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촌에 갔다. 처음에는 골목길 돌담이 멋스럽다고 생각했다. 돌담길을 따라 죽 걷는데 점점 저 담벼락 안은 어떤 모습일까 궁금해졌다. 까치발을 하고 기웃거려 보았지만 담 안이 어떤 모습인지 도무지 가늠할 수조차 없었다. 그 자리에 서서 담장의 높이를 본다. 내 키보다 훌쩍 높아서 시야를 가로막는다. 담이 낮으면 외부인의 출입을 막을 수 없고 담이 높으면 담 안에 있는 내 시야마저 가로막는다. 어느 정도 높이의 담이 적정한지는 오르락내리락 높이를 조정해 봐야 알 수 있다.
관계라는 것이 결국 담장 높이를 정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적절한 선은 외부 침해를 막을 수 있는 가장 최소한의 높이이다.
침해를 막는 것과 시야를 가리는 것은 공존하기 때문.
어디까지 낮출 수 있을까. 어디에서 낮추기를 멈춰야 할까. 나의 담장은.
한동안 담장을 높게만 쌓으려다가 내가 그 안에 갇혀버렸다. 담을 낮추니 내 영역을 침범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담을 높이니 세상과의 연결이 어려웠다. 에크하르트 톨레는 <삶으로 다시 떠오르기>에서 “자신이 전체와 연결되어 있음을 모든 다른 사람과 생명의 원천과 본질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 연결성에 대한 기억상실 그것이 원죄이고 고통이며 망상이다. 그 분리되어 있다는 망상이 내가 하는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을 밑바탕에서 지배할 때 나는 과연 어떤 인간을 창조하겠는가?”라고 했다. 결국 세상과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을 놓지 말고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나한테 문제가 있는 걸까? 나를 내 앞에 펼쳐놓고 이리저리 둘러봤다. 내게는 관계에 대한 지나친 이상화가 있었다. 모든 관계는 순수한 의도로 연결되어야 한다, 사람은 사람을 이용해선 안된다. 이런 지나친 이상화가 내가 사람을 좋아하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이었다.
신형철 평론가는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에서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결함이라고 했다. 사람은 나약하다. 그래서 때로는 비틀어지기도 한다. 나도 그럴 수 있다. 인간에 대한 기대를 조금은 내려놓자 내게도 상대방에게도 아주 조금은 너그러워질 수 있었다.
유난히 갑갑하게 느껴지는 날이면 주변사람에 대한 기대가 어느새 높아진 것은 아닌지, 나에 매몰돼 전체와 단절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내 담장 높이를 확인한다. 내 담장이 작년보다 더 높아진 건 아닌지, 그 담장 안에서 나는 순환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