또한 자신이 사형집행될 곳으로 기꺼이 가고, 그 곳에서 죽음을 맞는다. 아래는 소설의 마지막 부분이다.

한 번도 보지 못한 재판관은 어디 있는가? 결코 가보지 못한 상급 재판소는 어디 있는가? 그는 두 손을 쳐들고 손가락을 쫙 펼쳤다. 그러나 한 남자가 두 손으로 K의 목을 누르고, 다른 남자는 칼로 K의 심장을 깊숙이 찌르고 거기서 칼을 두 번 비틀었다. 흐려져 가는 눈으로 K는 두 남자가 눈앞에서 뺨을 맞대고 자신의 종말을 지켜보는 것을 보았다.
"개같이!" K가 말했다.
그가 죽은 후에도 치욕은 남을 것 같았다.




인간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이상, 고대부터 지금까지, 인간은 '법'을 만들어 냈다. 그렇게 함으로써, '신'을 대신한 통치체제를 구축해 왔다. 인간은 태어남과 동시에, 그 법의 잣대안에서 살아간다. 법원에서 다루는 법뿐만 아니라, 우리를 둘러싼 관습법, 도덕법, 규칙 등의 올가미안에 갇히게 된다. 나의 의지도 아니다. 내가 그렇다고 그 안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끊어질 것도 아니다. 이것이 마치 주인공 K가 어느날 갑자기 헤어나올 수 없는 '소송'에 휩싸이게 된 것은 아닌가? 그렇다고 우리는 그 법안에 들어가서, 그 법이 잘못되었다고, 또는 나는 그 법에 의해 억압될 유죄의 존재가 아니라, 나 본연의 자유가 있는 무죄의 존재임을 주장할 수는 있을까? 그 법은 이미 인간이 허물 수 없는 거대한 신적 존재가 되어 있지 않은가? 그것이 바로 K가 볼 수 없던 재판관이나 상급 재판소는 아닌가? 그러기에, 작품 <소송>은 단순히 법적 용어의 '소송' 이야기가 아니라, 그것을 재료로 한 인간 삶, 본연의 모습을 생각해 보자는 차원의 작품으로 내게 남겨지게 된다.



끝으로, 작품을 읽으며 무심코 페이지를 넘기면서도 다시 한번 더 보고 싶은 문장들을 몇 개 남기며 글을 마친다.


내가 고소를 당하기는 했지만 누군가 나를 고소할 만한 죄라고는 털끝만큼도 찾아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부수적인 문제이고, 중요한 문제는 내가 누구한테 고소를 당했는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이 거대한 조직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죄 없는 사람들을 체포하여 그들을 상대로 무의미하고 대개는 제 경우처럼 아무 성과도 없는 소송을 벌이는 데 그 의미가 있습니다.

위험이란 내가 두려워하고자 할 때만 두려운 법이거든요.

이 사법 기관의 내부도 그 외부만큼이나 마찬가지로 역겨운 모습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은 욕구에서였으니까.

그러나 그것 역시 원래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이다.

요컨대 그에게는 소송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선택권이 없었다. 그는 소송 한가운데에 서 있는 것이며, 자신을 방어해야만 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 괴로운지 알 수가 없었다.

재판소에서 몰두하고 있는 갖가지 정교한 사항들이 문제입니다. 결국 원래는 아무것도 없었던 어디에선가 큰 죄를 만들어 내겠지요.

고소가 경솔하게 제기되지는 않으며, 일단 고소를 하면 재판소에서는 피고의 죄에 대해 굳게 확신한다는 뜻이고, 그러한 확신을 버리게 하기는 어렵다고 모두들 한결같이 말하더군.

어떤 종류의 석방을 원하시죠? 세 가지 가능성이 있는데 즉, 실제적인 무죄와 형식적인 무죄 그리고 판결을 지연시키는 방법이 있습니다.

최종적인 무죄판결을 내릴 권한은 없어요. 그 권하는 최고 재판소만이 갖고 있는데, 최고 재판소는 당신이나 나나, 우리 모두가 결코 접근할 수 없답니다.

이 문은 당신만을 위한 것으로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은 들어갈 수 없었어. 이젠 가서 문을 닫아야지.

이 이야기에는 법 안으로 들어가는 것에 대한 문지기의 중요한 설명 두가지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는 '지금은 들여보낼 수 없다'는 말이고, 또 하나는, '이 문은 당신만 들어가도록 정해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인간은 태어남과 동시에 사형선고(소송의 가장 무서운 판결인)를 받았음에도 그런 불안은 늘 한쪽으로 제쳐두고 일상생활에 열중하지 않는가. by 옮긴이

그에게 죄가 있는지 없는지는 중요하지 않고, 기소되었으니 면죄될 길은 없다.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면 결백 여부는 관계없이 단 하나의 종국만이 기다리고 있다. by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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