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일홍과 디스버드 국화, 쿠르쿠마 이야기
언젠가부터 형식을 갖추는 일이 조금씩 버거워졌다. 미리 계획을 세우고, 정성을 다해 준비하여 빈틈없는 의식을 치러내는 일은 되도록 피하며 살고 싶었다. 아이를 키우는 일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남들 다 하는 형식이 뭐가 중요하냐는 핑계로 흔한 만삭 사진이나 성장 앨범 한 장 남기지 않았다. 백일상은 집에서 내 손으로 적당히 꾸려 치렀고, 돌잔치는 가족끼리 동네 맛집에서 밥 한 끼 나누는 것으로 갈음했다. 다행히 식당에서 준비해 둔 돌상이 있어, 그 앞에서 겨우 아이의 첫 생일 기록을 몇 장 건졌을 뿐이었다.
세 살 터울의 여동생은 여러모로 나와 참 다른 사람이다. 인생의 그 어떤 예식도 허투루 흘려보내는 법이 없다. 형편이 허락하는 한 가장 정갈한 공간과 정성스러운 음식, 매무새가 잘 갖춰진 식순을 꼼꼼하게 따져 준비한다. 조카아이의 백일잔치 때도 범상치 않은 솜씨를 발휘하더니, 돌잔치 역시 동생의 지극한 정성이 곳곳에서 묻어났다. 훌륭한 코스 정찬이 이어졌고, 세심하게 고른 꽃들이 방 안의 공기를 화사하게 채우고 있었다. 초대된 손님이라곤 양가 가족이 전부였음에도, 조카의 이름을 새긴 백설기와 중량이 높아 폭신폭신한 흰 수건까지 답례품으로 마련되어 있었다. 몇 달 전부터 이 날을 준비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새삼 혀를 내둘렀다. 너는 정말 잔칫날에 진심이구나, 하고.
잔치가 끝날 무렵, 동생은 테이블을 장식했던 꽃들을 예쁜 리본으로 묶어 답례품과 함께 건네주었다. 우리 집에는 돌상 한가운데 소담스레 놓여있던 센터피스가 배정되었다. 우아한 백색의 쿠르쿠마를 배경으로 동글동글한 디스버드 국화가 귀엽게 곁을 지키고, 선명한 붉은 빛의 천일홍이 강렬한 포인트가 되어주는 조합이었다. 여기에 유칼립투스 줄기 몇 개가 푸른 생동감을 더하니, 그 자태가 얼마나 우아한지 연신 감탄이 절로 나왔다.
세 가지 꽃 모두 절화 수명이 길기로 유명하지만, 각기 다른 꽃잎의 질감이 묘하게 어우러진 것이 잔칫날의 센터피스로는 더할 나위 없는 선택이었다. 무엇보다 아이의 첫 생일에 꼭 맞는 의미들이 촘촘히 박혀 있었다.
디스버드 국화는 폼폰 국화라고도 불리는데, 꽃잎이 중심을 향해 질서 정연하게 겹쳐지며 완벽한 구(球) 형태를 이룬다. 겉모습은 보슬보슬한 솜뭉치처럼 보드랍지만, 내면의 조직은 치밀해 형태가 쉽게 무너지지 않는 '외유내강'의 꽃이다. 예로부터 국화가 사군자 중 하나로서 '고결한 마음'과 '장수'를 상징해왔음을 떠올리면, 아이가 모난 곳 없이 둥글면서도 단단한 사람으로 자라길 바라는 마음이 읽힌다.
그 곁의 천일홍은 이름 그대로 천일 동안 색이 변하지 않는 끈기를 가졌다. 꽃말 또한 '변치 않는 사랑'이니, 아이의 인생에 쏟아진 이 축복의 빛깔이 세월의 풍화에도 바래지 않고 지속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염원이 담겼을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마음을 든든하게 받쳐주는 쿠르쿠마는 수수하면서도 고귀한 자태로 아이의 앞날이 저처럼 아름답기를 소리 없이 응원하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뒤 꽃들은 일주일 내내 우리 집 식탁을 풍성하게 지켜주었다. 저녁을 먹을 때마다 어여쁜 꽃망울을 보며 우리는 아장아장 걷던 조카를 떠올리고 웃음꽃을 피웠다. 그날 힘찬이가 얼마나 똘망똘망했는지, 조그만 발로 어찌나 씩씩하게 걸음을 떼었는지, 울지도 않고 어쩜 그리 환하게 웃어주었는지...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볕이 따뜻해진 봄날을 맞아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 긴 캠핑이 예정되어 있었다. 캠핑장으로 떠나는 날 아침까지도 식탁 위의 꽃들은 여전히 싱그러웠다. 매일 물을 갈아주지 않으면 빈집에서 속절없이 시들어버릴 텐데. 조카의 첫 돌을 준비한 동생의 애틋한 마음을 생각하니, 이 꽃들을 그냥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무병장수와 행복, 사랑 같은 세상의 온갖 좋은 것들을 빌고 또 빌었을 그 기복의 마음이 꽃잎 하나하나에 맺혀 있는 것만 같아서.
한참을 고민하다 재활용 상자에서 플라스틱 컵을 찾아 깨끗이 씻어 꽃들을 옮겨 담았다. 그걸 캠핑장까지 가져갈 거냐는 남편의 물음에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자동차 컵홀더에 꽂아가면 되지 않겠어?"
남편은 유난이라며 투덜거리면서도, 비포장도로에 들어서자 꽃들이 다치지 않게 평소보다 훨씬 조심스럽게 핸들을 꺾어주었다. 그렇게 캠핑장에 도착한 꽃들은 바람 잘 통하는 야외에서 더욱 생기 있게 피어났고, 사흘 뒤 다시 그 모습 그대로 우리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건강하고 행복하게, 오래오래 활짝 피어있길 바라는 소중한 마음. 너를 위해 준비된 작은 소망들이 이토록 소중하게 간직되었다는 이야기를 언젠가 꼭 그 아이에게 전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