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어도 나에게는
그렇게 흔히들 말하는 '여행중독'에 걸린 나는 내가 발을 뻗을 수 있는 곳이라면 일단 떠나고 봤다. 대만을 시작으로 그다음에는 비슷한 느낌의 홍콩 그다음에는 조금 더 멀리 가볼까 해서 베트남, 친구가 유학을 하고 있다는 핑계로 중국, 진짜 멀리 떠나보고 싶어서 미국, 캐나다, 남들이 다 갈 때는 안 가고 뒤늦게 합류한 유럽까지.
물론 아직도 안 가본 곳이 훨씬 많고 가고 싶은 나라는 꾸준히 업데이트 중이다. 그런데 모순인 점은 내가 여행을 사랑하는 것에 비해 기록에 대해서는 굉장히 소홀했다는 거다. 여행 초반에는 꾸준히 기록을 하다가도 이상하게 여행을 하고 있을 시점에 기록을 하면 여행을 방해받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그래서 그 흔한 인스타그램도 여행 중에 여는 일이 별로 없다. 하도 감감무소식인 탓에 친구들이 '너 거기까지 갔는데 사진이나 좀 올려봐!' 하고 채근하면 그때서야 주섬주섬 앨범을 열어 지난 시간을 살펴본다.
그렇다. 나는 게으르다. 예전에는 '나는 왜 이렇게 게으른가.'에 대해 굉장한 스트레스를 가지고 살았는데, 물건도 오래 쓰면 개발자의 의도와는 다르게 나의 용도에 맞게 쓰게 되는 것처럼 나 자신도 약간 그런 느낌인 것 같다. 처음에는 부모님이 인도한 대로 성장하다가 내가 자라면서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들에 의해 멋대로 가지치기를 해나가면서 특정한 기준에서 점점 멀어지다 보면 그게 이상한가? 싶다가 결국에는 그게 '나'임을 인정하게 된다.
나는 그 시간을 조금 길게 겪은 것 같다. 세상에서 '돈'이 최우선 적인 가치가 되는 건 많이 슬픈 일이지만 나는 어릴 때 내가 무언가 필요한 시점에 늘 부족했던 경험이 조금 진하게 남아있는지 아직도 어떠한 일을 벌이려고 하면 '돈'을 가장 먼저 생각한다.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지만 여행은 돈이다. 보통 시간을 돈이라고 하는데 여행은 시간과 돈, 두 가지가 확실하게 필요한 행동이기 때문에 절대 '돈'의 가치를 무시할 수 없다.
다만, 항상 '돈'에 눌리는 삶을 살았던 내가 여행에는 큰 고민 없이 돈을 투자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만큼 확실한 보상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꼭 좋은 숙소에 가서가 아니라, 한국에서는 듣도 보도 못한 화려한 음식을 먹어서가 아니라 여행이라는 행위 자체에서 얻는 것들이 내게는 너무도 컸다.
나는 아직도 해외에 나가면 외로움을 느낀다. 그건 한국에서 느끼는 외로움보다 조금 더 원초적인 외로움이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으로 떠나고 싶어서 내 발로 간 건데 진짜 나를 모르니까 이상한 서운함을 느끼는 거다. 그런데 나는 그 감정이 좋다. 오로지 나한테 집중할 수 있어서 그렇다. 사실 한국에서도 나를 아는 사람보다 모르는 사람이 훨씬 많지만 어째서인지 조금씩은 다 연결되어 있는 느낌을 받는다. 그런데 언어도 잘 모르는 나라에 뚝 떨어지면 일단 나는 갑자기 세상에서 모든 게 단절되는 것 같다는 웃긴 생각을 한다 (사실 엄청 촌스러운 생각이다. 요즘 같이 다 연결되어 있는 세상에서 무슨...)
그런데 거기서 희한한 즐거움도 얻는다. 그 나라 사람들의 문화나 언어를 학습해서 새로운 연결을 만들고 싶어 한다. 이게 진짜 이상하면서도 중독적이다. 나는 절대 그 나라 사람이 될 수 없지만 잠깐 그런 삶을 살아보고 싶어 한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 편에는 '역시 나는 한국이 제일 잘 맞다.' 그런 생각도 한다.
그렇게 나를 찾아간다. 전부 내팽개치고 도망간 곳에 당연히 낙원은 없지만 내가 살아가야 하는 시간에 대한 힌트를 얻는다. 나는 사람 많은 곳은 싫어하는구나. 그럼 굳이 그런 곳을 내 발로 찾아가면서 스트레스를 얻지 말아야지. 나는 건축양식 구경하는 걸 재밌어하는구나. 그럼 삶이 조금 지루할 때는 재미있는 건축물이 있는 곳을 놀러 가야지. 나는 언어 공부에 의외로 욕심이 있구나. 제자리걸음이라고 생각될 때는 외국어 공부를 시작해 봐야지. 무기력한 발상일 수도 있지만 나는 가끔 삶에 재미를 잃는다. 그래서 나는 이런 장치가 필요했다. 내가 포기하지 않고 이 삶을 유지할만한 것들. 그런 점에서 나는 여행이 나를 살렸다고 믿는다.
누군가는 얘기한다. 그 돈이면 뭘 못해.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솔직히 보통 홧김에, 아니면 충동적으로 여행을 결정하는 일이 많았기에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조금 더 신중히 생각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가끔 한다. 그렇지만 그렇게 떠났을 때 내가 얻은 생각이나 경험들을 돌이켜보면 절대 같은 결괏값을 낼 수 없기 때문에 그런 생각은 길게 하지 않으려고 한다 (안 한다고 하면 완전 거짓말이다. 안 할 수가 없다. 그 돈이면 진짜 어학연수를...)
그래서 왜 여행 기록을 시작했냐면, 여행을 시작한 지 10년이나 됐으니까 한 번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이리저리 흩어진 기억의 조각을 모을 시점이 온 것 같다. 요즘 들어 내가 어떤 사람인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고 있다. 취업 준비를 하고 있다는 뜻이다. 또래에 비하면 한참 늦은 시작이지만 이미 늦은 걸 뭐 어떡하겠나. 그래서 이왕 늦은 거 나에 대한 탐구를 제대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여전히 도망을 꿈꾸는 중이다. 분명 발리로 떠나기 전에 이 채널을 시작해야겠다고 다짐했는데... 벌써 한국에 돌아온 지 두 달이나 지났다니. 맙소사. 내가 이렇게 게으르다니까? 그래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말은...
'시작이 반이다.'
시작하면 뭐라도 되겠지. 마음 가는 대로 나는 다시 도망을 준비하련다. 그리고 이 공간은 더 나은 도망을 위한 발판이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