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흔적
이삿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녀 평생의 절반을 살아온 곳이었다.
처음에는 세 가족이 어떻게 해서든 지켜내려고 고군분투했던 공간이었고 삶의 터전이었지만 그녀 혼자 남은 집은 이제 더 이상 아무 의미도 가지지 못했다. 빼곡하지만 공허한 집안에 서서 뭐부터 시작해야 할지 몰라 서성이던 그녀는 일단 옷장부터 열었다. 눅눅한 세월의 냄새가 베인 옷들을 큰 봉투에 쑤셔 넣었다. 가구들 사이사이에 쌓인 관리가 되지 않아 깨진 결혼사진과 크고 작은 잔짐을 끄집어냈다.
그러다 그녀는 엄마가 생전에 쓴 만화 원고를 발견했다. 25년 전, 출판사가 잠적해 출판되지 못한 만화였다. 마치 보기 싫은 기억인 듯 장롱 위 보이지 않는 깊숙한 곳에 숨겨뒀지만, 어찌 보면 소중한 물건처럼 박스 안에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그녀 다운 방식이었다.
엄마의 만화책 속 이야기가 그녀의 마음속에 엄청난 파도를 불러올 줄 알았지만, 엄마의 만화는 당시 서양문화를 동경하던 여자아이의 사랑 이야기였을 뿐이었다.
이야기 어딘가 거대한 비밀을 품고 있지도 않았고 파도가 밀려오지도 않았다. 그 자리에서 한참을 만화책을 뒤지며 숨은 비밀을 찾고 싶었지만 결국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따지고 보면 25년 전 그녀의 엄마는 지금의 그녀와 비슷한 또래에 아이일 뿐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 마음이 일렁였다. 그제야 그녀가 얼마나 어린 나이에 꿈을 놓았는지 와닿았다. 5년 전 무작정 영화가 하고 싶다던 그녀에게 엄마가 해주었던 말이 떠올랐다.
“우리 집 같은 곳에서 여자들은 그런 걸로 먹고살 수 없어.”
그날 나를 알아봐 주지 못하고 나를 믿어주지 않는 그녀가 너무나 먼 타자처럼 느껴져서 나와는 아무것도 공유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는 본인이 만화가였을 때의 이야기를 꺼내 다가왔다. 그녀의 입을 통해 듣는 과거 이야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불운의 연속이었고 비극의 세습이었지만 그 시간을 지나 현재에 잔존하고 있는 그녀는 스스로를 어딘지 좀 자랑스러워하는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나는 엄마의 인생사가 영화 같다고 했지만, 그녀는 본인의 인생을 만화 같다고 표현했다. 시간이 흘러, 다음 세대의 아이는 삶을 어떻게 표현할지 궁금해졌다.
멍하니 상념에서 벗어난 그녀는 만화책을 발견한 장롱 위 먼지를 닦아냈다. 너무 오랜 시간 그 자리에 있어서인지 닦이지 않는 공간 흠이 남아있었다. 그러나 그 자리를 굳이 닦지도, 다른 것들을 채우지도 않기로 했다.
빈자리도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