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일 국제·정치 뉴스가 북한의 러시아 파병으로 시끄럽다. 국내 보도에 따르면 북한이 1만 명이 넘는 군인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전선으로 파병했고 대가로 대규모 경제적 지원을 기대 중이다.
얼마나 돈이 없으면 천 단위도 아닌 만 단위 군인을 자국과 아무런 상관없는 국가에 파병해 목숨을 걸고 싸우게 만들까란 생각과 함께 1960년대 우리나라 베트남 파병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2014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영토였던 크림반도를 병합한 후 전쟁까지 이어진 현 상황이 자칫 우리나라와 북한이 있는 동북아시아까지 번지지 않을지 걱정도 들었다.
우리나라 정부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선 북한군 파병 소식을 접한 후 긴급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소집해 파병이 우리나라에 미칠 영향은 없는지, 있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논의했다. 동북아 확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있단 것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의 가장 직접적 원인은 우크라이나의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NATO) 가입으로 인한 자유·서방세계 확대를 우려한 러시아가 침공을 일으킨 것이지만 더 깊이 들어가면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병합을 들 수 있다.
크림반도는 우크라이나 남쪽 흑해로 돌출된 반도다. 본래 러시아 영토였으나 1954년 우크라이나에 편입됐다.
이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정권 교체 과정서 크림반도 러시아인을 보호한단 명분을 내세우며 반강제적으로 병합했다.
러시아는 주민들에 독립 여부를 묻는 주민투표를 진행해 명분이 있다 주장하지만 유럽연합(EU)과 미국을 포함한 국제사회는 러시아 크림반도 병합을 아직도 인정하지 않고 있다.
국제사회 비난을 감수하며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병합한 명확한 이유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가장 유력한 이유로 겨울에 얼지 않는 ‘부동항 확보’가 거론된다.
크림반도 병합 이전 러시아가 유럽에 유일하게 보유했던 부동항은 칼라닌그라드다. 이마저도 러시아 본토로부터 482km나 떨어져 있다.
크림반도 서쪽엔 세바스토폴이란 항구가 있다. 러시아가 유럽으로 갈 수 있는 유일한 항구가 생긴 셈이다.
영토 강제 병합 역사 공통점은 ‘많은 사람의 희생을 거쳐 간 아픈 역사’라는 것이다.
대표적 사례가 우리나라도 국제평화유지군을 파병한 ‘인도네시아 동티모르 점령’ 사건이다.
1974년 동티모르 일대를 점령 중이던 포르투갈 내부서 쿠데타가 발생했다. 쿠데타군은 식민지 포기를 선언했고 동티모르서도 탈식민화가 이뤄졌다.
동티모르엔 크게 두 세력이 있었는데 티모르민주연합과 동티모르 독립혁명전선이다. 이 둘은 처음엔 연합했지만 서로간 견제가 심해져 결국 전투까지 발생했다. 동티모르 독립혁명전선에 패한 티모르민주연합은 서티모르로 피신을 갔고 바로 옆 국가 인도네시아와 합병한단 문서에 서명했다.
이를 명분삼아 인도네시아는 동티모르에 군사를 보내 점령 작업에 착수했다. 1975년 12월 연희꽃 작전으로 동티모르를 침공했다.
수도 딜리에 진입한 과정서 400명이 사망했다. 1991년 인도네시아 군에 의해 사망한 독립주의 청년 추모식서 독립 시위가 발생했는데 인도네시아군은 이들을 향해 무차별 발포했다. 산타크루즈 대학살로 불린 참상에 250명의 동티모르인이 희생됐다.
이후 동티모르서 독립운동이 지속됐고 인도네시아 정부는 1999년 독립 여부를 묻는 주민투표를 실시했다. 전체 중 78.5%가 독립에 찬성했지만 불복한 인도네시아 군과 민병대가 민간인 학살을 자행했다.
치안 불안 및 민간인 학살이 외부에 알려지자 동년 9월 다국적군 선발대 2500명이 동티모르 치안 회복 활동에 돌입했다.
우리나라도 유엔 평화유지군 일원으로 상록수부대를 파견했다. 치안이 안정된 후 동티모르는 정부를 구성했고 제1대 대통령으로 독립 최전선서 활약했던 알렉산더 구스마오가 당선됐다.
미국도 병합까진 아니지만 반강제 영토 획득 역사를 갖고 있다.
1795년 미국 제11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제임스 K. 포크는 후보 시절 공약한 ‘영토 확장’을 위해 멕시코와 전쟁을 벌인다.
훗날 제12대 대통령으로 취임하게 되는 재커리 테일러 장군에 군사를 이끌고 남쪽으로진군할 것을 명령했다.
3만 2000명 남짓한 멕시코군은 7만 명이 넘는 미국 대군을 이겨내지 못했다. 1733명이 전사한 미국과는 달리 멕시코는 1만 1550명이 전사했다.
멕시코 수도 과달라하라를 점령한 후 멕시코 총사령관 항복을 받아낸 미국은 1848년 2월 2일 멕시코 전체 영토의 55%에 달한 135만 6000㎢ 영토를 받고 1500만 달러 자산과 325만 달러 부채 청산을 멕시코에 대가로 지불한단 조약을 체결했다.
오늘날 캘리포니아, 네바다, 유타, 콜로라도, 뉴멕시코, 애리조나, 와이오밍 주에 해당된 영토를 획득했다.
수백 년간 평화로이 미국령으로 있던 해당 영토는 제1차 세계대전 다시 한번 격랑의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오스만 튀르크 제국과 함께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독일은 전쟁 후반 전선서 밀리기 시작하자 멕시코에 군 지원을 요청한다.
당시 독일 제국 외무장관이던 치머만은 비밀리에 멕시코에 전보를 보낸다. 멕시코가 독일 제국을 도와주면 미국에 빼앗겼던 텍사스, 뉴멕시코, 애리조나 영토를 회복하는 데 도움을 주겠단 전보를 암호로 보냈지만 영국이 감청을 통해 알아내 미국에 전달했다.
당시 미국 내부선 참전 여론이 들꿇고 있었다.
독일 잠수함이 미국 민간선 루시타니아호를 침몰시켜 참전 여론이 높아졌을 때도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은 경고만 보냈다. 우리나라에 ‘민족자결주의’로 잘 알려진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유럽 전선에 애꿎은 미국 청년을 보내 희생시키고 싶지 않아 했다.
그러나 치머만 전보가 알려지고 제1차 세계대전이 유럽뿐만 아니라 미국이 있는 북아메리카까지 파급력이 미칠 수 있단 인식이 퍼지자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독일 제국에 선전포고했다. 더는 경고성 메시지로 사태를 진정시킬 수 없다 판단한 것이다.
사실 국내 언론이 보도를 덜 할 뿐이지 지금도 세계 곳곳선 영토 분쟁이 진행 중이다.
바로 옆나라 일본은 러시아와 북방 해양영토 쿠릴열도를 두고 분쟁을 벌이고 있다. 중국과는 일본명 센카쿠 열도, 중국명 댜오위다오를 놓고 정면충돌 직전까지 갔다.
일대 섬에 중국 인공기를 꽂은 중국인을 일본이 체포하고 놓아주지 않자 중국은 반도체 필수재료 희토류 수출을 전면 금지했다.
반도체를 비롯한 전자산업을 중요 산업군으로 둔 일본은 결국 중국인을 놔주며 굴복한 모습을 보였다.
중국도 베트남, 필리핀, 브루나이, 말레이시아와 남중국해 영토를 두고 첨예한 대립을 이어가고 있다.
우리나라라고 영토분쟁서 자유로운 건 아니다. 삼면이 바다인 우리나라는 일본과 중국으로부터 해양 영토에 대한 압박을 받고 있다.
영토는 국가가 존립하기 위한 최우선 요소다. 헌법서도 대통령이 영토와 영공, 영해를 보전할 의무를 지닌단 조항이 있을 만큼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국가 자산이다.
현 정부뿐만 아니라 미래 우리나라 정부도 외국의 우리나라 영토에 대한 분쟁화 공격에 휘말리지 않길 바란다.
독도, 이어도, 격렬비열도는 분쟁 대상도 될 수 없는 굳건한 우리나라 영토임을 대내외에 알릴 수 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