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토록 다정했던 승훈은 그날 이후 엄마의 아들이 아닌듯했다. 집에 있어도 남 같았고 졸업 후 타지로 떠난 후 20년 넘게 거의 연락 없이 지내게 되었으니...
엄마와 멀어진 시골 소년, 승훈이
아주 오래전에 있었던 일이다. 엄마를 좋아하고 심부름을 잘하던 국민학교 4학년 승훈이가 시골 마을에 살고 있었다. 승훈이네는 농사를 짓는 가난한 가정이었고 부모님은 6남매를 키우고 있었는데 두 딸과 큰 아들은 직장이나 학교 문제로 도시로 떠났고 둘째 딸은 읍내로 출퇴근하고 있었다. 그리고 집에는 아직 학교를 다니는 어린 자녀들 둘이 있었는데 당시에는 워낙 가난하던 시절이라 중학교만 졸업하면 도시로 떠나 일을 하곤 했었다.
해가 지는 저녁이면 승훈이 엄마는 저녁식사를 준비하면서 승훈이에게 둘째 누나를 마중 나가라는 심부름을 시키곤 했다. 읍내에서 일을 하는 둘째 누나가 버스를 타고 오게 되면 정거장에서 기다렸다가 함께 집으로 대려오라는 것이다. 밤길이라 어둡기도 하고 누나가 무섭기도 할 테니 플래시를 들고나가 누나의 귀갓길을 함께 하라는 것이다.
그날도 승훈이는 쇠죽을 끓여 소들을 먹이고 엄마가 시키는 대로 플래시를 들고 산을 넘어 논들을 지나 버스 정거장으로 향했다. 누나는 보통 저녁 8시 정도에 정거장에 도착하지만 엄마는 한 시간 전에 승훈이를 집에서 내보냈다. 그렇게 저녁 7시 정도에 출발한 승훈이는 작은 산을 넘고 논들을 지나 시골 정거장에 도착하게 되었고 쉴 의자 하나 없는 그곳에서 버스가 도착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느새 배는 고파 오고 기다리던 버스가 왔으나 누나는 내리지 않았다. 간혹 늦게 도착하는 경우가 있어서 다음 차에 오려나 보다 하고 고픈 배를 쥐어잡고 기다림은 계속되었다. 1시간에 두 번 오는 버스는 30분 후에 또 도착하였다. 그런데 이번에도 누나는 내리지 않았다. 오늘은 많이 늦는구나 하고 또다시 기다림은 계속되었고 한참 후에야 막차가 도착했다.
이제 드디어 집에 가서 밥을 먹겠구나 하고 누나가 내리길 기다렸으나 이번에도 누나는 내리지 않았다. 어느새 밤은 깊었고 떠나가는 막차를 보며 혼자서 터덜터덜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도착하니 어느새 밤 10시쯤 되었고 누나는 이미 도착해 있었다. 어리둥절한 승훈이에게 엄마는 큰소리를 쳤다.
"이 녀석아 기다리다가 누나가 안 오면 빨리빨리 집에 와야지 왜 이렇게 늦게 와!"
누나는 평소 내리지 않던 다른 정거장에서 내려 걸어왔기에 서로가 엇갈린 것이었다. 당시에는 휴대폰이 없던 시대라 나에게 연락할 길이 없었던 것이고 하염없이 기다리다가 집에 와서 엄마에게 위로는커녕 꾸중을 들은 승훈이 눈에는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고 울며 따지는 승훈이에게 엄마는 또 큰소리를 쳤다.
"왜 울고 지랄이야 빨리 들어와서 밥이나 먹어!"
엄마와 누나는 벌써 식사를 한 후라서 승훈이 것만 덩그러니 남아 있는 상태였으나 승훈이는 도저히 밥을 먹을 수가 없었으며 그대로 골방에 들어가 하염없이 울고 또 울었다. 엄마는 방문 밖에서 그런 승훈이를 몇 번 더 책망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몇 년후 인근 도시로 고등학교를 들어간 승훈이는 공장에 다니던 셋째 누나의 자취방으로 가면서 집을 떠나게 되지만 마음은 이미 오래전에 엄마를 떠난 상태였다. 세월은 흐르고 흘러 승훈이가 성인이 된 후에도 그때 그 얘기만 나오면 엄마는 승훈이를 나무라곤 했다.
그렇게 엄마와 사이가 틀어진 승훈이는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그 일을 잊을 수 없었고 그날 이후 그토록 다정했던 엄마와 마음이 멀어져 버렸다. 그날 밤 서러움과 배고픔에 잠을 잤던 그 기억이 너무나 또렷하게 떠올라서 더 이상 엄마에게 가깝게 다가갈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명절에 가족들과 모여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그날의 얘기가 나오자 엄마는 승훈이에게 이런 말을 했다.
"승훈아 사실 그날 밤 나는 다음날 새벽시장에 내다 팔 것들을 준비하느라고 너를 데리러 갈 수 없었단다. 그리고 누나가 내리지 않으면 네가 그냥 올 거라고 너무 편하게 생각을 했던 것이었지.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 늦게까지 누나를 기다렸던 네가 얼마나 외롭고 배가 고팠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구나. 그리고 그날 밤 너에게 그렇게까지 소리칠 것도 아니었는데 나도 참 너무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땐 하루하루 사는 게 참 힘들더구나."
그날 어느덧 40살이 다 돼가는 승훈은 엄마를 몇십 년 만에 껴안았다. 엄마를 부둥켜안은 승훈의 눈에서는 하염없는 눈물이 흘러내렸고 엄마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렇게 해서 수십 년간 쌓여 있던 앙금이 풀리고 예전에 그토록 다정했던 승훈이가 엄마 곁으로 28년 만에 다시 돌아오게 된 것이다. 그리고 6년 후 엄마는 암으로 돌아가시게 된다.
진심 어린 사과 한마디로 등을 돌렸던 옛 친구를 다시 찾을 수 있다
당신을 오래전에 떠나버린 친했던 친구를, 보고 싶은 가족을, 사랑했던 아내를, 아끼던 후배를, 성실하던 직원을, 정겨웠던 이웃을 ... 그들은 오늘도 잊지 못한다. 그날의 가슴 아팠던 그 순간을 ... 잊을 수 없는 당신의 그 말을!
"바보 같은 녀석, 잘못은 자기가 해 놓고 왜 나를 탓해!"
"무슨 남자가 운전하나 똑바로 못하고 사고를 내"
"이게 다 당신 때문이라고! 당신을 만나지 말았어야 했어."
"어휴, 저런 걸 직원이라고 뽑은 내가 잘못이지"
"무슨 여자가 김치 하나를 제대로 못 담그나?"
"우리 애는 왜 이렇게 멍청할까? 하긴 제 아빠를 닮았으니 그렇지 뭐"
모진 한마디의 말은 상대의 가슴에 꽂는 비수와도 같다. 그 칼이 가슴에 꽂혀있는데 ... 10년이 간들 30년이 간들 어찌 잊으랴! 뽑아내야 잊히지~
당신의 비난과 냉소에 가슴 아팠을 그 사람이 생각나거든 이제라도 사과를 하자. 그 사람 눈 아래 흐르던 눈물이 메마른 지 오래되었어도 그 마음은 그때와 변함없으리라. 아직도 가슴속엔 그날의 대못이 깊숙이 박혀있음을 잊지 말라. 콕 찍어 그때 그 상황을 말하며 진심으로 사과하라. 무엇을 어떻게 잘못했는지 말하라. 부디 당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그 사람 잘못이 아님을 말하라.
"영식아 그때 졸업식 때 친구들이 다 있는 자리에서 너랑 동창이란 것이 창피하다고 했던 말이 너무 후회된다. 늦었지만 정말 미안했다. 그때 그 일은 너의 잘못이 아니었다."
"여보, 그때 차 사고 났을 때 당신도 속상했을 텐데 내 말이 너무 경솔했어~ 그땐 정말 미안했어"
"이거 봐 정주임, 지난번에 자네가 거래처에 샘플을 잘못 보냈을 때 내가 자네에게 너무 심한 말을 했어. 일을 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고 자네가 열심히 잘해주는 것도 많아서 이사님들도 직원 잘 뽑았다고 하셨거든~ 내가 자네에게 뭐라고 사과를 해야 할지 며칠을 고민했다네"
그냥 두리뭉실 돌려서 말한다고 그날의 상처가 치유되지 않으며 멀어진 관계가 좁혀지지도 않는다.
"혹시 내가 뭐 실수한 것들이 있었어도 이젠 잊어~ 사람이 좀스럽게 말이야!"
"친구끼리 그럴 수도 있지 뭘 그러나? 이 사람 알고 보니 속이 밴댕이구먼~"
"야, 내가 그렇게 말할 수도 있지 이제 와서 뭘 어쩌자는 거야!"
어떤가? 만일 이런 말을 속상했던 당신이 듣는다면 마음이 풀어지겠는가? 풋, 더 틀어지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당신의 잘못이 깨달아지거든 진심으로 사과하라. 그리고 같이 마음껏 울어라. 멀어진 그는 반드시 돌아온다. 그토록 다정했던 그 모습 그대로~ 부디 더 늦기 전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