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빚진 자
영상의학과 의사의 이야기 5.
"가을이 되니 귀신같이 피부가 건조해지시네요."
학교 다닐 때부터 친했던 피부과 후배가 가을만 되면 인사처럼 건네는 말이다. 나는 피부에 트러블은 심하지 않은 편인데, 조금만 건조해지면 바로 각질이 올라와서 케어해 줄 때마다 이 피부과 후배가 애를 먹곤 한다.
"그래? 그럼 케어 제품을 바꿔야 하나... 추천해 줄 만한 제품 있어?"
평상시에 트러블이 별로 없으니 흔히 로션이라 불리는 기본 케어 제품은 아무거나 쓴다. 가장 최근에 쓰던 제품은 9,900원에 1+1 행사를 하던 M크림이었다. 그렇지만 건조함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응급한 사안이다. 얼른 대처하지 않으면 곧 가뭄에 땅 갈라지듯 피부가 쩍쩍 갈라지기 시작할 터였다.
피부과 후배는 Z브랜드의 상품을 추천해 주었다. 요즘은 올리브영에서도 판매하는 제품이지만, 원래는 피부과에서 사용하는 제품이라고 입소문을 탔던 (내가 사용하던 것보다는) 비싼 브랜드였다.
그런데 그 제품명을 들으니, 얼마 전 어떤 친구를 만났을 때 그 친구가 주었던 선물이 생각이 났다. 바로 그 Z브랜드의 크림이었다. 선물을 받고는 집에 돌아와 잊어버리고 포장도 뜯지 않았었는데. Z브랜드에도 크림 라인이 많아, 이 크림이 건조함에 도움이 될지 아닐지 모르겠어서 제품의 사진을 찍어 피부과 후배에게 물어보았다. 금세 답이 돌아왔다.
"언니, 이거 진짜 좋은 거예요! 얼른 이거 쓰세요."
나는 그 Z 브랜드의 크림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한참을 바라보았다. 이렇게나 좋은 제품인지도 모르고 한참을 방치했구나. 이게 나에게 꼭 필요한 크림인 건 어떻게 알았을까? Z크림의 정갈한 포장지 위로 크림을 선물한 친구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지금은 소아과 의사가 된 친구 B. 학교 다닐 때 우리는 꽤 가깝게 지냈다. 같은 동아리를 했고, 수없이 많은 엠티들과 모임들을 함께 했다. 엠티를 가서는 함께 설거지를 하면서 많은 노래를 불렀다. 피아노를 잘 치고, 목소리가 귀여운 친구였다. 그렇지만 나는 그 친구를 별로 좋아하지는 않았다. 동아리 내에 여성의 숫자가 절대적으로 적었던 관계로 어쩔 수 없는(?) 단짝 포지션이 되기는 했지만, 그 친구는 내 행동과 선택들을 자주 반대하고 무시했다. 공개적으로 나를 어린아이 취급하면서 묘하게 깎아내리는 듯한 상황을 몇 번 마주치고 나서는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었다. 졸업하고 같은 병원에서 전공의를 할 때, 그 친구가 이런저런 부탁을 해오면 방법이 없다는 핑계로 차갑게 거절한 적도 몇 번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친구가 자신의 CT를 판독해 달라며 찾아왔다. 정말 아무런 흠이 없는 정상 CT 소견이었는데 친구는 자꾸만 이 혈관이 지나치게 큰 거 아니냐, 이 부분이 양쪽이 다른 게 아니냐 하면서 한참을 나에게 물어보았다. 그것도 정상이고 이것도 정상이고 저것도 정상이야, 아무것도 이상할 게 없어하고 친구를 계속해서 다독이는데 느낌이 이상했다. 의사로서 환자들을 만나다 보면 오는 그런 느낌이었다. 조심스럽게 친구에게 혹시 정신건강의학과 진료를 한번 보지 않겠느냐고 권유했다. 건강염려증이 지나치게 심각할 경우 우울증의 초기 증상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친구는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최대한 따뜻하게 웃어 보이려고 노력하면서 가만히 그 친구의 등을 토닥였다. 그 친구도 이미 의사이니 나의 의중을 알아차리고는 애써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로부터 며칠 뒤, 그 친구가 공황장애로 진단받았음을 알게 되었다.
요즘에야 공황장애가 흔하게 알려져 있기도 하고 어쨌든 신체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니 그 심각성이 희석되기도 하지만, 공황장애를 실제로 겪는 사람들은 정말 힘들다. 나도 직접 겪어본 것은 아니지만 진짜로 죽을 것 같은 두려움이 정신을 압도하기 때문에 일상생활을 유지하기가 어렵다고 한다. 그러고 나서 얼마 전 그 친구를 만나게 된 것이었는데, 여전히 공황장애로 어려움을 겪는 와중에도 그 친구는 Z크림이며 비타민이며 잔뜩 챙겨서 나를 보러 온 것이었다.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Z크림을 바라보는데, 그 친구를 향한 미안함과 고마움이 뒤섞여서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그 친구가 공황장애를 진단받고 나서도 나는 그 친구를 돌아봐주지 못했다. 그 친구는 종종 나에게 연락해서 안부를 묻곤 했는데 나는 한 번도 먼저 그 친구에게 연락해 본 적이 없었다. 이번에 만날 때도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빈손으로 나갔는데 그 친구는 기어이 선물들을 가지고 나온 것이다. 가을이 되면 건조해지는 내 피부에 꼭 필요한 선물들로 골라서.
나도 살면서 내가 준 애정과 노력을 돌려받지 못할 때가 있다. 얼마 전에는 바쁜 시간을 쪼개서 초음파 봉사활동을 하러 나갔는데, 초음파를 (공짜로) 보러 오셨던 환자 중 한 분이 자기가 가방을 초음파실에 놓고 나갔는데 그 사이에 지갑에서 돈이 없어졌다면서 나를 도둑으로 의심했던 적이 있다. 초음파실에 가방을 놓고 나가신 것도 맞고 그 자리에 내가 있었던 것도 맞지만, 그분이 가방을 두고 나간 뒤 바로 다음 환자분이 들어오셔서 초음파를 하느라고 거기에 가방이 있는지도 몰랐다. 아니 그건 둘째치고 내가 그 돈이 탐이 났다면 뭐 하러 그분의 지갑을 뒤졌을까. 봉사활동을 안 나가고 알바 한번 뛰면 그분이 잃어버렸다던 그 돈의 몇 십배를 벌 수 있는데.
이런 이야기까지 하는 게 꽤나 없어 보이긴 하지만 그만큼 황당한 경험이었다. 아니, 황당했다기보다는 기분이 상했다. 내가 애를 써서 준비해 온 선의에 감사로 보답받기까지는 바라지도 않았지만, 이렇게 면전에 대고 나의 선의를 모욕할 줄이야. 그때의 충격으로 한동안 봉사활동에 참여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선물 받은 Z크림을 가만히 들여다보면서, 나에게 보냈던 무수히 많은 그 친구의 선톡들을 생각하면서, 내가 받고도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모르고 방치했던 선물들이 얼마나 많을까를 생각하게 되었다. 기억나는 사람들의 얼굴들이 꽤 많았고, 바쁘다는 핑계로 그분들의 선의에 합당하게 보답하지 못한 내가 떠올라 땅바닥으로 꺼져버리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기억나는 것만 해도 이 정도일 텐데,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그 선의의 빚이 얼마나 많을지.
이제 나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다른 방법이 없다. 생각나는 분들께는 최선을 다해서 돌려드리고, 기억하지 못하는 귀한 선물들은 어쩔 도리 없이 다른 분들께 흘려보내는 수밖에.
그래서 이제 다시 봉사활동을 다니기로 했다. 또다시 나의 선의가 면전에서 바닥에 내팽개쳐지고 모욕당하는 일이 생기더라도, 나는 내가 이미 다른 분들께 받은 것을 또 다른 분에게 조건 없이 돌려준 것이기에 괜찮다.
나는 사랑에 빚진 자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