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고 만나는 풍경의 즐거움

목련 이야기

by 정벼리

꽤나 북쪽에 위치한 우리 동네에서는 매년 남쪽나라의 꽃들이 모두 만개한 이후에서야 겨우 꽃봉오리들이 막 고개를 내민다. 조금 게으름을 부리다 약속시간에 늦었다는 듯 부산스럽게도 불쑥불쑥.


내 출근길에는 아파트 사이로 목련 나무가 줄지어 서있는데, 건물 그늘 때문인지 특히나 개화가 더딘 편이다. 이제야 하나둘 꽃망울을 막 터뜨릴락 말락 간을 보고 있다. 오늘 아침에는 종종 대는 발걸음을 기어이 멈추고 목련 꽃을 향해 두 팔을 쭉 뻗어 하릴없이 연신 사진을 찍고 말았다. 이 녀석들, 오늘 오후에는 함지박만 한 꽃을 기어이 피워내겠구나 싶어서.


찰칵찰칵 셔터를 눌러대며 비집고 나오는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이번 주말에는 흐드러지게 핀 목련 사이를 누벼야지. 남편과 아이 손을 꼭 붙잡고 꼭 산책을 나와야지. 아, 강아지도 데리고 가야겠다. 혹시 똥강아지가 떨어진 목련 꽃잎을 덥석 맛보려고 하면 이거 어쩌나... 즐거운 계획들이 머릿속에 퐁퐁 떠올랐다.


출근길 바쁜 발걸음을 붙잡는 꽃봉오리들


목련이 가장 설레는 시기는 언제일까.


꽃망울들이 툭툭 터져 만개한 흰 송이가 주렁주렁 가지를 휘청이게 하는 것도 장관이지만, 나는 그보다 조금 앞선 시기를 꼽고 싶다. 꽃눈에서 마침내 봉오리가 솟아오르고, 세상 밖으로 피어날 채비를 마친 무렵이 아닐까 하고. 마치 요즈음 우리 동네처럼 말이다.


겨울 추위가 드디어 물러가고, 산수유가 재잘재잘 이제 무채색의 시간은 가고 산천이 꽃으로 물들어가리라는 예고를 마치면 그때에 목련이 피어난다. 어린아이 주먹만 한 꽃봉오리가 툭툭 고개를 내밀면 드디어 봄꽃의 향연이 시작되는구나 싶어 가슴이 설렌다. 하지만 눈부신 목련의 무대는 퍽 짧다. 나무 전체가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꽃을 피워냈다가, 일주일 남짓 지나면 미련 없이 후두둑 꽃잎을 떨궈버리기 때문이다. 도톰하고 커다란 꽃잎은 의외로 비바람에 취약하다. 어쩌다 자태를 뽐낼 새도 없이 봄비 한 번에 허무하게 져버리는 해에는 마음이 그렇게 헛헛할 수가 없다.


짧게 머문다고 하여 쉽게 피어난 꽃은 아니다. 한 송이 목련꽃이 피기까지는 아주 많은 날들이 필요하다. 만약 우리가 오늘 마당에 목련 씨앗을 심는다면, 첫 꽃을 보기까지 꼬박 10년에서 15년은 기다려야 한다. 나무가 성목이 된 후에도 매년 꽃을 피워내는 과정은 지난하기 짝이 없다. 목련은 전년도 여름부터 이미 다음 해 봄에 피울 꽃눈을 만들기 시작한다. 늦가을 찬바람이 불면 보슬보슬한 털옷을 껴입니다. 그리고 5개월 이상을 인내하며 이듬해 봄을 기다린다. 그렇게 기나긴 준비 끝에 피어난 꽃이건만, 찬란함이 고작 열흘을 버텨내기 어려운 것이다.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 조금 섭섭하기까지 하다.


이건 꼭 큰맘 먹고 준비해 떠나는 여행을 닮았다. 한참 전부터 비행기 티켓을 예매하고, 숙소도 고르고 골라 예약하고, 온갖 유튜브와 블로그, 카페를 뒤지며 여행 정보를 탐색하는 시간들. 설레는 마음 한 톨 새나갈까 꼭꼭 눌러 여행계획을 세운다. 10분도 허투루 쓰지 않겠다는 각오라도 한 것처럼 오만 좋은 것만 꽉꽉 채운 여행일수록, 막상 도착하면 알찬 듯하면서도 어딘가 아쉽고 가끔은 허무하다. 여행이 끝나갈 때쯤엔 어쩐지 비행기가 날아오르기 직전, 공항에서의 설렘이 가장 즐거웠던 것 같은 묘한 기분. 나만 느끼는 건 아닐 거라 믿어본다.


때로는 조금 허술하게 떠난 여행이 더 찬란할 때가 있다. 골목길 모퉁이에서 예상치 못한 풍경을 마주했을 때, 별생각 없이 베어 문 길거리 아이스크림이 혀끝을 짜릿하게 때릴 때, 차창 밖 풍경에 말없이 매료될 때. 무엇이 기다릴지 모르고 맞는 하루는 예측 불가능한 일들로 채워져 더 굴곡지고 빛난다. 그래서 언젠가부터는 여행을 준비할 때 너무 많은 힘을 들이지 않으려 부러 애쓰는 편이다. 미지의 설렘을 남겨두어야 도착한 뒤에 더 신날 수 있으니까.


봄꽃을 즐기는 마음도 그렇게 조금 비워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꽃이 지기 전에 할 일을 너무 빽빽하게 적어두면, 막상 꽃과 눈이 마주친 순간의 즐거움을 놓칠지도 모르니 말이다. 낯선 골목 끝에서 선물처럼 마주한 풍경처럼, 아무것도 모르고 맞이한 아름다움에 그저 튀어나오는 탄성 하나로 충분할 게다. 그 황홀한 탄성을 위해, 어쨌든 주말에는 꼭 남편과 아이의 손을 꼭 붙잡고 동네 산책을 나서야겠다.












... 그리고 마침내 손 붙잡고 마주한 탄성.

그리고 마침내 손 붙잡고 마주한 탄성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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