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텅 빈 것을 채우려고 하는 본능이 있다. 가령, 흰 도화지에 무작위로 그림을 그리는 어린 시절의 모습을 떠올리면 그렇다. 또한 비어있는 것은 추위를 동반한다. 가구와 사람이 없어 텅 빈 집은 온기가 돌지 않아 난방비를 더 들게 만들기도 한다. 고로 '비어있다'라는 것은 여러 가지 방면으로 인간의 충동을 이끌어내기에 적합한 환경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3년 정도 친오빠와 살다가 그를 내보냈다. 그와 사는 1년간은 어쩌면 그가 변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20년간 주체 없이 살아온 사람이 몇 년 만에 주체성을 가진다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애초에 나는 그걸 기다려줄 만큼 여유 있는 사람이 아니었으며, 일전에 그에게 받은 배신감도 극복하지 못한 상태였다. 함께 있을수록 상처 주는 일이 더 익숙해진다는 점에서 그와는 떨어져 지내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가벼운 의무감을 가지고 우리를 신경 쓰고 있는 이모들에게도 상황을 전해야 했다. 나는 친오빠를 쫓아낸 동생이라는 말을 차단하기 위해 3년간 숨겼던 그의 행보에 대해서 말했다. 그녀의 유일한 자랑거리였던 아들의 실체를 알리는 것뿐인데 떠난 그녀에게 미안함이 들었다. 그렇지만 나는 그의 엄마가 아니고, 그를 지켜주기 위해 내가 비난을 감수해야 할 이유도 없었다(난 습관적으로 그녀의 마음을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어서 경계할 필요가 있다).
사실을 알게 된 이모들은 미안함이 들었는지 한동안 내게 연락하지 않았다. 나의 친오빠도 금방 집을 나갔고, 집에는 이제 나의 고양이들과 나뿐이었다. 그렇게 네 번째 겨울이 찾아왔다. 나는 추위를 잘 타지 않는 성격이었는데, 유난히 집이 춥게 느껴졌고 난방비는 더 많이 나왔다. 나의 집은 본의 아니게 내 충동을 이끌어내기에 충분한 환경이 되어버렸고 나의 충동이 시작되었다.
나는 친구들을 더 오래 잡아두기 위해 큰돈을 쓰곤 했고, 지인의 약속에 따라다니며 새로운 사람들을 만났으며, 목적 없는 소개팅에 나가서는 내가 만들어낸 모습을 좋아하는 상대를 비웃었고, 조금이라도 내 마음을 떠보려 하면 연락을 끊어버렸다. 이러는 와중에 짝사랑하던 이에게 술김을 빌려 고백했고, 차이기도 했다. 당시에는 상처를 받았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이런 행보를 반복하는 충동적인 사람을 좋아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긴 한 것 같다.
끝없이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다가 집에 들어오면 공허함은 더 커졌고, 집은 더 추워지기만 했으며, 난방비는 줄지를 않았다. 나는 도대체 무엇을 원해서 이런 시간을 반복하는 걸까. 나는 대체 어떤 사랑을 원하고, 어떤 사람을 찾는 걸까. 나는 왜 매일매일 사람을 만나 기대와 실망을 반복하고 더욱더 혼자가 되어버리는 걸까. 그러다 또 굴레에 빠진다. 사랑이 뭘까.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데, 말하는 사람들뿐이고 언제나 나만 실패하는 그것 말이다. 그러다, 귀순의 말이 떠올랐다.
'사랑을 받은 사람이 사랑을 줄 줄 알아. 그러니까, 사랑받은 사람을 만나야 해.'
이에 나는 사랑받은 사람이라는 게 어떤 사람인건지 의문에 빠졌다. 나도 분명 그녀의 불안하고 투박한 사랑을 받았지만 귀순이 말하는 사랑받은 사람은 나를 뜻하는 말은 아니라는 건 알았다. 귀순 역시도 내가 온당한 사랑을 받지 못했기에 그걸 채울 사람을 만나라는 의미로 이 말을 하곤 했으니까. 그런데 이 말을 되새길수록, 마치 나는 영원히 사랑할 수도 받을 수도 없는 존재가 된 것 같았다. 그래, 애초에 난 사랑이라는 게 뭔지 모르는데, 사랑할 사람을 찾는다는 건 말이 안 되는 거였다.
나는 꽤나 긴 시간 '사랑받은 사람'에 대해 고민해 왔다. 그리고 그려왔던 것 같다. 사랑이라는 건 이런 거 아닐까. 그리고 사랑받은 사람은 이런 모습을 하고 있지 않을까.
그런 나에게 그는, 희는, 내가 투박하게 상상한 사랑받은 사람이었다. 희는 충동이라는 건 마냥 나쁜 결과만을 가져오지 않는 다는 걸 알려준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