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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소민 Nov 05. 2024

미처 예상하지 못한 일들

믹서기 폭발 사건.

한국에서 가져온 믹서기가 말썽을 부렸다. 인도에서는 가전제품 사는 거 아니라고 누군가 귀띔을 해 준 기억이 있긴 하지만 다음 한국 방문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다. 그래도 돈을 좀 들이면 괜찮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나름 괜찮은 브랜드를 구매했다.

아침 햇살이 유난히 부드러운 날이었다. 운동을 다녀와서 나는 건강한 하루를 시작하겠다는 의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싱싱한 비트와 사과를 준비해 믹서기 안에 넣으며 생각했다. 붉은 비트의 강렬한 색감이, 마치 내 하루의 열정과 닮았다는 기분이 들었다. 모든 것이 완벽해 보였다. 뚜껑을 닫고 버튼을 눌렀다.

그러나 그 순간, 상상도 못 한 일이 벌어졌다. 강렬한 소리와 함께 뚜껑이 날아가더니, 붉은 액체가 폭포처럼 부엌을 뒤덮었다. 그것은 마치 나의 작은 세계가 한순간에 붕괴한 듯한 기분이었다. 눈앞에서 펼쳐지는 장면은 믿기 힘들었다. 천장부터 바닥까지, 냉장고와 가구들, 주방 도구들까지 모든 것이 그 붉은 물결에 물들었다. 마치 비트가 아니라 나의 감정들이 모두 터져 나온 것만 같았다.

난 그 자리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손에 들려 있던 믹서기조차 이제는 무의미해 보였다. 대체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이 난장판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막막했다. 평소에는 깔끔하고 정돈된 주방이었는데, 지금은 내 혼란스러운 마음처럼 어지러웠다. 마음 한구석에서는 웃음이 터져 나오려 했지만, 그 웃음이 멈칫하며 눈물로 바뀌려는 것을 느꼈다.

서러웠다. 이곳이 인도구나… 그냥 맘껏 울어버렸다. 정신을 차리고 나도 바뀐 건 없었다.

조용히 행주를 들고 아끼던 커피 도구들부터 닦기 시작했다. 손끝에 닿는 차가운 붉은 액체는 내 마음의 어떤 부분을 쓸어내고 있었다. 냉장고와 가구들에, 하나하나에 남은 얼룩을 닦아내며, 마치 나의 감정과 기억을 정리하는 기분이었다. 시간을 두고 천천히, 나는 이 붉은 흔적들을 지워나갔다. 어처구니없고 화가 났던 마음이 조금씩 누그러졌다.

이 작은 사고는 어쩌면 하루를 망친 일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행주를 쥔 내 손이 움직일수록, 그 붉은 물결 속에 담겨 있던 무언가가 사라지며 마음속에서 가벼움이 피어났다. 때로는 예상치 못한 일이 터지면서 우리의 일상을 엉망으로 만들기도 하지만, 그 속에서 다시 깨끗해지는 과정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시간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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