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D. 샐린저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고...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소년이 있다. 단체로 무리지어 생활하는 데에도, 대다수의 기대와는 다른 자기 식으로 반항하는 소년이라 하겠다. 이번 학교 '펜시'에서의 성적미달로 인한 퇴학을 합하면 4번째가 된다. 소년은 영화를 싫어하기도 한다. 그 영화라는 것이 어찌보면 가식의 집합체라고 여기는 것 같다. 매번 소년은 뭔가 정해놓는 규칙이란 것에 대한 구역질을 느낀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던 내가, 무의식적으로 엮어놓았던 사슬을 끊고자 하는 갈망을 소년의 반항으로 간접적으로나마 지지를 보내고 싶었던 걸까? 어릴 적, 여드름 가득한 얼굴의 사춘기 시절을 돌아보고 싶었던 마음이었을까? 때로는 단어의 표현이 너무도 저속하여 학생들에게는 금서로 지정되기도 했다던 책이고, 누구든 제목쯤은 들어봤음직한 책이다. 얼마나 리얼(Real)한 표현이길래 그랬을까? 바로 지역도서관에서 대여 신청을 접수해 놓는다.
개인적으로는 최근 몇 권의 영미소설을 읽었다. 그 중, 이쪽 동부의 지역들이 등장하는 작품들이 내 손을 지나가는 것을 발견하는 것도 또 다른 재미다. <위대한 개츠비>, <앵무새 죽이기>, 그리고 <호밀밭의 파수꾼>까지... 롱아일랜드, 뉴욕, Grand Central Station, 펜실베니아, 콜럼비아 대학 등의 낯설지 않은 장소때문인지, 좀 더 친근감있게 다가온다고나 할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작품 발표 당시, 32세의 작가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가 16살 소년의 직설적, 반항적 관점을 어떻게 실제적으로 그려낼 수 있었을까? 아마 그도 소설 속, 주인공 '홀든'과 같이 연신 줄담배를 피워가며, 자신의 학창시절과 그 때의 미세하고 예민했던 감정들을 꺼내고 있지 않았을까? 어느새, 그 감정들이 뿌연 담배연기에 담겨 방 안을 가득채우고 있지는 않았을까? 상상의 소용돌이를 만들며, 새삼 뭔가를 창조해 내는 이들의 고뇌에 박수를 친다. 그리고 더불어, 이야기내에 찰진 욕짓거리가 같이 섞여 있어야 하는 것이 실제와 같겠다는 공감이 든다.
잠시 다른 방향으로 갔던 이야기를 책으로 다시 돌아와 본다면, 16살 주인공 '홀든 콜필드(Holden Caulfield)', 한국으로 치자면 고등학교 1학년을 보내고 있는 질풍노도의 시기, 언제 폭발할 지 모를 화산, 혹은 중2병의 절정기라고 할 수 있겠다. 흔히 하는 사람들간의 가식의 인사치레 말에서도 역겨움을 느끼는 소년이다. 한 번 내뱉어 잘못을 인정했는데, 똑같은 말을 또 하게 하면 기분이 뒤틀리는 소년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빨간 사냥모자를 쓸 때도, 창을 뒤로 가게 하여 거꾸로 쓰기를 좋아하는 소년이다. 선생의 독려, 어른들의 충고, 또는 친구들간의 대화에서도 쉽게 낡아빠진 허튼소리를 구분하는 데에 예민한 소년이다. 그래서 더욱 그런지, 펜싱팀의 주장이기도 하고, 기숙사의 단체 생활도 하지만 외로움과 우울함을 또는 역겨움과 구역질을 느끼고 있는 소년이다. 그런 소년이 '펜시'학교에서 퇴학이 결정된 후, 더 이상 있고 싶지 않다는 충동적인 마음에 짐을 싸고 홀로 학교를 떠난다.
수요일쯤에나 집에 도착하도록 시간을 잡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갑작스런 역겨움을 느끼며 토요일 밤, 2개의 짐꾸러미를 후다닥 챙겨 뉴욕으로 향한다. 그의 집도 뉴욕에 있었으나, 집으로 가는 대신 허름한 호텔을 예약하고, 외로움과 우울함으로 가득한 그의 2박 3일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술집으로 가서 모르는 여자들에게 추파도 보내며 헛소리로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엄청 술에 취해서 게워내기도 하며, 소위 call-girl을 불러 보기도 하고, 결국, Sex보다는 쓸쓸한 감정으로 그냥 보내고, 예전의 일들을 회상하며 역겨웠던 혹은 그리웠던 기억들을 곱씹기도 한다. 예전에 교재했던 셀리와의 데이트, 마음 속 어딘가에 자리잡던 옛 친구 제인에 대한 그리움, 죽은 동생 앨리에 대한 회상 등이 섞여 있는 홀든의 내면을 채우고 있는 우울함과 외로움을 경험하게 된다. 결국엔, 동생 피비의 순수함과 홀든을 지지하고 따르고자 하는 모습을 본다. 그 둘은 회전목마를 타는 곳으로 향하고, 회전목마를 타고 있는 피비를 보며 홀든은 행복감을 맛 본다. 그리고 그 둘은 집으로 향한다. 홀든이 여기서 멀리 서부로 떠나겠다는 계획을 뒤엎고서... 집으로 온 홀든은 또다시 이전의 정해진 규칙에 맞게 사는 세상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그에게는 조금씩 '그리움'이라는 것이 남는다.
마지막으로, 책을 읽으면서 밑줄 쳤던 몇몇 문장을 남기며 짧은 나의 독서일기를 마친다.
인생은 시합이야. 인생은 규칙에 따라서 살아야 할 시합이지.
그래 시합이라 해 두자. 만일 누가 온갖 성공이 기다리고 있는 그런 쪽에 있다면, 그럼 인생은 시합이지. 그런데 만일 성공의 가망이라곤 조금도 없는 그런 쪽에 있다면, 그땐 그게 무슨 시합인가? 아무것도 아니야. 시합은 무슨 시합이야.
어떤 애 엄마가 좀 뚱뚱하거나 초라해 보이거나 그러면, 또는 어떤 애 아버지가 어깨가 아주 큰 양복을 입고 촌스러운 흑백 구두를 신은 그런 사람이면, 하아스 교장은 그저 간단히 악수나 하고 거짓된 미소를 한번 지어 보이고 말지만, 어떤 다른 애 부모한테 가서는 아마 삼십 분은 지껄이는 그런 걸 말하는 거야. 난 그런 건 정말 봐 줄 수 없다. 그런 건 사람을 돌게 한다니까. 난 그런 걸 보면 우울해져서 참기 어려워진다.
나는 빨간색 사냥 모자를 쓰고 내가 좋아하는 식으로 챙을 한바퀴 돌렸다.
그는 대머리를 가리기 위해서 얼마 안 되는 머리카락을 한 쪽에서 다른 쪽으로 빗어 넘기는 그런 친구들 중의 하나였다. 나라면, 그런 짓을 하느니 차라리 그냥 대머리로 다닐 것이다.
나는 만나서 하나도 반갑지 않은 사람한테도 항상, '만나서 반갑습니다.'하고 말한다. 하지만, 살아 있고 싶다면 그런 말을 해야 하는 것이다.
사실을 알고 싶다면, 난 목사들한텐 참을 수가 없다. 내가 다닌 학교란 곳에 있는 목사들 말이다. 그들은 죄다 설교를 시작할 때 저 거룩한 체하는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정말이지, 난 그게 싫다. 왜 그들은 자연스런 목소리로 말하지 못하는 지 알 수가 없다. 그들이 얘기할 땐 정말 사기꾼같이 들린다.
이모는 자선단체의 일을 꽤 잘한다. 하지만 이모는 옷을 잘 차려입고 다닌다. 자선적인 일을 할 때는 언제나 좋은 옷을 입고 립스틱이니 뭐니를 잔뜩 바른다.
무엇보다도 나는 배우들이 싫다. 그들은 절대로 보통 사람들이 행동하듯이 행동하지 않는다.
왜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난 울고 있었다. 아마 내가 더럽게 우울하고 외롭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일 거라고 추측한다.
사방에 비가 내렸다. 그러자 무덤을 찾아왔던 사람들이 죄다 차 있는 데로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자 나는 거의 머리가 돌 지경이었다.
성숙하지 못한 사람의 특징은, 이상을 위해 죽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반면에 성숙한 사람의 특징은, 이상을 위해 겸손하게 살아가려고 한다는 것이다.
피비가 회전목마에 타고 돌아가는 모습에서 나는 갑자기 행복한 느낌에 젖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