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놓치고 있던 영어에 대한 이야기

세계사를 품은 영어 이야기 | 필립 구든

by June H


#1


나는 무엇을 놓치는가?


'음악이란 목소리와 악기를 활용하여 어떤 생각이나 감정을 표현하는 활동을 뜻한다. 따라서 어떤 생각이나 감정이 배제되어 있는 목소리나, 악기를 통해 내는 소리는 음악이라고 정의되지 않는다. 그런데 여기서 과연 그것을 어떻게 판단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사람에 따라서 충분히 음악이 아닌 것을 음악으로 느낄 수도 있는 것이고, 음악임에도 불구하고 음악이 아닌 소음 따위로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필요에 의해 자연스럽게 장르라는 것이 탄생했다. 어떤 음악적인 형식이 먼저 있었고, 그것이 어떤 특정한 생각이나 감정을 표현하는데 효과적이라는 것이 알려지면, 그리고 그 음악적 형식과 그 특정 생각이나 감정을 매치시키는 빈도가 늘어나면, 그 음악적 형식이 하나의 장르로 굳혀지게 되는 것이다. 물론 모든 장르가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탄생하는 것은 아니지만 보편적으로는 그렇다고 볼 수 있다.'


음악을 전공한 사람 또는 이에 관련된 지식이나 경험이 풍부한 사람이라면 위 글에서 주장하는 내용이 완전히 틀렸다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렸을 것이다. 내가 하는 실수는 보통 이런 식이다. 약 2개월 전, 문뜩 제 아무리 내가 취미생이고, 악기 중에서도 코드를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는 드럼이라는 악기를 배우고 있는 사람이라고 해도 기초적인 음악적 이론이나 지식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우선 맞든 틀리든 간에 무작정 내가 느끼는 바를 적어보았다. 음악은 어떻게 정의 내릴까? 장르라는 것이 생겨난 이유는? 장르에 맞는 반주는 무엇일까? 반주의 유형에 따라 어떤 디테일들을 신경 써야 할까?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들을 적어보았다.


그리고 그다음 주 레슨 시간에 선생님께 정리한 글을 보여 드렸고, 내가 잘못 알고 있는 부분이 있다면, 정정해 주실 것을 요청드렸다. 쭉 읽으시고는 다른 것들은 모두 생각하기 나름이기에 넘어갈 수 있지만 장르에 관한 부분은 확실히 내가 잘못 알고 있다고 말씀해 주셨다. 그러고는 '이렇게 완전히 틀린 방향으로 생각을 할 수 있구나'라는 깨달음으로부터 비롯된 듯한, 약간의 호기심을 머금은 얼굴로 나에게 클래식에서부터 실용음악으로 이어지는 전반적인 시간에 따른 장르의 흐름에 대하여 설명해 주셨다. 간단히 정리해 보자면, 클래식은 종교음악으로서의 성격이 강하며, 특정 시대의 귀족 문화를 반영한 음악이다. 한편, 실용음악은 특히 미국에서 아프리카계 전통 음악과 유럽 클래식 음악이 융합되면서 형성된 음악이다. 이 과정에서 전쟁, 기술의 발전, 그리고 다양한 문화적 혼합이 실용음악의 발전과 대중화에 중요한 촉진제 역할을 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실용음악을 클래식의 연장선상에 있는, 클래식의 발전된 형태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내가 놓쳤던 부분은 음악을 논하는 데 있어서 역사와 문화와 같은 인문학적 시각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던 것이다. 편견뿐만 아니라 좁은 식견 또한 대상을 왜곡하여 바라보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몸소 느낄 수 있었다. 좁은 시각에 머문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나 문화를 이해하는 데 있어 어떠한 장벽을 하나 세워두는 것이며, 더 넓은 시각에서 문제를 바라볼 기회를 놓치는 것과 다름없다.





#2


나는 왜 역사를 기피하는가?


인문학 중에서도 내가 특히나 부족한 부분은 역사일 것이다. 부끄러운 이야기일 수 있다. 출처는 불분명하지만 누구나 한 번쯤 들어본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말이 있듯이 역사의 중요성은 몇 번을 강조해도 부족하다고 입을 모아 말한다. 하지만 쉽사리 관심이 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세상이 급변하기 때문에 과거로부터 배울 것이 없다고 생각해서일까? 역사의 긴 호흡을 감당할 집중력과 시간이 없어서일까? 가뜩이나 바쁜데 들이는 시간 대비 얻을 수 있는 것이 없다고 판단해서일까? 이런 이유들도 어느 정도 있겠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한국사에 한정해서 역사를 처음 접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역사가 인문학의 영역에 있다는 것을 망각하게 되었고, 다른 별개의 카테고리로 분류해 버림으로써 역사를 과거의 있었던 사건의 나열 정도로만 여기게 되었던 것 같다. 역사에 대해여 생각해 보면 A4용지를 빼곡하게 채운 연표의 이미지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역사에 대한 오해를 풀기 위해, 역사라는 분야를 한국사로 한정하지 않고, 그 범위를 모든 대상으로 확장시키며, 역사와 인문학을 떼어 놓지 않으려는 노력에서 나는 과연 역사에 관심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건 아닐 것이다. 사실, 아무도 그런 말을 할 수 없을 것이다.





#3


놓치고 있던 영어에 대한 이야기


인문학적 시각의 부재로부터 느꼈던 나의 부족한 식견을 마주한 경험과 역사에 대한 관점의 변화는 시간이 흘러 우연한 계기로 영어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졌다. 잠에 들기 전, 갑자기 최근에 참여했던 원어민과의 오프라인 언어 교환 모임에서 만난 한 중년의 한국인 아저씨가 구사하는 영어가 떠올랐다. 느리지만 영어를 온전히 영어로 말하는 듯한 모습. 언어의 구문과 어휘를 전혀 의식하지 않은 채, 마치 영어라는 언어가 자연스럽게 그에게 흐르는 것처럼 보이는 그 모습에서, 영어를 단순한 도구가 아닌, 사고의 방식으로 접근하는 그의 태도가 느껴졌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놓치고 있던 영어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 주었다. 그동안 나는 영어를 단순히 의사소통의 도구로만 보았고, 그 안에 담긴 문화적, 역사적 맥락을 고려하지 않았던 것이다. 마치 한국어를 한국인의 시각에서만 바라보는 것처럼, 영어도 그 언어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문화적 배경을 함께 이해해야 한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었다.


한국어는 맥락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불필요한 요소를 생략하고 간결하게 표현되지만, 이는 대화의 배경이나 맥락을 공유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불친절하거나 이해하기 어렵게 느껴질 수 있다. 반면, 영어는 상대방이 배경이나 맥락을 모른다는 전제하에 모든 정보를 명시적으로 전달하는, 저맥락적인 표현 방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감정적으로는 좀 차갑게 느껴질 수 있어도 매우 논리적이고 직관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 한국어와 영어에 대한 이러한 감상은 사람에 따라 충분히 그렇게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단순 의사소통의 도구라는 측면에서 두 언어를 바라보게 되면, 여기서 더 나아가, 자칫 한국어보다 영어가 원래 더 이성적이고, 우월한 언어로 생각하게 되는 오류를 범할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영어의 역사를 보면 그 생각이 단번에 틀렸음을 이해하게 된다. 영어는 서유럽 변방의 작은 섬에 살았던 사람들의 대담한 자취를 따라 다양한 변화를 겪으며 오늘날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그 관성에 의해 빠르고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언어가 바로 영어이다. 영어는 그 자체로 객관적이고 논리적인 언어가 아니라, 문화적 맥락과 역사적 배경에 의해 형성된 언어로, 그 속에서 다양한 감정과 사고방식, 그리고 문화가 엮여 있다. 이를 인지하는 것은 영어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문화적 배경을 제대로 존중하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초기 영어의 이야기 - 켈트어부터 고대 영어까지


영어의 이야기는 일부 켈트족 이주 집단이 브리튼 섬에 도착하며 시작된다. 그들은 기원전 7세기경 브리튼 섬, 지금의 영국으로 이주하였고, 영국 각지로 흩어져 마을을 이루며 정착 생활을 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들 고유의 언어가 켈트어인데 켈트어는 인도유럽어족에서 오래전에 갈라져 나온 어파이다. 여기서 언어의 계통에 관하여 나무의 빗대어 표현해 보자면, 어족은 나무의 뿌리와 몸통, 어파는 몸통에서 뻗어 나온 굵은 가지, 어군은 그 굵은 가지에서 비롯된 잔가지, 마지막으로 어라고 부르는 것은 그 잔가지 끝에 피어있는 잎사귀라고 할 수 있다. 좀 더 깊게 들어가 보자면, 기원전 7세기경에서 2세기경 영국 전역에서는 켈트어파 중에서도 도서켈트어군에 속한 언어들이 주로 사용되었다. 도서켈트어군은 게일어군과 브리튼어군으로 나누어지는데, 지금의 잉글랜드 지역에서는 그 당시 브리튼어군에 속한 언어들이 주로 쓰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현재 쓰이는 영어에서 켈트어의 흔적은 찾아보기가 매우 어렵다.

기원전 55년과 54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보낸 원정대가 두 차례에 걸쳐 영국을 공격하였으나 더 이상의 진전은 보이지 않았던 것과는 다르게, 기원후 43년,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군대가 영국에 상륙하면서부터는 본격적인 로마 제국의 영국 침공이 시작되었다. 로마인들이 영국을 침공한 주된 이유는 경제적인 부분 때문이었으므로 그들 입장에서는 영국으로부터 세금만 제때 잘 거둬드리면 문제 될 것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기존과 같이 켈트족에게 나라를 다스리게 하였으며, 그들이 사용하던 언어인 라틴어에 대하여 강요하지 않는 등 회유적으로 그리고 간접적으로 영국을 지배하였다. 이런 식이었다 보니 약 400년간 로마인의 지배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돌아간 후에 켈트족들의 언어에는 라틴어의 흔적이 거의 사라지다시피 했다. 그마저도 일부 지명의 특정 부분으로 희미하게 남았을 뿐이다. 대표적으로 맨체스터의 -chester는 라틴어의 castra에서 유래되었으며, 그 뜻은 군대가 임무 수행을 위해 일정 기간 머무는 장소를 일컫는 주둔지에 가깝다.

로마가 영국에서 철수하고 얼마 되지 않아 또 다른 점령자가 나타났으니, 그들은 각각 덴마크, 독일 북부, 네덜란드에 살던 앵글족, 색슨족, 유트족이었다. 로마와는 다르게 비교적 소규모로 구성된 이들은 여러 차례에 걸쳐 기습적인 공격을 통해 부분적으로 영국의 땅을 점령하기 시작했고, 끝내 영국 땅 전체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들이 영국 땅으로 온 이유는 매우 복합적이기 때문에 결정적인 계기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단정 지어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로마 제국의 철수 이후에 여러 방면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이 이어졌고, 이것이 그들의 점령에 유리하게 작용했다는 것이다.

언어에 관한 부분은 역사의 커튼 속에 가려져 더욱 알 수 없는 부분들이 많다. 그들이 쓰던 언어는 인도유럽어족 중 게르만어파에 속하는 언어들이었는데, 게르만어파는 북게르만어군, 동게르만어군, 서게르만어군으로 나누어졌고, 이후 북게르만어군은 지금의 아이슬란드어, 스웨덴어, 덴마크어로, 동게르만어군은 현재는 소멸된 고트어로, 서게르만어군은 영어, 네덜란드어, 독일어로 분화되었다. 앵글족, 색슨족, 유트족, 그들의 언어는 같은 게르만어파에서 갈라져 나왔다는 것만 공유하는 전혀 다른 언어였기 때문에 서로 간에 어느 정도로 말이 통했는지도 정확히 알 수가 없는 부분이다.

또한 그들의 언어는 글보다 입으로 전해진 언어였다. 반면 켈트어는 400년 가까이 로마의 지배를 받으면서도 살아남은 언어였다. 역사적으로 침략자가 선주민에게 동화되는 것이 일반적이나 켈트어는 기반이 약한 구술 언어인 게르만어, 즉 고대 영어에 의해 대체되었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에 대하여 의견이 분분하다. 그중 하나는 그들이 계획적이고 철저하게 켈트 문화 말살 정책을 펼쳤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다. 그들은 몇 백 년에 걸쳐 이룩한 켈트족의 문화에 대하여 열등감을 느꼈을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열등감은 켈트 문화를 업신여기고 무시하는 태도로 이어졌을 것이다. 더 나아가, 그들은 이 문화를 의도적으로 지우려는 정책을 펼쳤던 것으로 추정된다. 다른 주장은 고대 영어의 단어에 관한 것이다. 현재 세계적으로 가장 자주 쓰는 영어 단어 100개 가운데 대부분이 고대 영어에서 유래되었으며, 그중 상당수가 농업과 관련된 단어이다. 이를 통해 고대 영어는 삶에 밀접하게 연관된 실용적인 언어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실용적인 측면이 다른 언어들과의 경쟁에서 고대 영어가 우위를 점하는데 중요한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 시기에 영국 내에서 유트족은 앵글족과 색슨족에 동화되거나 통합되었고, 앵글족과 색슨족은 세력을 하나로 모으면서, 그들이 사용하던 게르만어파 계열의 고대 영어가 영국 땅에서 우세하게 되었다. 동시에 켈트어와 함께 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자의에 의해서든 타의에 의해서든 변방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앵글로색슨족이 영국을 지배하던 기나긴 세월 동안 영어의 발달 측면에서 두 가지 중요한 사건이 일어났다. 전자는 성 아우그스티누스의 기독교 전파, 후자는 지금은 바이킹이라고 불리는 데인족의 침략이었다. 그 당시 앵글로색슨족은 잉글랜드 지역을 여러 소왕국으로 나누어서 통치하였는데, 그중 남부에 위치한 켄트 왕국의 에설버트 왕을 아우구스티누스가 개종시켰다. 그러면서 점차 다른 왕국으로도 기독교가 전파되기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문화는 이교도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었기 때문에 원래의 신앙을 완전히 저버리지는 못했다. 그것은 요일의 이름에서 드러난다. 예를 들어 수요일 Wednesday는 Wodnes daeg 보덴의 날이라는 뜻이고, 목요일인 Thursday는 Thors daeg 토르의 날이라는 뜻이다. 이것과 별개로 어찌 되었든 언어에 있어서는 기독교의 영향으로 새로운 단어 400여 개가 고대 영어에 추가되었다.

앵글로색슨족이 영국을 점령하고 200년간의 평화로운 시기는 지나가고, 793년 급작스레 스칸디나비아에 살던 바이킹이 잉글랜드를 침략하기 시작했다. 바이킹이라는 어원을 두고도 의견이 분분하다. 작은 만을 뜻하는 고대 노르드어인 vik에서 왔다는 설도 있고, 여기저기 옮겨 다니는 그들의 모습 때문에 막사를 뜻하는 고대 영어 단어인 wic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또는 해적을 뜻하는 고대 영어인 wicing이 어원일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들의 잉글랜드의 침략에 대한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뛰어난 항해술을 가지고 있었기에 바다를 건너 잉글랜드 땅으로 들어오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앵글로색슨족은 이 호전적인 정복자들을 덴마크인이라는 뜻의 데인족, 혹은 북부에서 온 사람이라는 뜻의 노르드족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들이 쓰는 언어는 고대 노르드어라고 불렀다. 이들은 초기에는 작은 규모로 이루어지던 약탈 행위를 일삼다가 본격적으로 잉글랜드 동북부를 공격하기 시작하면서부터 9세기 후반에는 잉글랜드 지방의 절반이 바이킹의 차지가 되었다. 그마저도 앨프레드 대왕이 이끄는 군대가 반격하여 승리를 거두지 않았다면 나머지 지역도 바이킹의 영토가 되었을 것이다. 그 이후 기나긴 기간 동안 앵글로색슨족은 영국에서 바이킹과 함께 살아가야 했다.

여느 침략자나 그러하듯 바이킹도 자신들의 언어를 영국에 들여왔다. 그들이 쓰던 고대 노르드어는 고대 영어와 마찬가지로 게르만어파에 속했고, 따라서 두 언어 사이에는 많은 공통점이 있었다. 그러나 앵글로색슨족과 바이킹 간에 의사소통이 얼마만큼 자유로웠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두 언어가 충동하는 상황에서 고대 노르드어는 영어에 굴복하였다. 그리고 기독교 전파 때와 마찬가지로 고대 노르드어의 흡수는 영어 어휘를 한층 더 풍요롭게 만들어주었다. skin, skull, skill, egg, husband, sister 등 현재 우리가 쓰는 영어 단어 가운데 상당수가 고대 노르드어에서 유래했다. 또한 3인칭 단수형을 나타내기 위해 동사의 끝에 s를 붙이는 용법도 고대 노르드어의 영향인 것으로 보인다.


- 세계사를 품은 영어 이야기 | 필립 구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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