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래보다 조금 더 큰 키와 넓은 어깨, 튼실해 보이는 몸집으로 농구선수(시골초등학교 농구팀)로 발탁되었으나 '숨'이 너무 가빠 경기 내내 뛰는 것이 버거워 그만두겠다고 말씀드렸던 나...
그래서인지 10대 20대에는 운동을 그리 즐기지 않은 채 지냈다.일상의 움직임 외에 될 수 있으면 최대한, 나의 근육이 조금이라도 당길만한 과잉의 움직임은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었다.
이어지는 30대는 세아이를 출산하고 양육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지나가 버렸다.
시간이 흘러 아이들이 엄마 손 대신 연필을 쥐고 학교 공부를 시작하고, 자전거, 인라인, 에스보드를 자유자재로 탈 수 있는 나이만큼 자랐을 때, 그러니까 40대 초반에 '걷기'와 '산행'이 내 삶의 한 부분에 들어왔다. 주말이나 휴일이 되면 가족과 함께 근처의 나지막한 산을 종종 올랐고, 금요일 퇴근길엔 동료샘과 함께 또는 혼자 학교에서 집까지(1.5킬로 거리) 쉬엄쉬엄 걸어 돌아오곤 했다.
내 신체의 특징과 움직임과 관련지어 인생을 회고하다 보니, 불현듯 내가만난 산에 대해 쓰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태어나서 현재의 나이에 이르기까지
내가 머물렀던 지역마다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산,그리고 그 산에 오른 기억은 아련한 이미지로 또 기분 좋은 노곤함의 감각으로 내 몸 곳곳, 섬유조직에까지 스며들어 있다.
인터넷으로 검색하면 아주 자세히 나와 있는 그 장소들에 대한 설명은 배제하고, 오직 그 산에 대한 나의 추억, 나만의 의미만을기록하고 싶다. 이 기록은 어쩌면 나의 작은 역사책이 될지도 모르겠다.
<두륜산, 전남 해남 소재>
내고향 해남에 소재한해발 703m의 '두륜산'. 신작로로 이어지는 시골집 뒷문으로 나가면 언제든 볼 수 있었던 산이었다. 어린 내가 봤을 때 높고 웅장하게 느껴졌던, 잘 다듬어 놓은 얼굴 같은 암석으로 덮인 산. 항상 우리 마을을, 우리 학교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았던 산. 그래서 언니랑 나는 그 산을 우리 마을의 '큰 바위 얼굴'이라고 불렀다.
읍내 쪽으로 가다 보면, 그 산자락엔 꽤 유명한 '대흥사'라는 절이 있다. 그 불전에 천 개의 표정을 지닌 '천불상'도 있다고 했다. 나의 초등학교 일기장에 엄마가 '댕사'에 다녀오셨다는 문장이 나오는데,어른들이 말씀하실 때 대흥사를 빨리 발음하시니 나한텐 '댕사'로 들렸나 보다.
나는 이 산에 올라 본 적이 없다. 아직 걷기나 산행의 맛을 알지 못하던 시절에 내가 머무른 골목에 있었던 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회가 된다면 남편과 아이들과 함께 꼭 올라보고 싶다. 내 인생이 시작된 곳에서 나의 유년기를 지켜봐 준 산이고, 내 인생에서 처음 만난 산이므로...
<구곡폭포, 강원 춘천 소재>
이곳을 처음 가본 때는, 걷기나 산행과 아무 상관없이 지낸 10대, 20대의 세월을 한참 뛰어넘어, 춘천으로 시집와 '춘천댁'이 되고 나서였다. 첫째가 세 살쯤 되었을 어느 여름날, 남편이 근교에 시원한 곳으로 데려가 주겠다 하여 따라나섰다. 남편은 이곳에 여러 차례와 보았겠지만, 낯선 도시로 시집온 나에게는 처음인 곳. 설렘이 발동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매표소를 지나 완만한 산길을 20분쯤 천천히 올라갔다. 푸르른 나무와 계곡물 흐르는 소리에 아이도 즐겁고 엄마인 나도 즐거웠다.
목표지점인 폭포에 다다랐을 때, 엄마도 아이도 함께 "와!!"
높다란 꼭대기에서 떨어져 내려오는 기다란 물줄기. 폭포의 뒷배경이 되는 기암괴석과 조화를 이룬 그 물줄기와 튀는 물방울로 인해 가까이 갈수록 시원함이 더해졌다.
돌이켜보면, 폭포를 볼 때마다 늘 깜짝 놀랐던 것 같다. 대학을 졸업하고 잠깐 미국에 머물렀을 때, 캘리포니아 주에 있는 요세미티 국립공원을 관광한 적이 있다. 도로가에 차를 세워두고 멀리서 보이는 폭포를 보았을 때. 암벽 사이로 흘러내리는 그 하얗고 굵은 물줄기에 입을 다물지 못했었다.
폭포를 보게 될 거라고 할 때, 내 머릿속에 '폭포'라는 낱말, 그 두 글자만 존재하지 지금 내 눈앞에 갑자기 펼쳐지는 이 장관은 아직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공포스러운 놀람이 아닌 기분 좋은 놀람!!
몇 해가 지나, 둘째 셋째까지도 잘 단장된 이 산행길을 걸을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을 때, 교회 자매님의 자녀들과 함께 이곳을 다시 방문하였다. 겨울방학 중이었던 2월의 어느 날에. 모두들 겨울외투로 무장하고, 남자아이들은 마른 막대기로 장난도 치면서 올라갔다.
역시나 구곡폭포는 우릴 실망시키지 않아. 겨울철에 만나는 구곡폭포는 또다른 감동을 선사했다. 여름날 그 기다랗던 물줄기가 새하얀 빙벽을 이루었다. 뒷배경이 되었던 암석을 두텁게 다 덮어버리고 거대하고 단단한 얼음길이 되어 있었다. 그 길에 매달려 있었던 빙벽 등반자들. 색다른 볼거리였다.
어쩌면 이때부터 집 근처의 산에 오르는 것을 좋아하기 시작하게 된지도 모르겠다. 나도 모르는사이에 그 씨가 뿌려졌나 보다. 그래서 <내가 만난 산>의 이야기가 이어지는 게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