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아한 삶을 위하여

라넌큘러스 핑크레이디 이야기

by 정벼리

산다는 일이 우아하기란 참 어려운 법이다. 그 사실이야말로 우리 삶에서 가장 슬픈 지점이 아닐까. 잘 먹고 잘 싸기만 해도 사랑스러운 유년기에도, 인간은 기본적 욕구를 채우기 위해 하루에도 몇 번씩 악다구니를 쓰며 울어대야 한다. 스스로의 생을 책임지는 독립적 개체가 된 이후의 삶은 갈수록 거칠고 투박해진다. 가끔은 추하기까지 한 시간들을 꿋꿋이 버텨내야만 비로소 생(生)이라 부를 만한 것이 이어진다. 영화나 소설 속 특별한 사건이 아니더라도, 그저 평범한 하루를 살아내기 위해 우리는 매일 아등바등 애를 쓴다. 근래의 기록을 대충 훑어보아도 여유롭고 산뜻한 하루는 없었다.


아침마다 울려 대는 알람 소리에 힘겹게 치켜뜨는 눈꺼풀은 시지프스의 형벌처럼 무겁다. 헐레벌떡 출근 준비를 하는 틈틈이, 아이를 향한 잔소리가 후렴구처럼 따라붙는다. 딴짓하지 말고 아침 먹어라, 가방은 다 챙겼니, 숙제는 왜 또 테이블 위에 굴러다니느냐, 겉옷 단단히 챙겨라….


종종걸음으로 도착한 회사에서는 어제 혹은 그제의 내가 미뤄둔 업무들 속에서 허우적대기 바쁘다. 내 일만으로도 버거운데, 은근슬쩍 제 업무를 떠넘기려는 빌런들은 잊을 만하면 하나씩 등장한다. 전화로, 메신저로 내가 맞니 네가 맞니 한참을 다투다 보면 시간은 야속하게도 잘 간다. (물론 나 역시 누군가에게는 빌런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며 그의 하루를 괴롭혔을 터이다.) 절대 져주지 않겠다는 의지를 나름대로 앙칼지게 쏘아붙이고 전화를 끊으니 벌써 점심시간이 지나고 있다. 배식 줄은 또 왜 이리 긴지. 한참을 기다린 후에야 별 볼 일 없는 반찬이 담긴 식판을 마주한다.


통창으로 쏟아지는 오후 햇빛이 벌써 따갑다. 회의에 참석하고, 서류를 검토하고, 상사에게 보고를 마치고 나면 드디어 메모의 시간이다. 오늘 다 끝내지 못한 일을 추려 내일의 나에게 미룰 업무 리스트를 작성한다. 갈수록 기억력은 똥망이라, 적어두지 않으면 하룻밤 사이 몽땅 잊어버리고 헤매기 십상이다.


휴대전화는 종일 쉬지 않고 울려 댄다. [어머니, 담임입니다. 별이가 오늘 친구와 갈등이 좀 있었는데 통화 가능할까요.] [안녕하세요, 치과입니다. 검진 시기가 다가와 안내드립니다.] [언니, 올해 어버이날은 어떡할까?] 반갑지 않은 스팸 전화도 넘친다. "여기는 여론조사 전문기관…" 부지런히 수신 거부 목록에 추가하지만, 요즘은 번호를 바꿔가며 받을 때까지 전화를 건단다. 지독한 끈기다.


퇴근길에는 횡단보도를 건너며 배달 앱으로 동네 반찬가게에서 나물 몇 가지를 주문한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소파에 엉덩이 한번 못 붙이고 쌀을 씻어 밥을 안친다. 세탁기에 빨래를 몰아넣고, 냉장고에서 달걀 몇 알을 꺼내 휘휘 젓는다. 프라이팬 위에서 달걀물을 돌돌 말아내는 동안, 딸아이는 뒤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니며 재잘댄다. "엄마, 오늘 이 책을 읽었는데 너무 슬픈 거야. 주인공이 이래서 저랬는데…." "아, 그랬어? 진짜 슬프네. 근데 별아, 너 강아지 배변판 치웠니?"


그 한마디에 아이는 발칵 성을 내며 발을 쿵쾅거리고 사라진다. 아니, 내가 뭘 어쨌다고…? 마침 귀가한 남편이 입이 댓발 나온 아이를 보며 한마디 보탠다. "그러니까 오자마자 치웠으면 잔소리 들을 일 없잖아." 아이가 외친다. "이 집에 내 편은 아무도 없어!" 사춘기의 서막이 열리나 보다.


저녁을 먹고 설거지와 청소까지 마치고 나면, 홀린 듯 소파에 모로 눕게 된다. 물걸레 청소기를 든 남편이 나를 흘낏 보며 묻는다. "오늘도 운동은 패스인가 보지?" 겨울부터 게을러진 몸뚱이는 벌써 기력을 다해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다. 체력을 위해 운동을 가야 한다는 걸 머리로는 알면서도, 천근만근인 몸을 일으킬 엄두가 나지 않는다. 오늘도 아 몰라, 패스다.


아무 말도 못 들은 척 쇼츠 영상에 코를 박아보려는데 남편이 다시 말한다. "여보, 이거 꽃병 물 갈아야겠어." 지난 주말 사다 놓은 라넌큘러스 이야기다. 아이고, 저건 미룰 수 없지. 나는 결국 곡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킨다. 꽃병을 씻어 찬물을 받고, 절화 수명 연장제를 붓는다. 손상된 줄기 끝을 가위로 싹둑 잘라내고, 괜히 사진 한 장 찰칵 찍어본다. 분명 똥글똥글한 봉오리로 데려왔는데, 며칠 새 꽤나 어여쁘게 피어났다.


라넌큘러스 핑크레이디, 부디 오늘에 우아함을 한 방울 더해줘.


세상에는 수많은 라넌큘러스가 있다. 그중 '핑크레이디'는 널리 알려진 표준종이다. 얇은 습자지 같은 꽃잎이 수백 장 겹쳐진 꽃봉오리를 사 오면, 매일 조금씩 속내를 드러내며 피어난다. 종래에는 중심을 향해 촘촘히 뭉쳐진 구(球) 형태로 팽창하듯 피어나는데, 그 모습이 안뜰을 거니는 양반가 아가씨의 한복 자락처럼 곱고 우아하다.


핑크레이디는 이름처럼 꽃잎 끝에 수줍은 분홍빛을 머금고 있다. 재미있는 건 만개한 후에 나타나는 모습이다. 분홍색 색소가 중력을 따라 아래로 떨어지는 듯한 모양새를 보이기 때문이다. 꽃의 아래쪽엔 핑크빛이 뭉쳐 남고, 중심부 위쪽은 흰머리가 샌 것처럼 색 바랜 아이보리빛을 띤다. 그리고 조금씩 시들해지면서 꽃뭉치 그대로 픽 고개를 떨군다. 주변을 온통 떨어진 꽃잎투성이로 만들지 않고 통째로 사그라지니, 마지막 모습까지 우아함의 절정이다.


우리는 물 위의 백조의 자태만을 바라보며 감탄하지만, 물밑에는 치열한 발길질이 있다. 무대 위 발레리나의 몸짓 뒤에는 셀 수 없는 땀방울이 배어 있다. 라넌큘러스 핑크레이디의 고운 꽃잎 사이사이에도 제 나름의 전력을 다한 노고가 숨어 있다.


식물이 꽃을 피운다는 건 엄청난 에너지가 드는 일이다. 하물며 수백 장의 꽃잎을 만들어 유지하는 건 얼마나 고된 일일까. 라넌큘러스는 광합성으로 얻은 에너지를 모두 투입해 한 장 한 장 제 꽃잎을 정성껏 짜낸다. 그리고 모든 양분을 꽃머리로 밀어 올려 그 자태를 지켜낸다. 텅 빈 빨대 모양의 줄기는 물을 더 빠르게 전달하기 위한 전략적 진화의 산물이다. 피워내는 데서 그치지 않고 질 때까지 끝없는 펌프질로 물을 퍼 올린다.


역시 거저 얻어지는 것은 없나 보다. 그러니 꽃병의 물을 갈아주는 것으로 이 지난한 하루를 마무리하며 위안을 얻어볼 수밖에. 오늘 내가 용을 쓰며 보낸 이 지리멸렬한 시간들이, 결국 인생이라는 꽃의 꽃잎이 되어줄 거라고. 가까이서 보면 조금 서글플 만큼 거칠고 투박한 순간들이지만, 조금 떨어져 관조하면 여기에도 나름의 우아함이 깃들어 있을 거라고 믿으면서 말이다. 적어도 오늘 밤, 나의 작은 거실은 이토록 섬세한 꽃송이 하나가 환하게 빛을 뿜어주고 있지 않겠어.




일요일 연재
이전 08화모르고 만나는 풍경의 즐거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