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언 반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를 읽고...
책의 제목에서부터 미스테리 혹은 추리소설의 향기가 나지 않는가? 금시초문의 제목은 아닌, 어딘가 낯설지 않은 문장이긴 하다. 뭔가를 기억해 내려하기 보다는 컴퓨터 앞의 타이핑이 더 빠르게 반응하는 시대... 곧, 한 편의 영화제목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책을 읽고난 후, 이 글을 남기다가 문득 의문을 던진다. 그럼 이 소설은 무슨 장르로 구분을 해 놓았을까? 딱히, 추리소설이라고 할 수도 없을 것 같고 -내겐 추리소설류가 아직 익숙치는 않다- 그렇다고 '삶'에 대한 고찰을 담은 여운이 가득하다고 할 수도 없다. 그렇지만, 일상을 살면서 부지불식간 흘려 지나치던 단어들(기억, 역사, 죽음, 자살 등)에 대한 사색과, 책 속에 담긴 의문의 수학공식이 삶에서 겪는 사건으로 설명되어, 마침내 수수께끼가 이해되는 은근한 희열을 경험시켜 준 작품이다.
요컨대 b, a1, a2, s, v라는 정수가 포함된 축적은 어떻게 나타낼 수 있는가?
b=s-v+a1 혹은 a2+v+a1*s=b?
참고로, 책의 원제목은 "The Sense of an Ending"이다. 뭔가 긴장감이나 호기심을 자극하는 마케팅 관점으로서의 한글 제목은 그 목적은 달성한 듯 싶다. 그러나 동시에, 내용에 대한 과장된 포장을 독자가 알아서 걸러내라고 전가하는 업계의 무책임한 행태는 약간 씁쓸하기도 하다.
삶을 경험하고 있는 우리에게 '기억'과 '시간'이라는 것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지에 대한 물음과 함께 작품 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는 다른반 6학년이었던 '롭슨'의 자살에 대해, 그 당시 어린시절의 눈으로 본 친구들간의 분석이 이어진다.
"카뮈는 자살이 단 하나의 진실한 철학적 문제라고 했어."
'롭슨'의 자살, 즉 거창하진 않은 사소한 사건일 수는 있지만, 이 또한 역사적 사건이라는 관점으로 보았을 때, 우리가 거쳐온 과거의 이야기를 몇 개의 문장들로 정의내려 버릴 수 없음을 환기시킨다.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과 불충분한 기록이 만나 빚어지는 확신입니다."
새삼스레, 과거의 역사적 사건에 대해, 현재 인간들간의 지배논리로, 또는 명분을 위해 왜곡하고, 이것이 다음 세대로 무분별하게 전해지고 있는 작금의 행태들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이미 책이든 영화든, 나치 시절에서의 역사관이 어떻게 쉽게 어린 학생들에게 흡수될 수 있는 지 보지 않았는가?
잠시, 삼천포로 빠졌던 생각을 다시 책 속으로 집어 넣자. 어렸던 학창 시절, 단짝 친구들(콜린, 앨릭스, 나(토니 웹스터), 그리고 전학 온 에이드리언 핀)간의 소소한 얘깃거리로 시작하여, 대학에 진학하고, 청년과 중년의 시기를 지난 지금, 노년의 나이에 '나'는 불현듯 편지 한 통을 받게 된다. 편지는 한때 '나'의 연인관계였고, 나중에는 친구 '에이드리언'의 연인이 되었던 '베로니카'의 어머니 '사라 포드'의 유언장! 내게 주어진 500파운드의 소소한 금액과 많은 부분이 떨어져 나간 에이드리언의 일기장 일부이다. 이미 은퇴한 노년의 '나'는 옛 기억을 더듬으며, '베로니카'를 만나게 되고, '에이드리언'이 자살로 생을 마감한 사실을 알게 되고, 그리고 떨어져 나간 일기장의 내용에 대한 의구심이 생기게 된다. 스토리는 추리소설을 읽어 나가듯, 지금 당장은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후반부로 가서는 모든 것이 보일 것이라는 기대감을 차곡차곡 쌓아가며 읽어가게 만든다. 마침내, 앞서 언급한 수학공식(b=s-v+a1 혹은 a2+v+a1*s=b? )이 무엇을 뜻하는 지가 보이게 될 때, 작품의 시작에서 중반, 후반부에 이르기까지 보다 명확하게 그림이 그려지는 맛을 느끼게 한다. '베로니카'가 '나'를 데리고 간 요양소나, 그곳에선 '메리'로 알려지고 있던 이유, 그곳에서 보호받고 있는 '에이드리언', 또한 그녀의 오빠 '잭'이 말한 아래의 언급이 무슨 의미인지가 그려지는 맛이다.
지혜로운 세 마리 원숭이의 교훈을 명심해.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입을 막아라.
추천의 말에서 언급되었듯이, 상대적으로 짧은 소설이었지만 공식을 이해하고 다시 앞으로부터 읽어가면 좋겠다는 작품이다. 사건의 연관관계 또는 등장인물들이 갖고 있을 얼굴의 표정이 보이리라. 끝으로, 책 속에서 언급된, 진실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한번쯤은 더 사색해 볼 수 있는 문장들을 남기며 독서일기를 마친다.
그러나 결국 기억하게 되는 것은, 실제로 본 것과 언제나 똑같지는 않은 법이다.
우리는 시간 속에 산다. 시간은 우리를 붙들어, 우리에게 형태를 부여한다. 그러나 시간을 정말로 잘 안다고 느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상처를 받아들여 중압감을 덜어보려는 사람도 있을 테고, 상처받은 이들을 돕는 데 한평생을 바치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더 이상 상처받지 않는 것을 주된 목표로 삼는 사람도 있다. 이들이야말로 피도 눈물도 없는 부류이자, 가장 조심해야 할 부류다.
그는 삶이 바란 적이 없음에도 받게 된 선물이며, 사유하는 자는 삶의 본질과 그 삶에 딸린 조건 모두를 시험할 철학적 의무가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가 만약 바란 적이 없는 그 선물을 포기하겠다고 결정했다면, 결정대로 행동을 취할 윤리적, 인간적 의무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논리적으로 사고했고, 논리적 사고로 도출한 결론에 따라 행동했다. 반면 우리 대부분은, 정반대로 행동하는 것 같다. 우리는 충동적으로 결정한 다음, 그 결정을 정당화할 논거의 하부구조를 세운다. 그런 후, 그렇게 만들어진 결과를 상식이라고 말한다.
한 영국인이 결혼이란 처음에는 푸딩이 나오지만 그 다음부턴 맛없는 음식만 나오는 식사라고 말한 적이 있다.
역사는 승자들의 거짓말이 아니다. 이제 나는 알고 있다. 역사는 살아남은 자, 대부분 승자도 패자도 아닌 이들의 회고에 더 가깝다는 것을.
기억이란 사건과 시간을 합친 것과 동등하다고. 그러나 기억은 그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기이하다. 기억은 우리가 잊어버렸다고 생각한 것이라고 말한 사람이 누구였더라.
그의 사람됨이나 인생에 대해 뭘 알고 있었던 걸까. 오래전에 함께 보낸 악몽 같은 주말의 기억에 근거해 추정한 게 전부였다.
그러나 시간이란... 처음에는 멍석을 깔아줬다가 다음 순간 우리의 무릎을 꺾는다. 자신이 성숙했다고 생각했을 때 우리는 그저 무탈했을 뿐이었다. 자신이 책임감 있다고 느꼈을 때 우리는 다만 비겁했을 뿐이었다. 우리가 현실주의라 칭한 것은 결국 삶에 맞서기보다는 회피하는 법에 지나지 않았다. 시간이란... 우리에게 넉넉한 시간이 주어지면, 결국 최대한의 든든한 지원을 받았던 우리의 결정은 갈피를 못 잡게 되고, 확실했던 것들은 종잡을 수 없어지고 만다.
인간은 생의 종말을 향해 간다. 아니다, 생 자체가 아니라, 무언가 다른 것, 그 생에서 가능한 모든 변화의 닫힘을 향해. 우리는 기나긴 휴지기를 부여받게 된다. - 중략 - 거기엔 축적이 있다. 책임이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 너머에 혼란이 있다. 거대한 혼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