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터플라이 라넌큘러스 이야기
3월은 명실공히 봄이다. 아직 겨울바람의 매서움이 다 가시지 않아 매년 어리둥절한 채, 벌써 봄이라니,하고 한 템포 느리게 반기게 되는 그런 봄. 올해의 봄맞이는 조금 특별하게 꽃집에서 시작해 보기로 했다.
얼마 전 이웃에게 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꽃 도매상을 소개받았다. 졸업 시즌이라 그런지 꽃 몇 송이 사는 가격도 만만치 않다는 나의 푸념에,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지도 앱을 켜며 한 가게를 짚어주었다. 꽃시장만큼은 아니어도 꽤 널찍한 공간에서 꽃을 도매가로 판매하는데, 한두 송이씩은 팔지 않고 무조건 한 단씩만 판단다. 그래도 가격이 워낙 저렴해서 두어 단만 품에 안고 돌아와도 횡재한 기분이 들 거라 했다.
봄이니 프리지아를 사다가 식탁을 꾸며볼까 싶어 길을 나섰다. 가게는 구도심 시장통 끄트머리, 꼬불꼬불 좁은 골목을 몇 차례나 뱅뱅 돌고 나서야 겨우 모습을 드러냈다. 생각보다 소박한 외관의 문을 열고 들어서니, 내부 공간이 큼지막하긴 했지만 밝은 조명의 꽃 냉장고도, 형형색색 화려한 포장지나 리본끈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양 벽면을 따라 온갖 꽃이 종류별로 가득히 꽂힌 고무 양동이들이 줄지어 놓여있을 뿐이었다. 한 바퀴 슥 둘러보자 가게 중앙에 놓인 프리지아 양동이가 눈에 들어왔다.
"사장님, 프리지아 한 단에 얼마에요?"
"제일 왼쪽은 만 원, 가운데는 만 이천 원, 오른쪽은 만 사천 원!"
사장님의 활기찬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프리지아를 들여다보았다. 내 눈에는 다 똑같이 덜 피어난 샛노란 꽃인데, 가격 차이가 나는 이유를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뭐가 다른 거예요?"
사장님의 대답은 명쾌했다.
"비싼 게 좋은 꽃이지!"
잠시 고민하다가 집에 꽂아둘 꽃이니 저렴한 만 원짜리로 두 단을 가져가겠다고 했다. 그러자 사장님이 오히려 나를 만류하며 덧붙였다.
"집에 꽂아 둘 거면 더더욱 제일 좋은 꽃을 사가야지!"
나는 어차피 프리지아가 오래 가는 꽃도 아닌데 저렴한 게 낫다고 답했고, 사장님은 며칠 안 가는 꽃이니 더욱 풍성하고 크게 피어날 상등품을 꽂아두는게 맞다고 실랑이를 벌였다. 창과 방패의 싸움 끝에 사장님은 저쪽 끝의 다른 양동이를 가리키며 제안했다.
"가격 때문에 그러는 거면, 차라리 이건 어때요?"
프리지아만큼 환한 노란 빛의 꽃봉오리가 가득 담긴 양동이였다.
"이건 버터플라이 라넌큘러스라는 꽃인데, 프리지아보다 훨씬 오래가. 꽃잎에 윤기가 차르르 흐르는 게 진짜 이뻐요. 이건 한 단에 만 원이니, 차라리 요놈을 두 단 가져가서 온 집안에 꽂아두고 보셔."
"라넌큘러스가 어떻게 오래 가요?"
나의 반문에 사장님은 호탕하게 웃었다.
"아, 그냥 라넌이 아니라 '버터플라이'라고! 가져가서 봐보셔. 오래 가나 안 가나."
잠시 뒤, 나는 버터플라이 두 단을 품에 한 아름 안고 꽃집을 나섰다.
집에 돌아와 테이블 위에 꽃을 풀어두니 정말 양이 어마어마했다. 횡재한 기분이 들 거라던 이웃의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꽃대를 적당한 길이로 자르고 잎을 조심스레 손질했다. 일반적인 라넌큘러스는 꽃대가 도톰하지만 속이 비어 있어 작은 힘에도 쉽게 다치곤 하는데, 버터플라이는 줄기가 가늘면서도 조직이 단단했다. 사장님이 이름을 알려주지 않았다면 라넌큘러스라고는 짐작조차 못 했을 자태였다.
가져온 꽃들을 다 꽂기엔 집에 있는 꽃병을 죄다 꺼내와도 부족했다. 결국 재활용함에 넣어두었던 일회용 커피 컵까지 깨끗이 씻어 동원했다. 식탁 위, 장식장 위, 거실 테이블과 침대 머리맡까지. 이리 보고 저리 보아도 온 집안에 노란 빛이 가득 찼다.
반나절이 채 지나지 않아 꽃들이 하나둘 기지개를 켜듯 피어나기 시작했다. 겹꽃잎이 빽빽하게 차오를 줄 알았더니, 의외로 꽃송이가 얄상하고 가벼웠다. 이래서 오래 간다는 거구나 싶었다. 일반 라넌큘러스가 수백 겹의 꽃잎을 화려한 겨울 코트마냥 껴입고 있다면, 버터플라이는 무거운 외투를 벗어던지고 윤기 나는 실크 블라우스 한 장을 가볍게 걸친 채 봄바람 앞에 선 모양새였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왁스 층을 머금어 은은한 광택이 흐르는 꽃잎이 정말 잘 손질된 실크의 감촉을 닮았다. 잔뜩 힘주어 갖추었을 때보다, 오히려 가벼워졌을 때 비로소 시작되는 날갯짓. 그 경쾌한 생동감이 화병 전체를 휘감았다.
버터플라이 라넌큘러스의 꽃말은 '눈부신 매력', 그중에서도 노란 꽃은 '기쁨과 환희'를 상징한다고 한다. 생각해보면 향기 강렬한 프리지아 대신 이 꽃을 선택한 것은 행운이었다. 코끝을 스치고 사라지는 찰나의 향기보다, 열흘이 넘도록 끈기 있게 반짝임을 유지하는 생명력이 새봄맞이에는 제격일듯 싶다.
무거운 치장 따위는 벗어던진 채 기쁨으로 가득 차 날아오를 듯한 가벼운 몸놀림. 어쩌면 내가 새로운 계절에 가장 닮고 싶은 모습이기도 하다. 어른이라는 이름으로 짊어진 겹겹의 의무와 묵직한 외투를 잠시 내려놓고, 꽃잎처럼 스스로의 결을 따라 은은하게 빛나고 싶다. 억지로 꾸며낸 광채가 아니라, 가벼워짐으로써 비로소 발견하게 되는 내면의 빛깔로 말이다. 식탁 위에 내려앉은 노란 나비들이 햇살을 머금고 반짝일 때마다, 나의 봄도 조금씩 더 가벼워지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