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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던펙트 Oct 17. 2024

[‘일’기] Soulful Presentation

사람들 앞에 서면 멈출 수 없는 바이브레이션에 대하여

회사를 다니는 것의 좋은 점은 살아가면서 필요하지만 내게 부족한 소프트 스킬들을 쌓아갈 수 있는 기회가 많다는 것이다.  반면, 회사를 다니는 것의 안 좋은 점은 내게 부족한 소프트 스킬들을 쌓아갈 수 있는 기회가 많다는 것이다.


나는 말을 잘하는 편이다. 심리적 안정감을 느끼는 상황에서는.

그렇지 못한 상황에서는 호흡 곤란, 흔들리는 동공, 축축함을 동반한 오한, 근육 수축으로 인한 거북목 심화 등등 다들 겪는 다양한 증상을 동반하며 말을 겨우 이어가는 수준이다.


나에 대한 변호를 조금 하자면 나서서 이야기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길을 걸은 데서 온 경험 부족 때문이라고 하고 싶다. 원래 말을 못 하는 건 아니다. 우리 엄마는 내가 정말 달변가라고 했다. 가족 피셜이라고 하니 조금 없어 보이나..? 아무튼 내가 안전한 곳이라고 느껴지거나 편안한 자리에서는 내 얘기를 듣고 있는지, 이해한 것인지를 초마다 확인해 가며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다만, VMD라는 일을 하면서는 매장 직원 혹은 타 팀 동료들과 소통하는 경험은 있었어도 장표를 띄워놓고 여럿 앞에서 의견을 개진하는 일은 드물었다. 더군다나 거의 막내 라인이었기 때문에 구태여 입을 떼 길게 말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대학생 때는 뭐 했냐고 생각할 수 있다. 열심히 회피했다. 다들 잘 알겠지만 조별 과제를 하다 보면 발표봇처럼 발표만 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나는 그런 이들을 위해 앞단에서 결과물을 기획하고 장표를 만드는 일에 심취하며 발표는 회피했다. 목소리 큰 사람이 지분이 많아 보이기 마련이지만, 기획이나 준비과정에서 많은 의도와 생각을 담으며 사실은 내가 너희들을 하드캐리하고 있다(?)는 이상한 만족감에 발표의 필요성을 느끼지 했다.


’ 발표 좀 못해도 다른 거 잘하면 된다. 회피할 수 있는 만큼 회피하면 그만이다.‘라는 생각이 대단한 착각이었음을 최근 들어 뼈저리게 실감하고 있다.

‘파는 것이 인간이다’라는 책이 있듯이, 우리 모두는 무언가를 팔아야 한다. 해가 갈수록 느낀다. 그 방법이 꼭 화려한 프레젠테이션이나 좌중을 압도하는 말솜씨일 필요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럿 앞에서 내 생각을 잘 설명하고, 이해시키고, 설득시키는 것은 시대를 불문하고 인간에게 꼭 필요한 기술이다. 수다가 아니라 타인에게 주눅 들지 않고 내 생각을 논리 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능력 말이다.


이렇게 잘 알고 있는데 정작 밥벌이와 연관되어 있는 회사에서 이게 가장 어렵다.

유독 회사에서 만큼은 내 말을 잘 전달해야겠다는 ‘메시지 중심’적 생각보다 내가 잘 말하고 있는 건지 그리고 이 이야기가 틀린 건 아닌지, 멍청하게 보이진 않을지와 같은 ‘타자 중심적이면서도 굉장히 자기중심적인 사고’를하게 되는 것 같다. 발표장에 혹은 회의실에서 나와 듣는 이는 없고 똑똑하게 보이고 싶다는 욕망만 남는 것이다. 그렇게 내가 없는 나는 어느새 소울이 충만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어나가고 있다. 보통 바이브레이션이 아니다. 내가 없어지는 만큼 내 몸속에 산소가 부족해져서 가녀린 호흡으로 겨우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내가 떨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면 증세는 심해진다.


어떻게 하면 극복할 수 있을까? 잘 모르겠어서 오늘도 떨었다. 내가 생각해 낸 방법은 이런 상황에 나를 많이 노출시켜야 한다는 것뿐이다. 이러한 긴장감이 무감각해질 만큼. 그래서 정말 회의가, 회사가 싫을 때가 많지만 까짓 거 떄려 쳐도 그만인데 돈 받으면서 스피킹 연습 하러 간다고 스스로를 다독인다. 그리고 내가 타인의 발표나 이야기를 들을 때를 계속 되뇐다. 사실 대체로 말하다 삐끗하던 텀블링을 하던 큰 관심이 없듯 타인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나만 신경 쓸 거라는 자의식도, 내 작은 실수로 나를 얕잡아 볼 거라는 두려움도 모두 내가 만들어 낸 실체 없는 감정이라고. 그래도 정 안되면 실제로 그렇게 생각해도 별 수 없다.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바인가 하고 갑자기 화를 내며 정신적으로 허공에 스파링을 하기도 한다.


그래도 희망적인 부분은 여전히 힘들고 바이브레이션 가득하지만 어떤 날은 거리낌 없이 말을 제법 잘할 때도 있다는 점. 아주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다 보면 언젠가는 더 자유롭게 내 생각을 늘어놓는 날이 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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