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제 린저 <삶의 한가운데>를 읽고...
귀에 익숙한 제목이다. 내게는 들어는 봤는데, 내용은 모르는 수많은 책들 가운데 하나다. 영어제목을 찾아보니, The Middle of Life(Mitte des Lebens)! 최근의 번역책들과는 다르게, 책 제목도 원본의 제목을 그대로 가져왔군. 그래, 난 이게 더 좋다. 책의 발간년도(1950)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이고, 주인공(니나 Nina)은 독일인이니, 나치 치하에서의 독일인의 시선으로 본 삶의 모습을 경험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전쟁을 겪고난 후의 시대, 소위 Nina's Story로 열광했던 그 당시의 '루이제 린저'가 쓴 두 권의 책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제목으로만 상상해 볼 때, '인생'에 대한 의미를 담는 많은 사색을 맛볼 수 있을 것 같다. 왠지, 호기심과 기대감이 피어나기에 충분하다. 가을로 접어들어가는 9월! 작품 <삶(혹은 생)의 한가운데>와 같이 보낸다.
책의 내용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작가 루이제 린저(Louise Rinser)에 대해 가볍게 Web Search를 해 본다. 나치시절에 감옥생활을 했다고, 북한의 김일성을 만났고, 그의 사상에 대해 긍정적으로 서부에 전하려고도 했다고, 서독의 녹색당 대통령 후보로도 나왔었다고, 대통령 후보 검증을 하면서 나치를 위해 복역했던 과거가 나오기도 했다고, 작품 <삶의 한가운데>의 니나를 통해서 작가 자신을 대변하려 했다는 등등의 내용을 접한다. 그래? 살면서 정치적인 부분에도 어느정도 관여했었나 보군! 문득, 조지 오웰이 '자신은 정치적인 글을 썼을 때만이 진정한 작품이 되었다'는 문구가 머릿 속을 스친다. 작품과 작가를 연관짓지 않고, 작품에서의 주인공 Nina에 충실하며 감상해보자는 욕구가 더욱 생긴다.
기대가 너무 컸나? 나치를 경험한 독일인의 시선? 상상은 상상으로만 남겨둬야 할까? 총 3장으로 구성된 이 작품의 중반부를 넘어가면서, '이 책을 다 읽어야 할까?'라는 생각이 스멀스멀 떠 오른다. 두 자매 니나와 언니 마르그레트간의 만남, 그리고, 20살 연하인 니나를 연모했던 중년의사 슈타인의 일기 혹은 편지가 대부분이다. 18년 동안을 먼 발치서 지켜봤던 슈타인의 고백, 감정, 그리움, 애틋함, 절절함 등에 실망감을 누르며 후반부로 접어든다. 역시 섣부른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사랑'에 대한 얘기를 담고는 있지만, '삶'을 바라보고 겪어가는 관점의 차이가 보이기 시작한다. 니나와 마르그레트의 삶을 맞닥뜨리는 모습이 비로소 깊이있게 비교된다. 소설 <채식주의자>에서의 '영혜'와 '인혜'의 대치되는 모습을 보는 듯하다. 니나가 슈타인과의 결혼이라는 것을 할 수 없었음을 이해하게 된다. 슈타인의 연모, 아니 어떨 때는 집착으로까지 비춰지던 그 모습이 내 안에서 해석하며 보게된다. 단지, 남녀의 사랑만의 시선이 아닌, 니나라는 존재는 슈타인 자신이라면 전혀 가 볼 수 없던 길을 가던 무의식중에 존재했던 자신의 이상은 아니었을까?
1장에서 남겼던 슈타인의 일기 중, 아래 문구가 다시 읽힌다.
나는 언젠가 내가 인생의 무의미함에 대해 깊게 탄식했을 때 그녀가 한 말을 기억하고 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인생의 의미에 대해 묻는다면 그는 그 의미를 결코 알게 되지 못할 거예요. 그것을 묻지 않는 자만이 해답을 알아요. 그녀는 이것을 지나가면서 얘기했다.
그리고는, <모비 딕>에서의 문구가 떠 오른다.
우리들 인간이 참된 철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철학적으로 살거나 그렇게 살려고 애쓰는 것을 의식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나는 어느 누구가 철학자를 자처한다는 말을 들으면, 그 사람은 소화불량에 걸린 노파처럼 배탈이 난 게 분명하다고 단정짓는다.
삶...! 딱히 하나로 정의내릴 수 없다. '삶의 한가운데'를 헤치고 가는 우리의 삶(생)이 존재할 뿐이다. 나 역시 어떻게든 일반화시키고, 무엇이다 정의하여, 틀 안에 가둬놓는 백과사전식 사고를 피하려 하고 있지 않는가. 먼 발치서 보면, 자연은 그저 풀이고, 나무이고, 산이며 강이다. 과연, 가까이서 볼 때, 우리는 '그저'라는 단어로 넘겨 버릴 수 있는가? 온갖 다름을 갖고 있듯이, 우리는 각자의 삶을 갖고 있다. 그 삶을 살아가는 당사자만이 그의 삶을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겉으로 보여지는 것보다, 보여지지 않는 것이 많은 세상... 우리의 보여지지 않는 것을 마치 보고 있는 것처럼 하지는 말자. 적고 보니, 정의할 수 없는 것을 정의하고 있는 모순일 수도 있음을 자각한다. 니나의 삶을 보는 관점을 남긴다. 당신은 인생을 무엇으로 보고 있는가? 당신은 어떤 종류의 삶을 살고 있는가?
나는 아침 6시면 일어나요. 아주 일정해요, 내가 언제 잠자리에 들었건. 그리고 원고들을 읽어요. 당신은 내가 출판사의 원고 심사자가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죠. 벌써 일감을 주고 있어요. 자리가 날 거예요. 9시부터 오후 5시까지는 서점에 있어요. 그 후 1시간 동안 아이들을 돌보죠. 그리고 영화관에 가요. 돈을 벌려고, 석간신문에 영화평을 쓰기 위해서죠. 그러지 않을 때는 정치적인 일을 해야 해요. 이런 일이 매일 그리고 매주 있어요. 그리고 중간에는 소설을 쓰는 거예요. 장편소설도 하나 시작했어요. 그래요. 당신은 이런 것만이 인생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소설의 줄거리를 남기려하기 보다는, '삶의 한가운데'를 지나가는 내게 주고 싶은 물음들을 남긴다. 어떤 자세로 숨쉬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을 볼 지를 곱씹어 본다. 읽으면서 나를 깨우는 몇 문장들을 남기며 <삶의 한가운데> 독서일기를 마친다.
내가 의식을 잃기 시작한 때만큼 생을 미치도록 강력하게, 정말 지겨우면서도 멋지다고 느껴본 적이 전에는 없었어요.
나는 인생이 참을 수 없는 고통이라는 불공정한 무기를 가지고 나를 패배시키기 전에 스스로 인생을 끝내는 자유를 선택하기로 했소.
우울에 관해서 생각하고 있었어. 니나는 천천히 말했다. 온갖 아름다움이란 것이 일시적이고 다만 얼마 동안 빌려온 것이라는 것을 알아버린 사람, 그리고 우리가 인간들 틈이나 나무와 극장과 신문 사이에 있으면서도 마치 차가운 달 표면에 앉아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고독하다는 것을 알아버린 사람은 누구나 다 우울하지.
내 생각에 사람들이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계속해서 생기에 차 있을 때야. 그리고 마치 미친 자가 자기의 고정관념에 몰두하듯이 무언가에 몰두하고 있을 때야.
의욕이 없어지면 늙기 시작하는 거야.
자기 자신의 내부를 들여다보면 수백 개의 서로 다른 자아가 보여. 어느 것도 진정한 자아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수백 개의 자아를 다 합친 것이 진정한 자아인 것 같기도 하고, 모든 게 미정이야.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이 될 수 있어. 사실은 이 여러 자아 가운데 하나의 자아만을, 미리 정해져 있는 특정한 하나의 자아만을 선택할 수 있을 뿐이지만.
사람이 자기 속을 보이면 보일수록 타인과 더욱 가까워진다고 믿는 것은 환상입니다.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말없는 공감이 제일입니다.
그녀의 얼굴에는 야생적 자유에 대한 행복감과 고향없는 사람의 슬픔이 함께 있었다. 깊이 잠든 얼굴에도 이것이 보였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니나를 바라보고 있자니 갑자기 떠오르는 말이 있었다. 완전하게 사는 삶! 나는 이것을 마치 노래의 후렴처럼 계속 생각했다.
사람들은 날마다 새로운 희망을 안고 다시 시작한다. 낮이 되고 밤이 된다. 그런데 무엇이 일어났는가. 하루가 지나갔다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매일매일이 똑같다. 서로 바뀌어도 상관없다. 나는 나 자신의 삶을 떠올려보았다.
여기에서 니나는 거의 1년을 보냈다. 왜인가? 아버지의 빚을 갚기 위해서? 나의 도움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그러나 사실은 '생'이 그녀에게 부과한 모든 과제를 자신이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증명해 보이기 위해서였다.
인간은 왜 고통을 통해서만 지혜에 도달할 수 있는 거야?
당신은 사는 게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을 나만큼 잘 알고 있어요. 우리는 생의 의미를 알려고 했어요. 그래서는 안되는 거죠. 만약 의미를 묻게 되면 그 의미는 결코 체험할 수 없게 돼요. 의미에 대해 묻지 않는 자만이 그 의미가 뭔지 알아요.
나는 살려고 해요. 나는 생명을 가진 모든 것을 사랑해요. 그러나 당신은 이해할 수 없어요. 당신은 한 번도 살아본 적이 없으니까요. 당신은 삶을 비켜갔어요. 한 번도 모험을 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당신은 아무것도 얻지도 못했고 잃지도 않았죠.
어쨌거나, 내가 제멋대로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틀렸어요. 나는 남들을 따라서 사는 게 아니라 내 삶을 살고 있어요. 내 말을 이해해 주길 바라요. 당신도 살기 위해 한 번쯤은 그 고상한 조심성을 방기해도 결코 해가 되지는 않을 거예요.
나는 자유에 대한 인간의 권리를 자살로까지 확장시키는 것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나는 이런 아름다운 만남을 선사한 인생에 감사한다.
내가 우는 것이 슈타인의 지난 고통과 니나의 엄청난 이별 때문만이 아니라, 나 때문에 그리고 축축하고 촘촘한 회색빛 그물에 얽혀 있듯 자신의 운명에 얽혀 있는 인간들 때문에 우는 것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