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숲의 고요함
2018년 즈음, 대학교 막 학기를 다니면서, 리틀 포레스트를 연달아 봤다.
일본 작품 두 편과 한국 작품 한 편을 합해 무려 여섯 시간 남짓한 시간을 일본과 한국의 농촌 풍경을 바라보면서 일요일을 보냈다.마음이 열에 달뜬 것처럼 이상하게 쿵쾅대는 하루들이었는데, 몸과 기분은 물먹은 쿠션처럼 도무지 생기를 찾을 수가 없었다. 침대 매트리스 옆에 하얗게 먼지가 쌓인 것을 보고 너무 놀랍고 부끄러워 마른 걸레를 물에 적셔 닦아 내었다.
집을 방문했던 두 명의 친구가 입고 벗었던 옷가지들을 빨래통에 넣고 세탁기를 돌렸다. 가지런히 나의 옷들을 접어 놓고 간 두 사람에게 안녕, 하고 마음 속으로 인사를 했다. 어디에서든지 잘 살길 바라. 건강하고. 아프지 말고.
수없이 많은 사람들 생각을 하면서 영화를 봤다. 작은 마을 코모리에서는 이츠코씨가 스토브 위에 말린 고구마를 굽고 있다. 소복하게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떫은 차를 마시면서 노릇하게 구워지는, 얇게 말린 고구마. 추운 밤에 찾아온 얼룩 고양이 손님은 2층 다락방 어딘가에서 책장 넘기는 소리와 고구마가 익어가는 내음을 맡으며, 자신에게 가장 아늑한 장소를 찾아 눈을 감는다. 생지를 재우며 맛있는 수제비를 떠올리던 내가 생각난다. 2층 어딘가 혹은 3층 어딘가의 옷장에서 몰래 자신만의 아늑함을 즐기던 어느 고양이도.
한국의 리틀 포레스트를 보면서 느낀 점은 개인적으로 부산스럽다는 생각이었다. 예쁜 화면에서 일하는 멋진 사람들이 나오지만 그들이 나누는 대화는 내가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을 방해했다. 공감해야 하는 지점이 뚜렷했다. 노량진에서 임용고시 준비를 하다 지친 ‘혜원’은 혼자서 끼니를 해결하며 공부를 하는 한국의 많은 자취생들의 현실을 반영한다. 편의점 도시락으로는 자신의 허기가 채워지지 않는다며 작중 인물들에게
‘배가 고파서’
고향에 돌아왔다고 고백하는 장면은 누군가에게는 굉장히 씁쓸하게 다가갈 것이다. 혜원의 동창인 ‘재하’ 역시 대학을 나와 기업에 취직했지만 남들의 눈치를 보며 진짜 자신으로 살아가기 힘든 도시 생활에 환멸을 느끼고 고향으로 돌아와 농사일을 한다.이러한 인물들의 개인적인 사정은 회상을 통해 직접적으로 관객들에게 상황을 제시된다. 그렇지, 한국을 살아가는 내 나이 또래에게는 보편적인 고민이 있었지. 나는 이런 고민을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나는 이런 고민에 대해서 함께 공감해야지.
한국의 리틀 포레스트는 주된 인물인 혜원의 고군분투가 이어지면서 그녀를 지지해주고 때로는 그녀와 부딪치는 인물들의 서사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재하와 은숙이 던지는 대사에서 혜원은 자신의 귀향이 갖는 의미가 도피인지, 도시에 매몰된 현대인으로 살아가기를 거부하고 주체적인 개인으로 거듭나기 위한 탐색의 과정인지 고뇌하는데 큰 역할을 한다. 따라서 영화에서는 타인과 혜원이 나누는 대화가 서사를 이끌어나가는 중심 동력으로 기능한다.
일본의 리틀 포레스트 역시 이츠코와 그녀를 감싸 안은 코모리의 공동체가 이츠코의 성장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 사실이지만, 글쎄. 이츠코가 혼자서 행위하고 그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독백, 그리고 이츠코의 마음에서 울리는 방백이 나는 영화의 서사를 꿋꿋이 이끌어나가는 유일무이의 동력이라고 느꼈다.
이것은 비록 주변 인물들이 한 인물의 성장에 있어서 강력한 역할을 하지만 결국 한 인물이 진정한 성장을 이루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고 그에 따른 대답 역시 자신으로부터 찾아야 함을 말해준다고 나는 느꼈고 그렇게 믿는다. 한국의 리틀 포레스트가 다채로운 인물들 사이에서 자신의 영역을 조금씩 찾아가는 여정을 그렸다면, 일본의 리틀 포레스트는 다채로운 자연 속에서 자신이 겪은 일련의 경험들과 자신과의 선문답을 통해서 그 어떤 외부의 영향에도 흔들리지 않을 진정한 주체를 확립해 나가는 여정이라고 생각했다.
헛된 망상이나 환상 따위가 생긴 것은 아니지만 어디에 존재하는지 모를 고요함이 영화가 끝나고 나에게 다가온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절실히 필요한 것 같다. 밤이면 너무 많은 외로움이 한꺼번에 일등을 다투며 나라는 골인지점을 향해 전력질주를 한다. 맹렬하게 쫓겨 들어오는 그들을 위해 나는 어떤 영역을 내어 주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따뜻한 살이 그립고, 마주치는 눈빛이 애닯지만 깍지 낀 손이 또한 고되다. 결국 리틀 포레스트를 보면서 느낀 건 오며 가며 내 숲을 헤집고 뒤집으며 남들을 위한 공간을 만들고, 깎고, 또 부수고 다시 개축하면서 할수록
땅은 말라가고 동물들은 떠나가고 잎은 노오래진다-라는 생각이다. 내 숲에 많은 내가 뛰어놀 수 있고 내 숲을 가꿀 수 있는 나만을 허용해야 한다. 끝없는 외로움에게서 벗어날 수 없는 건 아마도 내 안에, 내 숲에, 내가 없어서 그런가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