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4월 첫 번째 토요일
딸아이가 토요일 학원을 선택해 준 덕분에 얻은 자유시간.
엄마인 내가 아니라 아이 본인의 의지로 선택했다는 사실이 내 마음을 몹시도 가볍게 해 주었다. 아, 신난다.
학원은 집에서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있지만 아이를 학원에 데려다주고 다시 집에 가면 집안일만 할게 뻔해서 집에 가는 대신 근처 괜찮은 카페를 찾아보기로 했다. 휴대폰을 꺼내 동네 이름에 카페라는 단어를 붙여 검색을 했다. 프랜차이즈 카페 말고는 마땅히 검색되는 게 없어서 직접 근처를 돌아보기로 했다.
뮤지컬 학원 건물 밖으로 나와 오른쪽과 왼쪽, 어느 쪽일까를 고민하다 왼쪽으로 돌아 나와 보니 바로 1층에 꽤 괜찮아 보이는 분위기의 카페가 있었다. 차갑고 뜨거운 것이 공존하는 독특한 이름. 금쪽같은 자유시간을 허투루 보내고 싶지 않아 일단 카페 문에서 조금 멀찍이 선 채로 카페 리뷰를 검색했다. 같은 이름의 카페가 또 있는 건지, 사장님이 같은 이름의 카페를 이전하여 운영하시는 건지, 대부분 대학로 이야기가 덧붙여진 리뷰가 많았다. 의아하긴 했으나 일분일초가 아까웠던지라 들어가 보기로 했다.
아직 손님은 없었다. 내가 오늘의 첫 손님인 것 같았다.
그리 넓지는 않았고 2인용 테이블이 5개 정도 있었다. 전체적으로는 우드톤, 모서리 구석마다 큰 화분이 바닥에 놓여 있었다. 어둡지도, 그렇게 밝지도 않은 조명. 입구 문 바로 맞은편에 아직 비어 있는 아담한 크기의 쇼케이스가 보인다. 메뉴판을 보니 구움 과자도 직접 만드시는 듯했다.
아메리카노와 휘낭시에 세트 메뉴가 있어서 부탁드리니, 아직 휘낭시에를 못 구우셨다기에 그럼 구워지는 대로 주셨으면 좋겠다고 말씀드리고 자리에 앉았다. 카운터를 등지고 가장 안쪽, 벽과 맞닿아있는 자리에 앉았다.
의자가 불편하지 않아서 좋았다. 적당한 쿠션감. 한참 앉아있어도 엉덩이가 아프지 않을 것 같았다. 세탁이 어렵다는 걸 알기에 위생 문제로 패브릭 소재를 좋아하진 않지만 얼룩도 없고 지저분해 보이지 않았다. 팔걸이가 있었지만 의자 너비가 좁지 않아서 가끔 몸을 꼼지락거리는 것이 방해될 정도는 아니었다. 등받이의 각도도 편안했다.
무엇보다 2인 좌석인데 테이블이 좁지 않아서 태블릿과 키보드, 휴대폰, 음료까지 놔두어도 좁다는 느낌이 들지 않은 점이 가장 좋았다. 테이블이 흔들거리지 않은 점도. 할로가 미술학원 갈 때 내가 시간을 보내는 카페는 프랜차이즈인데, 딱히 불만은 없지만 그곳엔 흔들거리는 테이블이 하나 있다. 빈자리가 많을 땐 그 테이블을 피해 앉지만 그렇지 못할 때엔 할로가 끝날 때까지 해소되지 않는 불만을 가지고 시간을 보내야 했다. 직원에게 말해도 되겠지만 어쩐지 그런 말을 하는 게 좀 예민한 사람처럼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가장 싼 아메리카노 한 잔 시켜놓고 두어 시간 보내고 가는 주제에 바라는 게 많은 사람처럼 보일 것 같아서 머뭇거려졌다.
그러다 어느 날인가 다른 손님들을 위해서도, 이 카페를 위해서도 얘기를 해야겠다고 결심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는데, 직원이 사장님께 갑작스럽게 사직의사를 밝히고 사장님은 몹시도 난감한 내색을 하시는 상황이 벌어져서 다시 앉고 말았다. 그리고 여전히 그 테이블은 흔들린다.
학원 근처 이 카페의 한쪽 벽에는, 그게 나의 왼쪽이었는데 벽을 따라 길게 늘어진 한 층짜리 책꽂이가 있었다. 꽤나 다양한 분야들의 책들이 여유를 두고 꽂혀 있었다. 소설, 에세이, 시집도 있고 뜨개질과 자수의 도안이 실린 예쁜 책도 있었다. 이런 부분에서 사장님의 취향을 알 수 있다. 괜히 펴보지도 않은 그 책들이 마음에 들면 엇, 하면서 이곳 주인과 내적친밀감이 은근히 느껴지는 것이다.
이 책장 위로는 화분이 몇 개 있었다. 이름은 잘 모른다. 찾아보고 싶은 의욕이나 호기심은 없지만 초록색이 곁에 있고, 우드톤의 이 카페와도 잘 어우러져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사장님이 커피를 가져다주셨다. 아메리카노 먼저 드릴게요. 아주 상냥하고 다정한 톤은 아니지만 내 커피 맛있으니 한번 드셔봐, 하는 자신감과 단호함이 묻어나는 목소리. 사실 두 시간의 자유시간을 보내기 위한 공간이기 때문에 커피맛은 가격이 크게 부담되지 않는다면 아무래도 상관없었지만 커피맛도 나쁘지 않았다. 음. 다음엔 이 카페의 시그니처를 마셔봐야지.
음악도 좋았다. 보통은 카페에서 책을 읽거나 글을 쓰거나 공부를 하니까 어떤 음악이 흐르느냐도 나에겐 중요한 요소이다. 조용한 피아노 선율. 제목은 잘 모른다. 어디서 들어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이런 스타일의 음악들이 다 비슷비슷하지. 볼륨도 적당하고. 내 마음과 머릿속을 헝클어트리지 않으면서도 귀를 허전하게 하지 않게 하는 그런 음악들.
주중에 못했던 공부를 30분 정도 하고, 나머지 시간엔 책을 읽었다. 손님이 제법 있었다. 테이크아웃하는 손님들이 대부분이었고, 일행과 함께 와서 커피와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도 있었다. 카페 분위기 탓인지 다들 목소리가 크지 않았다. 단골손님이 많은 듯했다. 사장님과 익숙하게 안부를 주고받기도 하고, 어떤 손님은 쿠폰을 모두 채웠다며 무료 커피를 받아가기도 했다.
할로가 끝나기 전에 학원 앞으로 가야 해서 정리를 하고 일어났다. 한 시간 오십여분, 이곳에서 보낸 시간. 그 시간을 온전히 채우고 보낸 느낌이었다. 다음 주에도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날 아이와 남편에게 학원 근처에 좋은 카페를 발견했으니 같이 가보자 했는데, 아쉽게도 일요일은 휴무였다.
그리고 할로가 두 번째로 뮤지컬 학원에 가는 날, 아이를 데려다주고 바로 그 카페로 향했다. 이렇게 어딘가를 오늘 꼭! 가야지,라고 생각한 것이, 그리고 그곳이 카페라는 것이 참 오랜만이었고 마흔 살 아줌마의 일상에 별 것 아닌 즐거움이었다. 나는 그날도 그 카페의 첫 손님이었고, 같은 자리에 앉았다. 그날은 시그니처 메뉴 중 하나인 바닐라빈 라떼를 마셨다. 다음엔 다른 시그니처메뉴에 도전해 보자. 한 시간 오십 분의 알찬 시간을 보내고 스스로 다음에 또 오겠다는 약속을 혼자 하고 나왔다.
사장님이 나를 오늘 기억했을까? 다음에 오면 기억해 주실까? 나와 비슷하거나 조금 더 나이가 많으실 것 같은데, 나중에 친해지면 조금은 사적인 얘기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뮤지컬 학원에 세 번째로 가는 날, 그 카페 문이 닫혀있었다. 안에 불이 켜져 있는 것 같아서 조금 기다려볼까 했는데, 내 자유시간을 카페 오픈을 기다리는 데에 쓸 만큼 여유 있는 사람은 아닌지라 근처 다른 카페로 갔다. 그곳은 꽤 유명한 곳이었는데, 의자가 너무 딱딱한 데다가 천고가 높고 유난히 음악소리가 웅웅 울려서 집중이 잘 되지 않았다. 테이블과 의자의 높이가 나에게는 맞지 않아서 고개를 좀 더 숙여야 했다. 그래도 해야 할 일이 있었기에 어쩔 수 없이 한 시간을 보내고 나왔다. 그래도 커피는 맛있었다.
그다음 주에는 아이 학원 끝나고 바로 여행 갈 계획 있어 아이 학원을 데려다주고 집으로 돌아와 여행 준비를 하느라, 그다음 주에는 개인적인 일이 있어서 그 카페에 가지 못했다.
그리고 오늘, 나는 오랜만에 그 카페에 갈 생각에 설레었고, 이 마음을 사장님께도 전해주고 싶었다. 아이를 학원에 데려다주고 조금은 천천히, 혹시 아직 오픈 전일까 봐, 조금 더 천천히 걸어 그 카페로 향했다. 오늘은 내부 불 마저 꺼져있다. 장사를 접으신 걸까. 단골로 삼고 싶은 내 마음의 단골 카페였는데. 어쩐 일인지 궁금하다. 나의 주말 시간을 다정하게 보낼 수 있는 공간을 허락해 주던 곳을 몇 주 못 가니 오래되지도 않은 인연인데 아쉽고 헛헛하다. 짧은 시간이지만 익숙한 감정을 내어주었던 공간이었는데 말이다. 다정한 것들이 쉽게 사라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을 오랜만에 느껴보았다.
**사진은 언젠가 마셨던 커피입니다. 글 속 등장하는 카페의 커피는 아닙니다.