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쓰이에 마사시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를 읽고...
새벽 하늘을 보며 창문가에 서 본다. 창문 밖의 경치를 살그머니 두 눈에 넣어본다. 산도 좋고, 강도 좋고, 아니면 호숫가도 좋다. 손에는 커피잔이나 찻잔이 쥐어지고, 한 모금의 따스함을 입 안에 넣고 적시운다. 집안 가득 피아노든, 첼로든, 소란하지 않은 음악소리로 온 몸을 감싸게 하면서... 갖고 있던 과거 어느 때의 추억을 슬그머니 꺼내어 본다. 어느새 한 줄기 미소가 입가의 가녀린 신경을 건드림을 느낀다. 그것이 샘물의 원천이 된 듯, 얼굴 전체로, 손가락의 움직임으로, 마음 전체로 꽃향기가 되어 채워진다. 아니, 어쩌면 눈가의 따스한 촉촉함으로 밖의 풍경이 물 속에서 보듯이 흔들리기도 한다. 혹시, 과거 어느 때의 기억이 가랑비에 옷 젖듯, 잔잔한 그리움이 되어 마음과 오감을 적시고 있던 경험은 없는가요?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이 책을 덮은 후, 밀려오는 감정을 이렇게 말하고 싶다. 새벽녘, 해가 떠오르는 이른 아침의 풍경을 스치며 드라이브하는 내게 전해진 아련한 그리움, 잊혀졌던 어여쁜 기억을 문득 꺼내보고 싶어진다.
마침, 이 작품을 만나기 전, 허먼 멜빌의 <모비 딕>을 읽었기 때문일까? <모비 딕>에서는 사건이나 파도의 거센 역동성을 느꼈던 반면,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에서는 잔잔한 물결 위에서 힘빼며 쉬고 있는 한가함을 경험한다. 전자가 방대한 내용을 다룬 이야기라고 한다면, 후자는 단조롭기도 한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이다. 게다가, 전자에서 느낄 수 있던 클라이막스의 땀을 쥐는 긴장감보다는, 후자에서는 일기나 에세이를 읽고 있는 듯이 편안히 다가온다. 우연찮게도 두 편의 연이은 독서에서 빠름과 느림, 짙음과 옅음, 강함과 약함을 함께 느낀다. 식탁위의 각종 현란한 음식을 먹을 때가 있으면, 단아한 음식 한 접시로 속을 푸는 때도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잠깐동안의 Reset을 경험한 시간이었다.
항상 그렇지만, 책을 통해 오히려 책 밖의 세상을 경험한다. '건축 설계'라는 내가 가지 않았던 세상에 대한 맛을 조금이나마 맛 본다. Frank Lloyd Wright라는 유명 건축가가 설계한 펜실베니아에 있는 Falling Water House(현재, 일반인들도 관람이 가능함. https://fallingwater.org/), 그가 제자들을 양성시킨 탈리에신(Taliesin), 아스플룬드(Asplund)에 의해 만들어지고, 또 그가 묻혀있는 숲의 묘지(Woodland), 스톡홀롬의 시립도서관 등을 찾아보며 건축세상을 구경해 보기도 한다. 나와 같은 세상에 있었지만, 내가 몰랐던 세상을 구경한다. 아주 작은 소소한 것이라도, 예를 들어 문고리의 모양조차도, 그것을 구성하는 각각의 의미가 있음에 대한 세심한 창조의 손길에 감탄한다. 이를 통해, 이미 지어진 곳에서만 살아왔던 나를 보고, 이미 만들어진 가구만를 쓰는 데에 익숙해진 나를 보기도 한다. '왜 내가 원하는 데로 만들어봐야지 하는 생각은 하지 않았을까?'
https://www.youtube.com/watch?v=q8dcnh-4I6g
https://www.youtube.com/watch?v=reLD8WddLn0
책의 내용은 아마도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요약할 수 있겠다. 사회 초년생인 '나(사카니시)'가 입사한 설계사무소에서 직원들과 같이 해마다 그렇듯 여름동안의 별장 생활을 한다. 주된 목적으로는 겨울에 있을 국립현대도서관 경합을 준비하는 프로젝트라 할 수 있다. 그러면서 벌어지는 일상적인 모습, 선생님, 직장동료들간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극적이거나 강한 임팩트도 찾아보기 어려운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상의 모습이다. 그런 모습이 일기처럼, 때로는 에세이처럼 담겨있다. 29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지금 '나'는 그 여름별장의 문을 연다. 이제는 여름별장을 소유한 상태로, 그리고 아내가 된 '유키코(직장선배)'와 함께... 그 때의 시간이 소중했음을 떠올리는 추억으로, 아련한 그리움으로 마지막 장을 메우고 있다.
불과 2년전에는 한국을 방문했더랬다.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의 교정을 보며, 왜 그렇게 작게 느껴지는지... 학교 후문에는 바로 우리집이 있었는데, 이제는 형체조차도 바뀐 다른 주택가가 되어 있다. 나와 같이 등교하기를 기다렸던 친구가 서 있던 전봇대도 찾아본다. 예전의 똑같은 문방구는 없지만, 길 주변에 비슷한 용도의 상점들이 있고, 넓게 느껴졌던 길목은 그대로구나. 동전으로 넣는 공중전화는 없지만, 아직 카드로 작동되는 공중전화 부스가 보인다. 얼른 사진으로 한장 남긴다. 그 길로 중학교를 가 본다. 회수권을 사용했던 버스를 추억하고, 차장 누나가 있었던 어린 시절의 추억을 곱씹으면서... 그리고 고등학교도 가 보고, 미국으로 오기 전의 살림을 장만했던 집 주변도 가 본다. 사람은 없지만, 그때의 시간은 없지만, 건물이 있었다. 길목이 있었다. 추억여행의 미소를 만들어 주던... 사물을 보면서 추억을 꺼내었다. 바로 이런 느낌을 받은 것 같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에서는...
책 제목을 추억을 머금어 보듯 아주 잘 지었다. 원제는 <화산 자락에서>라고 하니, 역시 책 제목이 마케팅에 엄청 큰 영향을 주는 듯 하다. 끝으로, 형광색으로 칠해 두었던 몇 문장들을 남기며, 독서일기를 마친다.
고도경제성장의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안이한 자기과시욕에 구애되지 않고, 실질적이면서도 시대에 좌우되지 않는 아름다움을 지닌, 그러면서도 사용하기 편리한 건물을 무라이 슌스케는 하나하나 만들어내고 있었다.
취급 설명서 따위 붙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이 훨씬 더 우위라고.
'가족 구성이 같다하더라도, 맞벌이 부부의 집과 전업주부가 있는 집은 자연히 플랜이 달라진다'고 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놓치기 쉬울 만큼 평범한 말로 얘기되는 법이다.
'숲의 예배당'의 문 스케치에 '오늘은 당신, 내일은 나'라는 명판을 그려 넣었다.
나눗셈의 나머지 같은 것이 없으면 건축은 재미가 없지. 사람을 매료시키거나 기억에 남는 것은 본래적이지 않은 부분일 경우가 많거든. 그 나눗셈의 나머지는 계산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야. 완성되고 나서 한참 지나야 알 수 있지.
책을 읽고 있는 동안은 평소에 속한 사회나 가족과 떨어져서 책의 세계에 들어가지. 그러니까 책을 읽는 것은 고독하면서 고독하지 않은 거야.
'숲의 묘지'로 시작한 건축가의 마지막 일은 원이 닫히듯 '숲의 묘지'가 되었던 것이다. 아스플룬드는 자기가 설계한 화장터에서 화장되었고, 재가 되어 '숲의 묘지'에 매장되었다.
필요 이상의 조치를 취하는 것은 갑옷을 입고 길을 걷는 것과 같아 밸런스가 나쁘다고 덧붙였다.
울창한 밤의 숲은 도대체 몇 번이나 불탄 들판에서 재생한 것일까? 우리도, 지금 울고 있는 부엉이도 불탄 들판을 모른 채 이 자리에 있다.
두려워 할 필요가 없는 그리운 어둠 --> 죽음을 두고 하는 말
건축은 준공되고 나서 비로소 생명이 부과된다. 나는 어느새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건축은 이용객과 그 시대에 의해 숨결이 부여되고 살아난다.
건축은 예술이 아니야. 현실 그 자체지. 선생님이 언젠가 하신 말씀이 그때의 음성 그대로 내 귀에 되살아난다.
장작이 타고, 타다 무너지는 것을 싫증도 내지 않고 바라보며 그 소리를 듣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