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여행은 도망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by 미코더 Mecorder Mar 08. 2025

 시간이 상대적이라는 것을 점점 실감하고 있는 요즘이다. 분명 이십대 초반에는 초등학생 때와 비슷했다. 생각보다 내게 많은 시간이 주어진 것 같고 기회도 그만큼 많을 것 같았다. 그래서 여유를 부렸다. 남들보다 특출난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숨겨둔 비장의 무기가 있던 것도 아닌데 그냥 어리다는 것 하나만을 믿고 패기 있게 시간을 마구 흘려보냈다. 


 처음 떠난 여행은 '1년 쯤이야'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재수 생활을 마치고였다. 이미 신입생 생활을 화끈하게 즐기고 있는 친구들을 부러워하며 '나 수능 보면 바로 여행가는거야. 알지?' 를 입에 달고 살았다. 그때는 여행이 어떤건지도 모르고 그저 친구들과 노는 것을 기대하며 꺼낸 이야기였지만. 수능 결과를 확인하고 나서는 그 이야기가 쏙 들어갔다. 당장 내 운명이 어떻게 될 지 모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위태위태한 와중에 약속을 기억하고 있던 친구들은 어김없이 여행 이야기를 꺼냈다. 


 "야! 여행 가자. 어디로 갈까. 대만 어때."


 예나 지금이나 결정력 하나는 끝내주는 친구들은 그 자리에서 비행기표를 알아봤다. 나는 삼수를 고민했다. 집에선 당연히 안된다고 할 터였지만 그때 당시만 해도 내 자신을 인정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다 문득, 또 똑같은 1년을 보내게 된다면 그거야 말로 정말 시간을 버리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고민해보겠다고 해놓고 나는 이미 아르바이트를 구하고 있었다. 무지하게 긴 노동 시간도 개의치 않았다. 여행 비용을 마련하려면 어쩔 수 없었다. 한 번 놀 계획을 세우기 시작하니까 이 전으로 돌아가는 게 불가능했다. 그래서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냥 다니자. 다니다 정말 마음에 안 들면 반수하면 되지. 지금 생각하니까 그렇게나 무모한 생각일 수가 없다. 


 기나긴 수험생활에 지친 나의 첫 도망지는 대만이었다. 부모님 없이 떠난 첫 여행은 그야말로 우당탕탕이었다. 영혼의 단짝이라고 생각했던 친구들이 학교에서와는 달리 여행을 하는데에 있어서는 성향이 다른 경우도 있었고 나도 모르게 낯선 곳에서 생각지도 못하는 순간에 예민해지는 모습을 발견하기도 했다. 


 '우리 다시는 여행가지 말자' 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지만, 나는 지금도 그 친구들과 여행하는 걸 가장 즐거워한다. 이래서 뭐든 첫단추가 중요하다고 하나보다. 


 결과적으로 첫 도망은 꽤 성공적이었다. 도망이 나쁜 것만은 아니구나. 도망에는 자책과 후회만 남는 줄 알았더니 그 뒤에 다른 것들이 있다는 걸 처음 배웠다. 공부할 때는 쉽게 느낄 수 없던 성취감, 출발하기 전에 닳도록 읽었던 여행 책자에서 막연히 상상해보던 그 나라의 진짜 분위기, 냄새, 내가 만난 낯설지만 좋은 사람들. 여행이 아니었다면 절대 몰랐을 영역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도망치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부끄러워 하지 않았다. 이전보다 훨씬 편하게 도망을 선택했다. 


 첫 여행의 충격이 컸던 나는 모든 것을 여행에 가져다 붙이기 시작했다. '이걸 안 사면 여행을 한 번 갈텐데.', '조금 힘들어도 이 시간 더 일하면 여름 방학에는 여행 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조금 더 저렴하게 다녀올 수 있는 여행지 없을까.' 부작용이었다. 현실은 제쳐두고 어떻게서든 대한민국 바깥으로 한 번 더 나가겠다고 무던히 애를 썼다. 


 두 학기 겨우 모아서 방학이 되면 어디로 떠날지 고민했다. 학교 생활에 적응을 못하고 붕붕 떠다니면서도 다시 공부를 해서 다른 학교를 갈 생각을 하는게 아니라 아예 휴학을 하고 훌쩍 멀리 떠나면 조금 더 좋은 생각이 나지 않을까 하는 그런 말도 안되는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나는 내가 추진력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정신을 차리고보니 이미 휴학계를 내고 난 뒤였으니까. 



2편에서 계속. 

브런치 로그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